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업과 노동

by 강지영

1987년 대학 졸업 후, 처음으로 통화한 친구가 말했다.

-넌 참 공부도 잘했고, 성실했어.

-공부는 무슨, 우리 집이 참 가난했어.

-가난, 그때는 다 가난했어.

-등록금을 마련하기가 참 어려웠어. 장학금 받으려고 공부한 거였지. 공부가 재미있었던 건 아니었어.


친구에게 못다 한 말이 있다. 미안한 마음. 정해져 있는 장학금의 혜택을 내가 받은 것이 얼마나 미안했던지. 그렇다고 가정형편상 양보할 수도 없었다. 흔히 생각하듯 성적이 우수해서 장학금을 받은 것만은 아니었다. 지금 기억으로는, 내가 교대를 다니던 시절에 장학금의 종류가 여럿 있었다. 내가 받은 장학금은 세 가지다. 성적 우수 장학금. 교수 연구실의 청소와 교수의 잔심부름을 하는 학생에게 주는 근로 장학금, 학자금을 무이자로 대출해 주는 대여 장학금. 나는 학점이 잘 나올 때는 성적 우수 장학금을 받았다. 성적이 잘 나오지 않을 때는 대여 장학금을 받았다. 대여 장학금 지원자가 많을 때는 대개는 성적순으로 받았다. 다른 친구들에게 미안한 대목이 바로 여기다. 대여 장학금을 지원한 친구들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을 텐데, 그것마저도 양보하지 않았다. 나는 내 형편만 생각하고 뻔뻔하게도 대여 장학금을 3학기 정도 받은 것 같다. 그렇게 장학금에 연연했다.


그러면서도 방학 때면 아르바이트를 했다. 요즘 교대 학생들의 아르바이트는 '학생 과외'를 많이 한다고 한다. 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과외 아르바이트다. 내가 교대를 다니던 그때는 과외가 금지되었다. 나처럼 아르바이트가 필요한 학생들은 주로 커피숍에서 일했다. 아르바이트 자리가 그리 많지 않았다. 남학생들은 공사장에서 벽돌을 나르거나 작업 보조원 등으로 일하기도 했다. 내가 알기로, 그게 가장 보수가 나은 편이었다. 나는 빵집에서 햄버거 패티를 굽기도 했다. 당구장에서 일도 했다. 통조림 공장과 사탕 공장에서 노동했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생강가루, 미숫가루, 쑥가루, 등을 팔기도 했다.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통조림 공장에서 일한 것이다.


그 통조림 공장은 대전광역시에 있었다. 나는 복숭아 통조림을 만드는 생산라인에서 일했다. 내가 하는 일은 통조림에 들어갈 복숭아 조각을 접시저울에 달아 통에 넣는 과정이었다. 그 당시 공장은 작업의 대부분이 자동화되어 있지 않았고, 대부분 수작업으로 이루어졌다. 호기심 많은 나는 어떻게 공정이 이루어지는 궁금하여 틈틈이 살펴보았다. 큰 트럭에서 복숭아가 공장 안으로 들어온다. 복숭아가 차에서 내려지면 복숭아를 반으로 자른다. 잘라진 복숭아는 고열로 데쳐진다. 데쳐지면 복숭아 껍질이 저절로 벗겨진다. 껍질이 벗겨진 복숭아를 찬물에 담가 식힌다. 식혀진 복숭아의 물을 뺀 후 깡통에 담는다. 캔에 담긴 복숭아에 첨가물들을 넣고 봉한다. 내가 본 것은 여기까지다. 앞서 말했듯이, 내가 하는 일은 접시저울에 복숭아를 달아서 통에 넣는 과정이었다. 하루 종일 서서 하는 일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단순작업이 얼마나 힘든지 나는 그때 알았다. 내가 마치 기계의 일부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그때의 기억 때문일까, 나는 과일 통조림을 먹고 싶지가 않다. 요즘은 계절에 상관없이 일 년 내내 과일이 풍성하다. 그래서인지 다른 사람들도 과일 통조림을 즐겨 먹지는 않는 것 같다.


이렇게 나의 학업을 이어 준 것은 노동이었다. 지금 이 글을 쓰며 생각난 것은, 졸업 후 큰 병이 찾아온 원인이 이 때문인 것 같다. 처음으로 든 생각이다. 글을 쓰다 보니 별 생각도 다 난다. 통조림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어디서 무얼 할까. 지금은 편안히 살고 있으면 좋겠다.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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