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암 김주석
'60년대에 여중학교에 입학했다.
그 학교에는 괴암이라는 호에 걸맞은 무섭게 생기신 미술 선생님이 계셨다.
첫 미술시간에 들어오신 선생님 얼굴을 본 애들은 얼음이 되었다.
그러나 곧 우리들은 선생님께서 친절하시고 자상하심을 눈치챘고 마구 떠들어 대려다가 진지한 그분의 수업에 꼼짝없이 조용해졌다.
야수같이 무섭게 생기신 그 얼굴에 인자와 카리스마가 합쳐지니 거룩한 얼굴이 되셨다.
그랬던 기억.
예전 부모님이 생존하고 계셨던 시절.
세 시간 거리의 친정에 가끔씩 찾아뵈러 가던 어느 날.
식사 후 어머니가 잠드시길래 집을 빠져나왔다.
잠깐의 추억 여행을 나섰다.
일제 강점기, 일본 사람들이 모여 살던 항구도시.
앞에는 호수 같은 바다요 뒤에는 산이다.
바다를 낀 도시에서 골목을 오르다 보면 산복 도로로 연결된다.
한 골목을 삐뚤빼뚤 오르면 바다가 보이고 한 골목을 더 오르면 주택가 너머 더 넓은 바다가 보인다.
길에서 저 멀리, 호수 같은 바다를 내려다보는 즐거움.
저 아래 보이는 내가 자라난 도시.
촘촘하게 세워진 낯선 아파트 단지도 보이지만 내가 다니던 백 년 넘은 여학교 운동장도 보이고
우리 동네도 보인다.
산복 도로를 걷다 보니 길 건너 자그마한 집에 간판이 붙어있다.
x x 기념관?
허름한 개인 집이 참 소박하네.
그냥 지나치려다가 길 건너서 가까이 가 봤다.
<괴암 김주석 기념관>
아니... 괴암?
이는 여중 시절 미술 선생님이 아닌가?
바로 그분이셨다.
사실 나는 '괴암' 독특한 그분 호는 기억하고 있었지만 '김주석' 성명은 기억 못 했는데 그분 맞다.
그 소박한 미술관 앞에 서있는 안내판 내용이 기막히다.
첫째, 십여 년 전 돌아가셨다.
둘째, 미술가일 뿐 아니라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항쟁하다가 심한 옥고를 치르셨단다.
셋째, 토목을 공부하고 후에 미술을 독학하셨다.
감성 가득한 예술가인줄 만 알았는데 항일투사라시니...
옥중 고문의 후유증으로 평생 힘드셨고 66세 때 소천하셨다.
시에서 늦게 선생님의 미술 세계, 특별히 자유상상화의 장르 개척을 인정하고 기념사업 추진회를 만들었다.
천여 점의 작품을 남기셨는데 얼마 전 특별 전시회도 있었단다.
간판에 쓰인 글들을 읽고, 작은 마당이 보이는 엉성하게 닫힌 문을 살며시 밀어보니 열린다.
안에 들어가 양옥집 현관 벨을 누르니 인기척이 없다.
집 앞에 걸려있는 현수막에는 지난여름 이곳에서 무료 미술수업이 열렸다는 내용.
연락처를 저장하고 그곳을 떠났다.
'오늘의 운세'
귀인을 만날 운세입니다.
설렌다.
우리의 인생 노정에 얼마나 많은 귀인이 스쳐갔을까?
보이는 물질은 귀한 줄 알아 얼른 알아보지만 내가 미처 모르고 지나친 귀인들.
그 옛날 나의 학창 시절
나의 인생에 귀인들이 스쳐갔다.
그중 한 분이신 괴암 김주석 선생님.
본인이 얼마나 조국의 해방을 위해 사력을 다했는지, 옥중의 고문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그분은 말씀하지 않으셨다.
(선생님은 그 참혹한 고문 장면들을 그림으로 남기셨다.)
실신에 이르는 각종 고문으로 환청과 심장병도 얻었다.
자녀들도 고문받은 사실을 선생님 사후 10년이 지나서야 남기신 글과 그림으로 알게 되었다.
선생님 사후 20년이 지나 국가유공자로 서훈되셨다.
참혹하게 받은 고문들을 속으로 삭이시고
그림으로 승화시키셨다.
그분이 그런 고문을 당한 분인줄 우리는 꿈에도 몰랐다.
빼앗긴 나라의 설움도 해방의 감격도 더구나 고문이 뭔지 알 리 없는 천방지축 철없는 소녀들에게 그분은 대신 가르쳤셨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라'라고 온화하게 말씀하셨다.
'당연하게 붙어있는 나의 왼손을 찬찬히 보며 그려보자.'
'겨울의 메마른 나뭇가지를 잘 보며 그려보자.'
'겨울을 이겨낸 봄날 싹튼 나뭇가지를 그려보자.'
'매일 다니는 이 동네를 종이에 옮겨보렴'
나태주 시인의 말대로
사물을 '자세히 보니' 아름다웠다.
'오래 보니' 사랑스러웠다.
선생님의 채점 방법은 독특했다.
연습장이나 화첩을 각자 준비해서 매일매일 무엇이든 그리게 하셨다.
그린 장수만큼 점수를 주셨다.
그래서인지 나는 요즘에도 이른 봄날 산보하다 싹트는 나뭇가지를 보면 (특히 모과나무)
연필을 잡고 그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아름다운 낯선 곳에 가면 그곳 경치를 그려보고 싶다.
그리면서 야금야금 이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싶다.
물론 그리는 대신 스마트폰 사진 찍는 걸로 대신하지만.
한때 미술학원에 등록한 적도 있고
교회에서 사역할 때 천여 장의 성경 그림들을 그렸다.
그 그림들은 성경을 잘 모르는 아이들에게도 소년원 원생들에게도 다문화가정 분들에게도 요긴하게 쓰였다.
그 그림들을 재미있게 그렸던 일도 지금 생각하니 선생님 덕분인 듯하다.
선생님의 그림은 한불교류전시회에 한국대표로 10년간 전시되기도 했단다.
<황홀한 고독, 김주석>
지적장애인인 아들.
개인전을 몇 번 가질 정도로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게 된 것은 그나마 엄마가 이런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은 탓인가?.
선생님은 생존해 계시지 않지만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은 이렇게 이어지는 듯하다.
오늘도 지금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 귀인이 있을 터이다.
아름다운 이 세상을 일깨워주신 인생의 선생님이신 괴암 선생님 같은.
뒤늦게 사 알아차린 귀인 같은 선생님
반세기 세월도 훌쩍 지난 2025년 스승의 날에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