떨림.
움직임도 멈춤도 아닌,
갈팡질팡 어쩔줄 모르는 상태.
두려움에서 오기도,
설렘에서 오기도 한다.
외부의 요인이기도,
내면의 요인이기도 하다.
대개 무지, 혹은 처음에서
시작된다.
나는 떨리는 순간들을 즐겼다.
찾아다녔다고 해도 무방하다.
가장 많았던 시도는
으레 함께하는 행위를 혼자하는 것이다.
영화관을 가거나, 공연을 보거나
고기집을 가거나, 술을 마시거나.
너무도 떨렸고 문 앞에서 망설이다
돌아선 적도 많았다.
때로는 너무도 충만한 시간이었고
때로는 후회가 밀려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떨리는 순간은
내게 설렘이 더 크게 다가온다.
아마도 여전히, 떨림이 남아있는 것이라면
사람을 만나는 순간일 것이다.
각자가 모두 무지로 둘러싸인 채
처음으로 다가온다.
내겐 꽤나 폭력적인 순간이다.
마주하고, 알고 싶다.
생각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음은
너무도 큰 설렘으로, 행복으로 다가온다.
물론 시간이 쌓여가며
다르게 다가오기도 한다.
반복적인 일 적으로 만나게 되거나,
내가 알고 있는 사람과 겹쳐 보이는 경우.
떨림은 사라지고
패턴만 남는다.
선입견 이라 부르는 관점은
나를 경직되게 만든다.
솔직하게 나는 경직된 사람이다.
떨림에서 오는 설렘을 붙잡기 보다,
익숙한 패턴을 더 많이 보인다.
그게 가장 효율적인 행동이니까.
에너지를 아낄 수 있으니까.
동시에 나는 떨림을 찾는 사람이다.
여전히 설레는 순간들이 보이고
기꺼이 몸을 내던지고 싶다.
몸과 마음으로 보내는 시간과 별개로
내가 바라는 지점은 다를 수 있다.
나는 종종 아포칼립스를 상상한다.
외부적인 요인으로 모든 것이 변수인 세상이 된다면.
두려움에서 떨림이 시작되겠지만,
나는 이유모를 설렘도 함께 올 것이라 여긴다.
지금 내게 찾아온 떨림이
외부에서, 내면에서 시작되었는지,
두려움이, 설렘이 큰 지.
차이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한 방향으로만 치우치지는 않는다.
결국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외부의 이벤트로 인해 내면의 떨림이 시작되고,
설렘의 욕심이 두려움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내게 떨림이 찾아오면 살펴본다.
설렐 수 있는 포인트는?
스스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우리는 꽤나 단순하다.
처음 떠오르는 질문만으로도 바뀐다.
두려움에 떨리던 몸을
설레는 마음으로 진정시킬 수 있다.
순간들이 모여갈수록
점점 더 무뎌짐을 느낀다.
대부분 흐름이 훤히 보이고
어떻게, 어떤 결과가 나올지도 안다.
진정한 떨림을 느꼈던 때가 언제였을까.
최근? 을 떠올리며 과거 여행을 한다.
무뎌짐 역시 필요하고 중요하다.
이것을 흔히 프로 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황하지 않고 나의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
경험이 많아 즉시 해결할 수 있는 사람.
프로인 순간의 나도,
떨리는 아마추어인 나도 좋다.
언젠가는 떨지 않고 잘 해내기를 바란다.
언젠가는 무디지 않고 설레기를 바란다.
이 역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한 모습만으로 나를 설명할 수 없듯,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나' 들이 존재한다.
요즘의 나는,
떨림을 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