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두르는 대신 기다리는

by 로그모리

술이 식는다

차가 식는다


둘 모두 식는다는 표현을 쓴다.


술은 섞어주고

차는 우려준다


둘 모두 각각의 방식이 있다.


빠르게 섞어서

천천히 우려서


식기 전에 마신다.



술을 매우 즐기는 사람으로

맥주의 칠링을 생명처럼 아꼈다.


소주는 차가워도 미지근해도

그만의 맛이 있어 즐길 만 하지만


맥주는 식으면 전혀 다른 음료가 된다.

그 맛이 그렇게 아쉬웠다.


그래서일까, 맥주를 두는 술자리에서는

자연스레 서두르게 된다.


술이 식기 전에 마셔야 하고

다음 술은 칠링해 두어야 마음이 편했다.



차는 우려내는 시간에 따라

그 맛과 향이 달라진다.


보리차는 따뜻하게도, 차갑게도 마시지만

각각의 매력과 향은 또 전혀 다르다.


심지어 지금은 한 번에 물을 맞추지 않고

진하게 시작하여 연하게 마시는 과정이니


시시각각 변하는 차의 맛은

또 다른 매력을 선사한다.


뜨거운 물을 부어 식기를 기다리며

적당한 타이밍에 마시는 한 모금이란.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술은 누가 억지로 먹이지 않아도 참.


시작을 그렇게 배운 탓일까

내 몸이 기억하고 속도를 올린다.


나도 모르게 생기는 조급한 마음은

술자리를 계속 다급하게 대하게 된다.


중간에 마가 뜨거나, 하던 주제가 바뀌는 순간은

언제나 다급히 술잔을 다 비워야만 하니.


서두르는 순간들은 어쩌면 감추는데 최적화된

본능에 가까운 행동들이 아니었을까.


술을 마시며 잠시 찡그리는 그 시간으로

암묵적인 침묵으로 갈음하는 일종의 합의로.



차를 사이에 두고 사람들과 대화하지는 않았다.

아직 내 주변에서는 이 모습 자체가 많이 어색하여.


다만 확실한 대화 상대는 매일 마주한다.

스스로와의 대화에 있어 큰 차이를 느끼고 있다.


습관처럼 숨기고 서둘러 넘기는 감정 대신

천천히 우려내어 굳이 들춰보는 감정을 마주한다.


처음엔 몹시도 불편한 마음이 솟아났다.

사라져야 할 것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으니.


하지만 그러는 시간이 쌓여가면서

이제는 다른 역할이 있음을 느끼고 있다.


대화할 준비가 되었다면

피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 했던가,

차가 조금 식는 그 시간을 즐겨보고 있다.



술과 함께 했던 태도는 회피였다.

술로써 잊기를 바란 순간들이 많았고


일종의 고통을 스스로에게 주면서

이 한 잔에 털어 넘겨 지우겠노라 다짐했다.


짧은 시간 동안 느끼는 해방감은

실제로 그렇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고


나는 그 해방감이라는 착각에

중독되어 술을 뗄 수 없었다.


차와 함께 하는 태도는 수용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녀석을 보고 있자면


피할 수 없는 진실을 마주 보고 있는

받아들이고 기어코 넘겨야만 하는 기분이랄까.


불편한 수용이라 착각했던 시간들이

지나고 해방되었음을 느끼고 나니


착각을 지난 해방감에

묘한 매력을 느끼고 있다.



조급한 마음은 불안에서 시작된다.


서두르던 그 순간들,

그 마음들은 결국 불안으로 이어진다.


기다리는 마음은 멈춤에 가깝다.


때로는 확신으로,

때로는 무지로 시작하여 결국 진실을 마주한다.


서두르는 대신 기다리는 시간들은

착각이 아닌 진정한 해결로 이어지고 있다.


서둘러 내리는 판단과 멈추어 내리는 판단.

이 둘의 간극은 설명하지 않아도 알거라 생각한다.


조급함을 두고 멈춤을 택함으로

스스로에게 당당하게 눈을 맞출 수 있다.



식을까 두려워 조급해지는가

식기를 기다려 차분해지는가.


여전히 다급한 상황 속에 놓이면서도

스스로 차분한 마음을 가지려 애쓴다.


상황은 급박할지언정

마음은 차분할 수 있으니.


나는 오늘도 멈춤으로

차가 식기를 기다려 본다.

이전 10화증명 대신 존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