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로컬푸드에 갔다. 잃어버린 입맛을 되찾고 싶어서였다. 날씨가 더워지니 음식을 하는 일도 번거롭게 느껴졌다. 그렇더라도 외식을 즐겨하지 않으니 마트에 자주 가긴 간다. 새로운 식재료를 사지 못하고 늘 사 오는 것은 거의 정해져 있다. 계란 우유 근대 상추 오이 가지 애호박 곰취 두부 감자 그리고 가끔은 고기. 생선도 자주 먹었는데, 요즘은 생선 코너를 지나친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가 이슈화되면서 자연스레 눈길을 거두었다.
오랜만에 로컬푸드 매장에 들어서니, 꽃다발과 다육이 그리고 작은 화분에 담긴 갖가지 화초가 손님을 반긴다. 눈 호강을 하고 식품 코너에 들어섰다. 오호,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몇십 년 만에 보는 앵두가 플라스틱 팩에 담겨 있다. 앵두 한 팩을 카트에 담았다. 어서 앵두를 맛보고 싶어서 다른 식재료는 대충 골라서 담아 왔다. 집에 와서 딸아이에게 이게 뭔지 아느냐고 했더니, 저렇게 작은 체리가 있냐고 한다. 요즘 아이들은 체리는 알지만, 앵두는 모르는 아이가 많을 거 같다.
딸아이에게 앵두를 먹어보라고 했더니, 이게 무슨 맛이냐고 뱉어낸다. 내가 먹어 보았다. 예전의 맛이 아니다. 어린 시절에는 정말 맛있게 먹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내 입맛이 변했다. 고당도의 과일맛에 길들여서인지 나도 그 앵두가 맛이 없었다. 어린 시절, 간식거리가 별로 없던 시골 아이들은 여기저기서 열매들을 따 먹었다. 뒷산에 가서 산딸기를 따 먹기도 했다. 친구네 집에 가서 보리수 열매도 얻어먹었다. 친척집에 가서 포도나 토마토를 따 먹기도 했다. 그중에서 가장 희한한 맛은 보리수 열매였다. 시큼하기도 하고, 떫기도 하고. 그럼에도 열심히 따 먹었다.
나의 아버지는 집 안에 온갖 채소며 과실이며 꽃을 심어 가꾸셨다. 바깥마당가에는 작은 텃밭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들깨 고추 마늘 상추가 자랐다. 돼지우리 옆에는 호박과 대추나무가 있었다. 앞뜰에는 꽃밭이 있었다. 분꽃 달리아 채송화 장미 그리고 온 집안을 향기로 채우는 백합. 뒤뜰 장독대 옆에는 접시꽃도 피었다. 그 옆으로 부추 오이 파 등이 자랐다. 또 그 옆으로 감나무와 앵두나무가 있었다. '고향 집'하면 떠오르는 그 풍경을 한시도 잊지 않고 늘 마음속에 그려왔다. 마음에 그리는 것이 '그리움'이라고 하던데, 나의 어린 시절은 모두가 그리움 그 자체다.
해마다 봄이면 앵두나무에 하얀 앵두꽃이 나뭇가지를 뒤덮었다. 꽃이 지고 나면 푸른 앵두가 다닥다닥 열리기 시작했다. 몇 날 며칠이 지나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하면 앵두는 조금씩 붉어지고 알이 굵어졌다. 언니들은 타지에 나가 있고 동생 둘은 앵두를 딸 만큼 자라지 않아서 앵두따기는 거의 내 차지였다. 앵두를 빨리 먹고 싶었다. 푹 익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붉어지기 시작하면 앵두를 땄다.
"야야, 더 두면 알도 더 커지고 더 달아질틴디, 조금만 더 기다렸다 따먹어라."
어느 해인가, 보다 못한 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말씀대로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하였다. 며칠 후, 아침에 일어나서 앵두를 따러 뒤뜰에 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앵두가 거의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앵두나무 밑에는 앵두씨만 하얗게 널려 있는 게 아닌가. 앵두를 누가 이렇게 '초토화'시켰는지 통탄할 일이었다. 엄마와 아버지는 아침 일찍 들로 일하러 나가고 없었다. 여름철엔 해뜨기 전 선선할 때 농사일을 하기 때문이다.
없어진 앵두 때문에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물펌프로 물을 길어 올린 후, 세수를 하려고 하면서도 눈길은 앵두나무를 떠나지 않았다. 앵두나무를 주시하며 손을 씻으려는데,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앵두를 따먹은 주범이 나타났다. 그 주범은 사람이 아니었다. 바로, 다람쥐였다. 뒷산에서 내려온 다람쥐가 앵두나무 가지에 올라앉아 앵두를 따 먹는 게 아닌가. 앵두를 먹으면서 연신 앵두씨가 꽃잎 떨어지듯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억울함도 잊고 한참이나 다람쥐의 '범행'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이제 내 나이 육십, 열 살 즈음의 일을 잊지 못하는 것은 내 마음속에 들어와 있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리라. 아버지가 살아계시다면 앵두보다 더 크고 앵두보다 더 달콤한 체리를 사드렸을 텐데. 흐르는 세월은 아쉬움만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