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초의 어느 날, 교대 동기 그룹채팅 방에 부고장이 올라왔다. 40년 전 1983년부터 4년 후 졸업할 때까지 지도교수이셨던 은사님의 부고였다. 향년 92세. 올해는 꼭 뵈려고 했었는데, 죄송함과 자책감이 밀려왔다. 졸업 후, 대전시 유성구 리베라호텔에서 있었던 회갑연에서 뵈었던 게 마지막이었다. 간간이 전화로 은사님의 안부를 여쭙기는 했다. 10여 년 전부터인가, 연세가 듦에 따라 청력이 약해지셔서 전화 통화가 안된다는 동기들의 전언을 듣고 그마저도 뜸했더랬다. 은사님과 나의 인연을 생각하면 참 배은망덕한 제자라는 자책은 피할 수가 없다.
1983년, 교대 합격 통지서를 받고 중학교 때 국어를 가르쳐 주셨던 홍성덕 은사님께 자랑을 했다. 입학 축하 말씀을 하시면서 이충구 교수님을 찾아가 보라고 했다. 사범대 재학 때의 친구라고 하셨다. 며칠 후 이충구 교수님을 찾아갔다. 처음 본 교수님의 모습은 꼿꼿하셨고, 음성이나 미소는 다정하셨다. 그 후에 알게 된 것은 테니스로 다져진 신체이셨던 거다. 이런 인연이 다 있나, 이충구 교수님이 4년간 지도교수가 되어주셨다. 초중고교로 말하면 담임교사와 같다.
교수님의 강의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국어학을 강의하셨는데, 명확한 국어이론으로 무장하셨다. 교대에 재학하는 동안, 나는 교수님의 조언으로 '교내학술연구대회'에 참가한 일도 있었다. 교수연구실에는 학생들의 발걸음이 끊임없었다. 흐트러짐 없는 모습, 힘 있는 목소리, 그럼에도 교수연구실에서 개인적으로 만나면 다감하셨다. 교수님은 우리 학과생들과 함께 야외 모임을 자주 가지셨다. 그때는 '야유회'라고들 하였는데, 장소는 금강변이나 계룡산 등이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우리 과 학생은 43명이었다. 가능하면 그 친구들을 다 데리고 다니시려고 하셨다.
한 번은 계룡산 등반을 하고 공주시내에 있는 해장국 집에서 국밥을 먹었다. '우성식당'으로 기억한다. 그 집에는 선지 해장국이 맛있었다. 어떤 때는 공주시내에 있는 '중동 칼국수'집에서 뒤풀이를 하기도 했다. 밥 먹을 때 교수님은 반찬을 학생들 앞으로 밀어주기도 하고, 국에 밥을 말아서 푹푹 떠먹으라고 시연까지 하기도 했다. 가난했던 교대생들에게 '밥심'을 말하면서 밥을 잘 먹어야 힘이 나서 공부도 하고 연애도 하는 거라고 하였다. 강의실 밖에서의 교수님은 자상한 아버지 같았다.
졸업 여행으로 제주도를 가자고 하는데, 나는 제주도 여행비를 낼 형편이 아니었다. 교수님이 여행비의 얼마를 보조해 주셨는데, 그걸 갚았는지 기억에 없다. 가물가물하다. 제주도 졸업 여행 때, 배를 타고 갔다. 올 때는 비행기를 탔다. 배를 타고 가는 중에, 늦은 밤 시간이었다. 친구들이 교수님이 안 보인다고 하였다. 여러 명이 여기저기 교수님을 찾아다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교수님을 찾았다. 그곳은 바로 유람선 아래층에 있는 '댄스홀'이었다. 우리들은 교수님의 '낭만에 대하여' 박수로 화답했다.
1987년 2월 졸업을 하고 3월에 초임지 발령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교장실에서 나를 찾는다는 연락을 받고 교장실에 갔다. 뜻하지 않은 반가운 두 분이 오셨던 거다. 이충구 교수님과 신은철 교수님. 학부시절, 우리에게 강의하셨던 분이시다. 친정아버지를 뵌 기분이었다. 두 분은 나를 칭찬하시면서 교장 선생님께 강 선생을 잘 부탁한다고 하였다. 두 교수님은 졸업생들의 학교를 방문하여 제자들을 격려하고 응원하였다. 꿈에서도 잊지 못할 일이다.
시간이 지나, 1988년 내가 건강을 잃고 수술을 하고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이충구 교수님은 바나나를 사가지고 못난 제자를 찾아오셨다. 얼마나 죄송스럽던지. 교수님의 방문에 나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성공해서 교수님 앞에 서지는 못할 망정, 아픈 모습으로 뵈려니 부끄럽기도 하고 죄송스럽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고,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1990년 1월, 나는 결혼을 하였다. 교수님께 주례를 부탁하였다. 고맙게도 신랑이 주례 모실 기회를 양보해 주었다. 그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결혼식 주례 모실 권한은 주로 신랑 측이었다. 교수님의 주례사를 들은 친지들은 교수님의 주례사에 감동했다고 했다. 교수님이 어떻게 점심을 드시고 가셨는지 챙기지도 못했다. 참 나처럼 주변머리 없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나는 출세를 하여 교수님을 뵈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교감 교장을 하든, 학자가 되든, 작가가 되든 교사 딱지를 떼고 교수님을 만나러 가자고 다짐했더랬다. 그게 출세라고 생각했다. 좋은 선생님이 되라고 가르치셨는데 그걸 벗어나려고 했다. 나이가 들어 생각하니 참 어리석은 욕심이었다. 그러다가 남편이 세상을 떠나니 더욱더 만남을 미루게 되었다. 나의 개인사에 대하여 알리고 싶지 않았다. 감추고 싶었다. 세상에 문 닫고 살기로 하였다. 일과 가정에만 올인하였다. 초등교사로서의 일에 충실하고자 했다. 그건 생존의 문제였다. 육아에 전념하였다. 두 딸을 키워내는 데 집중하였다. 그러는 동안 세월이 이만큼 흘러버리고 말았다. 인간은 시간이 자기를 기다려 줄 것을 기대하지만, 언제나 시간은 사람을 무심히 지나친다.
스승님은 큰 산 같은 분이셨다. 어디서나 바라보면 볼 수 있는 산. 나무든 풀이든 벌레든 살아있는 생물은 뭐든 키워내는 산. 바위든 죽은 나뭇가지든 썩어가는 나뭇잎이든 뭐든 품어주는 산. 교수님은 그런 산 같은 분이셨다. 그런 스승님이 우리 곁을 떠나신 것이다. 영정 사진 속 교수님은 젊었을 때의 모습이었다. 장례식장에 들어서서 사진을 보자, 그간의 회한에 눈물이 났다. 교수님, 죄송해요. 이제야 왔어요.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해요. 세종특별자치시 산 아래 자리한 '은하수공원', 그곳에서 스승님은 별이 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