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지금이 연말이다. 학년말 성적처리에, 교실 정리에, 다른 학교로 전출 갈 사람, 새로 올 사람 등으로 지금이 연말이다. 오늘은 학교 일이 너무 많아 집에 와서 현관에 푹 주저앉고 말았다. 발목에 쥐가 나서 식구들이 와서 주무르고 핫팩을 해오고 난리법석을 치렀다. 딸아이 둘이 저녁밥을 차려 준다. 고맙다. 지금 시간은 각자 자기 방으로 갔다. 나도 내 컴퓨터에 앉아 글을 쓰려니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앗, 갱년기 여성에 좋다는 화애락-정관장에서 나온 건강보조식품 이름-을 또 안 먹었다. 나는 다른 영양제는 안 먹고 이 화애락만 먹어왔다. 저녁을 든든히 먹고도 건강보조식품을 먹는다. 욕심에 끝이 없다.
찻잔을 꺼냈다. 하얀 도자기 찻잔인데 손잡이 부분에 작은 장미 모양이 입체로 꾸며져 있다. 꽃잎 사이로 갈색의 때가 끼어 있다. 수세미로는 닦아지지 않는다. 칫솔을 찾다가 그만두었다. 그러기를 오래. 그래서 지금은 노란 장미처럼 보인다. 노란 장미, 내가 좋아하는 장미다. 후훗! 화애락 봉지 윗부분을 자르고 하얀 찻잔에 따른다. 찻잔에 반쯤 채워진다. 전자레인지에 30초 돌린다. 윙윙, 띠이~ 띠이~ 주방의 작은 창을 통해 밖을 보니 여기저기 집집마다 불빛이 곱기도 하다. 창문을 여니, 찬바람이 훅 들어온다. 닁큼 문을 닫는다.
찻잔을 가지고 거실의 넓은 창쪽으로 갔다. 남향이라서인지 햇빛이 너무나 잘 들어서 입주할 때 두꺼운 커튼을 달았다. 커튼을 젖히니 녹지 않은 눈길을 걷는 두 사람을 무심히 본다. 문득 '고무나무'를 본다. 전에 살던 금호아파트, 또 그전에 살던 신명아파트 그때 15년 전에 대전에 사는 친정 큰언니가 보내준 건데, 지금까지 잘 자란다. 워낙 잎이 두꺼워서 잎을 보아서는 물 줄 때를 모른다. 한 번도 시든 적이 없다. 정기적으로 물을 주어야 한다는데 왠지 모르게 바쁘게 살다 보면 정기적으로 물을 주지 못한다. 아무튼 나는 그렇다. 겉흙을 만져 보니 말라있다. 손가락으로 살짝 파보니 역시 말랐다. 이렇게 물주기에 세심하게 관리를 하지 않는데도 잘 살아 있는 걸 보면 생명력이 대단하다.
나의 '보약'을 다 먹고 1리터 페트병에 물을 담아와서 골고루 물을 주었다. 흙냄새가 난다. 여름철 땡볕에 한차례 소나기가 내리고 나면 흙냄새가 났던 것처럼. 고향의 흙냄새가 떠오른다. 아흐, 그 향기롭던 흙냄새. 잠시 후, 화분 속에서 물이 내려가는 소리가 들린다. 쪼르륵 쪼르륵. 보약이 내 식도를 지나 위장 속으로 타고 내려가듯이, 물이 흙속을 타고 내려간다. 또 잠시 후, 화분 물받이 통에 똑 똑 물방울이 떨어진다. 흙을 적시고 나온 물이 떨어져 모인다. 앗, 15년간이나 이 고무나무는 물만 먹고도 이렇게 잘 자랐다. 참으로 소박하고도 강건하다. 저녁밥을 든든히 먹고도 보약을 챙겨 먹어야 하는 나와 비교해 보니, 인간이란 이토록 탐욕적인가.
지금, 뉴스에서 코로나 19 관련 얘기가 나온다. 확진자가 천 명대 아래로 내려가고 있는 것이 사흘 째라나, 나흘 째라나. 내 기억이 맞다면,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바이러스가 발생한 원인이 천상갑이라던데. 박쥐에서 서식하던 바이러스가 천상갑이라는 동물을 중간숙주로 삼아 인간에게 전파되었다고 한다. 많은 중국 사람들이 우한의 야생동물 시장에 와서 천상갑을 먹었다는 것이다. 바이러스가 숙주로 살고 있는 천상갑을 먹었으니 바이러스를 통째로 먹은 거나 마찬가지. 그대로 두었다면 코로나 바이러스는 박쥐와 천상갑에 그래도 살고 있었을 테고. 인간은 인간대로 살았을 터인데. 인간이 박쥐의 서식지를 파괴하고, 서식지를 잃은 바이러스가 천상갑을 숙주로 살고. 무분별한 인간의 자연파괴와 무한한 인간의 탐욕이 불러온 재앙은 어떻게 될 것인가.
소박하게 물만 먹고도 제 할 일을 다하는 고무나무를 보면서, 사람들의 지속되는 탐욕이 부끄럽다. 고무나무 잎을 자세히 보니, 먼지가 보인다. "엄마, 고무나무 잎을 맥주로 닦아주면 좋대." "뭐라고? 그런 말이 있어? 별소리가 다 있네."라고 하면서도 한 번 해 볼까, 한다. 혹시 몰라 맥주를 조금 따르고 물로 희석해서 탈지면에 묻혀 고무나무 잎면을 닦아준다. 어, 진녹색이 더 진해지는 것 같다. 광택이 난다. 신기하네. 후훗! 밥도 먹고 보약은 먹더라도 더 이상 욕심부리지 말아야겠다. 소박한 일상에서 제 몫을 다하며 살아갈 것을 고무나무에서 한 수 배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