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은 딸 시가집에서 추석 예배를 드린 후 추석 다음날 이번엔 친정인 우리 집으로 오지 않고 어디에서 모여 함께 이박 삼일의 여행을 하기로 했다.
추석 아침, 일어나니 좀 허전하기는 하다. 예년 같으면 네 명의 이삼일 간 머물 손님을 위해 (사위는 백년 손님 ) 간만의 집안 대청소는 물론 침구도 챙기고 음식들도 나름 바리바리 준비해야 했는데... 달랑 세 식구 추석 예배를 드리고 조촐한 아침을 먹었다.
그러다 문득 나 어릴 때인 한세대 전의 추석이 생각났다. 너무나 빨리 변해버린 명절 풍속. 1960년대. 추석 달이 둥글게 차기 시작하면 엄마는 이런저런 제수용품은 물론 우리들의 추석빔을 사신다. 가을 옷과 운동화들. 십대때 어느 추석 전. 그날은 엄마랑 밤늦게 내 옷만 따로 사러 나갔다. 이삼일 아직 추석이 남았는데도 벌써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 오래간만에 엄마와 단둘이 걷던 밤길. 그 날 산 꽃그림이 하나 그려진 하얀 스웨터의 까슬한 그 촉감.
제사 때는 일반 그릇이 아닌 제기에 음식을 담는다. 오랜만에 놋으로 만든 제기들을 끄집어 낸다. 수세미에 곱게 간 기왓장 가루를 묻혀 빡빡 힘주어 닦다 보면 거므스레해졌던 놋그릇들이 반짝반짝 광이 난다. 그릇 닦느라고 한나절이 간다. 어느 틈에 놋그릇들이 사라지고 나무그릇을 쓰게 되었다. 나무 제기들은 행주로 설렁설렁 닦아도 된다.
명절 준비의 필수 이벤트는 목욕탕 가기. '욕조', '샤워'라는 말도 없었던 그때. 대야에다 물 받아 대충대충 씻다가 명절 때는 제사드리기 위해서도 겸사겸사 국민 대 목욕 기간. 동네 목욕탕마다 사람들이 넘친다. 욕탕 바닥마다 가득 찬 사람 사이로 어떻게 비집고 앉아야 한다. 욕탕에 둥둥 떠 있는 때는 주인이 가끔 뜰채로 걷어낸다. 남자들은 추석날 일찍, 오래간만에 만난 사촌들끼리 목욕탕으로 몰려가기도 한다.
추석 전날은 음식 준비. 내가 엄마를 도우는 것은 하루 종일 나물 다듬기와 전 부치기. 아버지가 장손이신 친정은, 명절 종일 친척들이 끊이지 않았다. 사람과의 만남에도 조상과의 만남에도 만남에는 음식이 있어야 한다. 그 준비는 오롯이 집안 일곱 식구 중 여자인 엄마와 딸인 나의 몫. 물론, 숫돌로 칼을 벼르기와 차례상의 장식인 마른 문어로 멋 내기와 밤치기는 칼 잘 쓰시는 아버지 몫이지만. 나는 종일 산더미 같은 나물거리 다듬기. 등이 아프다. 그리고 전 부치기. 치자 열매로 색을 내어야 전이 제대로 노랗게 된다. 진작 꾸덕꾸덕 말려둔 커다란 귀한 조기도 부서질세라 조심조심 구워낸다. 집안에는 고소한 냄새가 진동한다.
추석에는 송편이 제격이지만 살기 바쁜 그때는 대부분 시루떡. 음식 준비가 거진 마치면 불려둔 쌀과 팥, 콩을 가지고 시장 방앗간으로 떡 하러 간다. 아유~ 여기도 인산인해. 방앗간 기계 소리는 시끄럽게 돌아가고 골목길까지 수십 개의 쌀 담은 다라이가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한 사람씩 떡을 이고 나가면 줄을 줄어든다. 마침내 우리 집 떡이 만들어지고 나는 떡을 머리에 이고 휘영청 밝은 추석 전날 밤길을 걸어 집에 간다. 뜨끈뜨끈한 떡에서 나는 고소한 냄새!
어제까지 더웠던 날씨가 희한하게도 추석날 아침은 소슬하다. 반소매가 갑자기 춥다. 아침 일찍 작은 집식구들이 몰려온다. 나는 특히 작은 어머님께서 집에서 손수 만들어 오시던 노란 콩가루를 얹은 시루떡이 좋았다. 그 고소한 냄새가 지금도 생각난다. 명절은 냄새로 기억된다. 정성껏 준비한 음식들이 하나씩 제기에 진설된다. 평소에는 못 먹는 커다란 생선과 과일들. 하얀 쌀밥. 남자들은 정장을 갖추고 입고 여자들은 한복을 꺼내어 입고 제사가 시작된다. 남자들만 차례상을 드리고 여자들은 뒤에서 지켜본다.
차례가 끝나면 덕담과 용돈을 받는 시간. 작은 아버지는 내가 직장 생활을 할 때도 결혼 전까지 꼭 용돈을 주셨다.
이젠 이웃과 나누는 시간. 옆집에도 앞집에도 집에 들르지 못하시는 이웃 친척 댁에도 음식들을 다라이에 차곡차곡 담아 머리에 이고 가져다 드린다.
열서너 명의 요란한 식사에 이은 끝없는 뒤처리. 싱크대도 퐁퐁도 없던 그 시절에. 친척들이 연이어 오시고 그때마다 상을 차려야 한다. 연이은 음식 준비와 종일 설거지. 그리고 성묘를 간다. 미리 남자들이 벌초를 해두었다. 명절은 간만의 국민 등산의 날. 대부분의 산소가 산에 있었다. 오랜만에 산 위에 올라 저 멀리 내가 사는 동네를 내려다 보는 날.
작은집 식구도 돌아가고 친척들도 끊어진 명절 저녁은 한가롭다. 음식은 아직 쌓여있고 가족들은 모두 외출했다. 오래간만에 조용한 집에서 나는 하릴없이 화병 받침 레이스를 뜬다. 1970년대 어느 추석날.
-부모님과 어르신들은 떠나가시고 그때 만든 레이스는 남았다-
2023년. 예전 추석의 부산함과 피곤함은 이젠 없다. 송편은 조금 빚거나 아예 사 먹는다. 동네 슈퍼 반찬가게에 전을 아예 주문하고 추석 전날 받으러 와서 장사진을 친다. 한복 입은 이도 보기 힘든다. 기독교인이 되어 예배 차례상도 간소화되었다. 산소도 다 이장되어 없어졌거나 추모공원에 봉안한다. 집집에서 샤워하니 동네 목욕탕은 없어졌다. 친척들도 다들 바쁘니 서로 왕래도 드물다. 모든 것이 간소해지고 편리해졌다. 그런데 무언가 마음 한켠 휑한 건 무슨 까닭일까? 내일 외손녀를 만나면 여행지에서 휘영청 보름달 아래 따끈한 노천탕이나 같이 즐겨야지. '달달 무슨 달 쟁반같이 둥근 달...' 노래부르며. 가을장마 후 날씨가 맑다 하니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