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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지영 Oct 02. 2023

가을에 대한 편애

  가을이 참 좋다. 어렸을 적에는 먹을거리가 많아서 좋았고, 지금은 유년시절부터 좋아해서 좋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가을에 얽힌 추억이 많아서인 것도 같다. 이렇게 저렇게 둘러 말해도 가을을 좋아하는 건 확실하다. 내가 먹을거리가 많아서 좋다고 하니까, 이 글을 읽는 독자분께서는 나를 먹보나 뚱보로 여기실지 모르지만 그건 아니다. 양적으로 많이 먹지는 않고 편식 없이 종류별로 잘 먹는다. 사람이 먹는 음식치고 내가 싫어하는 음식은 별로 없다.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잘 키워주신 덕이다. 가을이 좋은 이유를 말하려니 겨울 봄 여름이 안 좋은 이유부터 말해야 할 것 같다.

 

  나 어릴 적 겨울은 너무 추웠다. 가난한 농가는 더욱 추웠다. 부모님은 가을에 농사지었던 볏짚 콩깍지 등으로 불을 때서 구들장을 뜨겁게 했다. 날씨가 좋은 날 아버지는 뒷산에 가서 나무를 해오기도 했다. 부러진 나뭇가지나 낙엽 등을 긁어모아다가 아궁이에 넣었다. 초저녁에는 따뜻했지만, 자정이 지나면서 서서히 방바닥이 식었다. 겨울날 새벽이면 아버지는 아궁이에 불을 땠다. 커다란 가마솥에 물을 붓고 불을 때면 아침에 일어난 우리들은 따뜻한 물로 얼굴 씻고 엄마가 해준 따뜻한 밥을 먹었다. 밥 먹는 동안에 아버지는 자식들 운동화를 아궁이 앞에 세워서 따뜻하게 해 주었다. 행여 학교 가는 길에 발이 시릴까 봐. 그렇게 우리를 키워내셨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수고로움이 너무 미안했다. 


  내가 공부하는 방은 더 추웠다. 너무 손이 시려서 장갑을 끼고 공부했다. 겨울 중에도 유난히 추운 날에는 담요를 두르고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다가 잠들기도 했다. 추운데도 잠이 왔다는 것이 신기한 일이긴 한데, 그때는 그랬다. 천장에서는 가끔 쥐가 오가는 소리도 들렸다. 먹을 것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쥐가 다다닥다다닥 들들들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잠이 깨어 다시 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공부해서 대학에 가고 초등교사가 되었다. 교사가 되어 첫 출근하는 날, 아버지는 나에게 '아이들을 때리지 말고 정성을 다해 가르치라'고 하였다. 아버지 말씀을 따르려고 노력은 했는데, 그게 잘 안 될 때가 있었던 것 같다. 


  봄이 되면 또다시 아버지와 어머니의 농사일이 시작되었다. 씨앗을 뿌리고 모종을 심었다. 사람 몸에 이로운 것은 다 심었다. 고추 콩 가지 감자 호박 들깨 참깨 파 마늘 부추 옥수수 수수 온갖 채소 농사를 시작했다. 봄이 무르익고 여름이 되면 볍씨를 뿌리고 모내기를 했다. 여름 내내 아버지는 삽자루를 들고 논에 가서 벼를 돌봤다. 여름날 어머니는 새벽에 일어나 아침밥을 지어 놓고 아버지와 함께 들로 나가셨다. 한낮에는 날씨가 너무 더우니까 아침에 채소를 돌보러 가는 거였다. 여름날, 아버지는 등에 어머니는 가슴팍에 땀띠가 끊이질 않았다. 봄부터 시작된 농사일이 여름을 되면서 절정에 다다른다. 부모님이 힘든 농사일을 하는 것이 싫었다. 그렇다고 내가 돕지도 못했다. 해마다 가을이 오기를 바랐다. 


  가을이 되면 한 해 농사가 결실을 맺는 시기였다. 부모님이 돈을 만질 수 있었다. 콩타작을 해서 장에 내다 팔기도 하고 곳간에 쟁여 놓기도 했다. 붉은 고추를 따다가 장에 팔기도 했다. 배추는 밭떼기로 팔았다. 밭떼기는 농사지은 사람이 수확해서 파는 게 아니라, 계약을 하면 업자가 인부들을 데리고 와서 직접 차에 실어가는 것이다. 부모님이 배추를 뽑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서 나는 밭떼기가 맘에 들었다. 무도 그랬다. 아버지는 무 매매업자에게 밭떼기로 팔았다. 트럭에 실린 무는 단무지 공장으로 실려 갔다. 아버지 어머니는 집에서 단무지를 직접 담그시기도 했다. 


  추곡수매도 했다. 우리 집 근처에 아주 커다란 농협창고가 있었다. 면소재지에 있는 각 농가에서 벼를 가지고 왔다. 정부에서는 등급을 매겨 수매해 갔다. 아버지가 1등급을 받았다고 하며 벼 판 돈을 세는 모습은 나에게도 즐거움이었다. 장마가 심하거나 태풍으로 벼가 쓰러지면 1등급 받기가 어려웠고 수확량도 저조했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매우 씁쓸해했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은 슬픔이었다. 


  가을이 되면 먹을 것이 풍성했다. 뒤뜰에서는 감이 익었다. 떫은 감을 풀과 함께 따뜻한 물에 담가두면 떫은맛이 우려져서 달큼한 감이 된다. 새벽이면 우리는 눈 비비며 일어나 감을 먹기도 했다. 어머니는 해콩으로 청국장을 담았다. 햇들깨로 들기름을 짰다. 햇무로 무생채를 만드셨다. 그 세 가지를 밥에 넣고 비비면 그야말로 이것이 천국이구나 싶었다. 햅쌀은 또 어떤가. 밥에 기름칠을 한 것처럼 윤기가 좔좔 흐르는 흰쌀밥, 그것은 최상의 밥맛이었다. 호박을 따다가 동글게 썰어서 기와집 지붕에 말렸다. 겨우내 먹을 나물반찬을 위해서였다. 


  가을에는 이 집 저 집에서 시루떡을 했다. 하얀 쌀가루에 호박고지를 넣고 해팥으로 고물을 얹어 떡을 만들었다. 떡이 완성되면 어머니는 장독대에 놓고 두 손 모아 치성을 올렸다. 한 해 농사가 잘 되게 해 준 조상에게 자연에게 바치는 제사였다. 서늘한 달밤에 한복을 차려입고 치성을 드리는 어머니의 모습은 엄숙했다. 치성이 끝나면 부뚜막에 장독대에 수돗가에 떡을 담은 접시를 놓았다. 집안 곳곳에서 가족을 돌봐준 '누군가'에게 바치는 의례였다. 그러고는 집집마다 떡을 돌렸다. 다음 날이면 이웃에서 떡을 했다고 가져왔다.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우리 집 떡도 먹고 남의 집 떡도 먹고. 


  가을이 되면 여기저기서 잔치를 벌이는 집이 많았다. 결혼 잔치, 회갑 잔치, 등등. 농번기가 지나 늦가을에 주로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잔칫날 앞 뒤로 사나흘은 그 집 음식으로 식사를 해결하는 일이 많았다. 동네 아낙들은 모두 모여 잔치 음식을 하느라고 분주했다. 어머니도 그랬다. 정작 자기 집 밥을 지을 수가 없으니 잔칫집 음식으로 식사를 해결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가을이 되면 시제도 지냈다. 시제는 제사 음식을 해서 산에 가서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한다. 시제를 지낼 때는 기제사보다 차리는 음식이 더욱 풍성했다. 어머니는 시루떡을 찍어 먹는 조청까지 집에서 만들었다. 시제 전 날 당숙부(아버지의 사촌)와 아버지가 시제 음식을 제기에 담는 모습을 보는 것은 즐거움이었다. 당숙부와 아버지가 시제를 준비하는 모습은 경건했고 엄숙했다. 아버지가 맏이여서 우리 집에는 제사가 많았다. 제삿날이 되어야 과일이며 고기국이며 배불리 먹었다. 어린 나는 제사가 있는 날이 좋았다. 먹을 것이 많아서. 어머니가 제사 준비로 힘들다는 것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알아챘다. 얼마나 철없이 살았는지 부모님께 면목이 없다. 


  가을이 되면 집 밖에도 먹을 것이 지천이었다. 하굣길에 산에 가면 알밤을 주울 수도 있었다. 무도 뽑아 먹을 수 있었고, 고구마도 캐 먹을 수 있었다. 옛사람들은 인심이 좋아서 아이들이 몇 개 캐 먹어도 눈감아 주었다. 어떤 날에는 친구들과 함께 들녘에 가서 메뚜기를 잡았다. 메뚜기를 잡아서 풀줄기에 꿰어서 집에 가지고 오면 어머니가 가마솥에 넣고 볶아 주었다. 푸릇푸릇한 메뚜기가 뜨거운 솥에 들어가면 빨갛게 익었다. 날개는 부서져 떨어졌다. 익은 메뚜기맛은 꽃게맛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특유의 맛을 비할 것 찾기가 쉽지 않다. 메뚜기 잡아먹은 얘기를 딸내미에게 했더니, 기겁을 하며 자리를 뜬다. 


  뜬금없이 가을 얘기를 꺼낸 것은 바로 저 글대문에 걸린 감나무 사진 때문이다. 어제 오후에 딸아이들과 함께 집 근처 카페에 갔다. 거기 정원에 감나무가 있었다. 그 너머에는 벼가 익어가는 논이 보였다. 너른 들녘을 보노라니 옛 추억이 새록새록 났다. 그래서 주섬주섬 옛이야기를 늘어놓게 되었다.  내 마음이 풍성해진다. 내게는 가을 추억이 많다. 그래서 가을이 참 좋다. 

 '여수룬 식물원 카페' 정원에서
김포의 가을 들녘
'여수룬 식물원 카페' 정원에서 자라는 감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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