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급함 대신 느긋함

by 로그모리

맥주 대신 보리차를 마시며

확연히 변한 움직임이 있다.


안절부절못하던 조급한 마음이

그러려니 하는 느긋한 마음으로.


분초를 다투는 일도 있으나,

대부분의 일들은 3초는 괜찮다.


느긋함을 느끼기에

3초면 충분하다.



맥주를 내려놓고

보리차를 챙기고


다른 음료를 선택하는 것도

놀랄 정도롤 바뀌게 되었다.


믹스커피를 타서 호록호록

30초 만에 털고 움직이던 게


따뜻한 물을 받아서

반 정도 마시고 내려둔다.


적어도 마시는 행동 안에서는

꼭 다 털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


우습게도 나는 이런 선택을

전혀 하지 못하며 살아왔다.


물을 나눠 마셔도 괜찮더라.

아무도 탓하지 않더라.



행동이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생각은

이내 차분한 마음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다급하게 마무리해야만 한다 여기던 것이

이 정도 사안은 천천히 곱씹어도 된다는 생각으로.


조급한 마음을 내려두니

느긋한 마음이 찾아왔다.


당장 해결할 수 있는 일들만 있는 게 아니다.

오랜 시간 천천히 들여다보기도 해야 하니.


우습게도 나는 물을 마시면서

이 마인드를 배우고 있는 중이다.


전쟁터에 나간 듯 언제나 안절부절못하던 내가

한량이 된 듯 여유를 부리는 기분이랄까.


차분함을 넘어 느긋함을 인정하기까지

생각보다 많은 장벽을 넘어야 했다.


느긋하다는 표현이

내게는 잘못처럼 느껴졌으니.



스스로를 대하는 방법에 정답이 있을까.

나만 만족한다면, 아무렴 어떤가.


여전히 일에 있어서는

확실하고, 철저한 태도를 유지한다.


다만 퇴근 후 나를 마주하는 시간은

다소 극단적으로 느긋하려 노력한다.


그런 적 없기에, 더욱 다가가며

새로운 모습을 살펴보는 나날이다.


처음은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다.

'고장 났다'


생각만이 아니라, 몸이 고장 났다.

너 뭐하는거야..? 라고 묻는 듯한 기분.


뭐라도 하지 않으면 죄지은 마냥

불편해서 방방 뛰던 녀석이


돌연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며

가만히 있으려 애쓰고 있으니.


고장 난 모습을 받아들일 즈음

이래도 괜찮구나 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괜찮더라.

하루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 하루가 충전의 시간이 되어

다시 살아가는 힘을 얻어간다.


쓰러질 때까지 달리기만 하던

무모한 지난날을 떠올려 보며


페이스를 조절하면서 달리면

더 오래, 더 멀리 갈 수도 있구나.


전에 없던 세상이 눈을 떴다.


아직은 근거 없는 자신감일지 모르나

분명히 느껴지는 게 있다.


전보다 더 멀리, 더 큰 것을

이룰 수 있을 거라는 점.


아이러니하게도 간절한 마음 대신

느긋함에서 시작되고 있다.



대체로 열심히, 열정이라는 단어들에

둘러싸인 삶을 살아온 것 같다.


물론 그때에도 쉬어가며 하라는

조언은 수도 없이 들었지만,


내게 와서 닿지는 않았다.

자체 노이즈캔슬링이랄까.


의지를 약하게 만드는

속삭임이라 여겼던 듯하다.


무슨 마음으로 내게 그런 말을 건넸을지

지금에서야 이해하고 고마운 마음이다.


조급함으로 가득한 사람을 바라보는 건

마치 불 타 없어져버릴 것만 같은 불안함이다.


불같이 살고자 노력했으나

물같이 살고자 다짐해 본다.


물은 잔잔한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모든 걸 집어삼키는 파도가 되기도 한다.


어떤 형태로도 변화 가능한,

더 다채롭고 안정적인 사람이고 싶다.



여전히 나는 조급한 마음이 앞선다.

무엇인지 모를 불안감이 감싸고 있다.


불안감이 커질 때면 뭐라도 해내려 했으나

이젠 오히려 멈추고 느긋하려 노력한다.


잠시 멈추어 숨 고르는 시간이

더 깔끔하게 정돈되는 지점이니.


느긋함이 어색한 내게

느긋함을 선물하고 있다.


기쁜 나날들이 이어지며,

묘한 기시감이 들기 시작한다.


나, 보리차에 중독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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