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저녁 갖다 드려라." 엄마는 보자기에 싸인 찬합을 건네신다. 교사이신 아버지가 학교에서 숙직하시는 날, 나는 식사 배달꾼이 된다.
1960년대 초,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버스를 타고 아버지께 간다. 아버지가 근무하시는 학교가 저어기 보이기 시작하면 내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아~ 기다렸던 이날. 그날 저녁, 학교의 모든 열쇠들을 가지신 아버지. 어둑해지는, 아무도 없는 도서실로 나를 데려다주신다. 아버지가 교무실로 돌아가 식사하는 동안 나는 환상의 나라 그곳 도서실에서 책 네댓 권을 고른다. 마해송의 <바위 나리와 아기별>, 강소천의 <꿈을 찍는 사진관>, <15 소년 표류기>, <폼페이 최후의 날>... 책들을 고이 들고 나오면서 나는 얼마나 가슴이 뛰었던가? 며칠 후, 읽고 또 읽은 책들을 아버지는 출근길에 반납.
고등학교까지도 학교에 변변한 도서관은 없었다. 강당 한편 혹은 교실 하나에 책을 모아둔 도서실이 있었다. 대출은 불가능. 동네마다 있던 만화방. 세월이 좀 지나 만화방 한편에 소설책들이 비치되었고 대여해서 집에서 볼 수 있었다. 빈궁한 60~70년대. 1963년 국민소득 104달러 (2013년 36000달러) 모두가 가난했던 그 옛날 먹고 살 쌀 사기에도 급급했다. 학기가 시작되기 전, 선생님은 교과목 리스트가 적힌 주문서를 배부하신다 각자 필요한 교과를 체크 주문 구매한다. 나 말고도 네 형제들도 책을 사야 한다. 나는 영, 수, 국 주요 과목만 사고 나머지는 헌책방이나 선배들에게 헌책을 산다. 새 지우개를 사서 한나절 헌책들의 낙서를 지운다. 그런 시대에 동화책은 사치품. 방 세 개에 일곱 식구가 사니 딱히 내 방도 없다. 빈궁한 시절, 그래도 어떻게 하나씩 사 모은 책들. 방 한편에 있는 앉은뱅이 책장에도 여유가 없으니 마루 한편에 있는 나무 궤짝 안에 넣은 보물들. 열몇 권의 책들. 심심하면 끄집어내어 읽고 또 읽는다. 책의 삽화까지 기억난다...
중학생이 될 즈음 나랏 경제도 가정경제도 나아졌다. 아버지가 월부 책 장사의 세일즈에 넘어가 전집을 사 오셨다. 그때는 방물장수 같은 세일즈맨이 사무실에 슬그머니 들어와 각종 외제 물건이나 전집들을 요령껏 팔곤 했다. <이조 여인사> <심훈 전집> <이광수 전집>... 60년대 중학생의 여름방학. TV 전화기 선풍기 같은 전자기구가 아예 일반화되지 않던 그 시절. 긴긴 여름방학의 심심한 시간. 시원한 방바닥에 배 깔고 누워 전집들을 독파한다. 아버지는 마당에 물을 뿌려 한여름의 더위를 씻으신다.
생전에 책 읽기를 무척 좋아하던 어떤 이가 죽어 심판자 베드로 앞에 섰단다. "아니 당신은 생전에 그 많은 책들로 호사를 누리더니 천당에도 간다고요?" 베드로 선생이 질투로 입술을 삐죽거렸다는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 서점에 쌓여있는 그 수많은 맛난 음식들. 조금 경제가 여유 없으면 어떤가, 조금 인생이 꼬이면 어떤가, 조금 나이 들어 맘대로 돌아다닐 수 없으면 어떤가, 모여 잡담 나누며 맛난 음식 같이 먹을 친구들이 없으면 어떤가? 책이 그 모든 답이 되는걸. 책 살 돈이 여의치 않으면 가까운 도서관에서 카드 만들면 되지. 한 번에 10권이나 되는 책을 빌려준다.
동네 도서관이 반년 간의 리모델링에 들어가며 일 인당 50권의 책을 장기 대출해 주었다. '책 벼락'을 맞았다.
기원전 3세기의 고대이집트. 수도 알렉산드리아에 초대형 도서관이 지어졌다. 그 후 파괴되었다가 2002년, 새롭게 개관되었다. 입구에는 '영혼의 안식처'라 쓰여있다. 석벽에는 전 세계 4000여 개의 고유문자와 기호들이 새겨져 있다. 물론 우리나라 한글 '세' '월'도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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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도서관이 많아졌다. 동네마다 작은 도서관들도 생겼다. 아파트 놀이터 한 편의 노상 책꽂이에 무심하게 쌓여있는 책들.
예전 손주들이 초등학생이었을 때의 딸네 집. 애들 방 책장에는 책들이 천정까지 빼곡히 꽂혀있었다. 마저 정리되지 못한 책들은 거실에도 베란다에도 쌓여있다. 거진 전집들. 위인전 전집, 과학 시리즈, 역사 시리즈. 동네의 다 자란 형들 집에서 필요 없게 된 책들이 무더기로 이 집으로 양도된 것들이란다. 그런데 애들은 바빠 책 볼 시간이 없다, 학원에도 가야 하고 조금 짬이 나면 그 재미난 인터넷, 스마트폰 게임도 해야 하니. 집 가득 있는 책들이 애들을 되레 질리게 하는 듯하다. 풍요가 되려 싫증을 낳았다.
쫄깃쫄깃한 독서. 재미난 그 세상에 들어가는데 쌓여있는 책들이 도리어 방해가 되었다. 학교에서 독후감 숙제를 내니 어쩔 수 없이 건성건성 읽어치운다. 그 맛난 음식들이 숙제와 시험문제로 맛없는 골칫덩이가 되었다.
아파트 분리수거 날 멀쩡한 동화책들이 수북이 하치장에 쌓여있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 중고 사이트에는 단돈 몇백 원의 '마음의 양식'이 넘쳐난다.
오래전부터 인간의 '영혼의 약국'이던 도서관. 영혼의 약이던 책. 잘 살게 되면서 책은 흔해졌으나 할 일은 많아지고 스마트폰까지 합세해서 내 시간을 훔쳐가니 책 보기는 더 어려워졌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