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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아웃 보고서 2

by 로그아웃아일랜드


1.


유니폼을 만들었습니다.




사회 초년생 시절, 주말마다 그렇게 옷을 사러 돌아다녔습니다. 회사의 기본 복장은 단정한 세미정장 차림이었고 금요일만 캐주얼 복장이 가능했습니다. 이 경우 세미정장 한 두벌만 사서 돌려입다가 금요일엔 아무 거나 입으면 될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정장스타일과 캐주얼스타일 모두 주기적으로 사야만 아침마다 뭘 입을지 고민하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다른 회사에서는 복장제한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옷에 대한 고민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습니다. 복장이 자유로워진 만큼 다양한 옷차림에 대한 평가가 시작됐습니다. 물론 부정적이지만은 않았습니다. 대체로 '잘 어울린다' '어디서 샀냐' '좋은 곳 가냐' 등이었지만 출근 인사와 함께 사무실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한 마디 던질 준비를 하는 우리의 모습이 문득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달까요.




회사를 떠나 나의 공간에서 일하게 되었고 당연히 복장은 자유로웠지만 그 역시 옷을 골라입어야 하는 일이기에 번거로웠습니다. 그래서 아예 일할 때만 입는 유니폼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생활한복류를 여러벌 사서 돌려입기로 했습니다. 상의는 펑퍼짐해서 불필요한 몸의 긴장을 없앴고 통풍이 잘 돼 시원했습니다. 하의는 허리가 고무줄이라 편했고 밑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타입이라 나풀거리거나 끌리지 않아서 다리의 움직임이 원활했습니다.




게다가 유니폼 착장일 때는 보다 더 근로자의 마음을 유지하며 일에 집중하고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일을 마치면 유니폼을 개어 놓으면서 일할 때의 근심이나 걱정을 함께 개켰습니다. 그러고 나면 일이 아닌 다른 것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유니폼을 입거나 벗거나 하는 순간에 나는 로그인하고 또 로그아웃 할 수 있었습니다.










2.


핸드폰 없이 시간을 보냈어요.




핸드폰이 없어 한참 찾다가 친구 차에 놓고 내렸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잃어버린 게 아니라니 안심하긴 했지만 손에 핸드폰을 쥘 수 없다는 게 괜시리 초조했습니다. 핸드폰으로 특별히 할 게 있었던 것도 아닌데 할 걸 못하고 있는 기분이었어요. 하지만 이내 해야될 것들을 떠올렸습니다. 며칠 밀렸던 일기가 떠올라 일기장을 폈어요. 보통 밀린 일기를 쓸 땐 핸드폰 사진첩이나 메신저를 보면서 지난 일들을 더듬어봐야하는데 그럴 수 없었습니다. 머리를 싸매고 기억을 거슬러 올랐어요. 가족들에게 '그 날 뭐했더라?' 묻기도 했어요. 핸드폰을 뒤적이는 것보다 수월하지는 않았지만 예상외로 대부분 기억해낼 수 있더라고요.




방 안에서 핸드폰을 하며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았는데 오랜만에 거실에서 가족들과 TV를 보며 이야기를 나눴어요. 샤워할 때는 꼭 영상을 틀어놓는데 그럴 수 없어서 그냥 씻는 것에만 집중했어요. 평소보다 훨씬 빨리 샤워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자기 전에 핸드폰 알람을 맞추는데 그럴 수 없어서 모처럼 방구석에 있던 알람시계를 꺼내 알람을 맞췄어요. 문득 어릴 적 생각에 잠겼습니다.




잠이 들기 전까지 핸드폰을 보다 자는 편이지만 이번엔 책을 꺼내 들었습니다. 그러고 몇 장이나 읽었을까요. 잠이 든 줄도 모르게 날이 벌써 밝았습니다. 최근에 새벽 두 세시까지 잠이 안 와서 걱정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어쩌면 핸드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개운하게 잘 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외출 준비를 했습니다. 어차피 매일 들고 다니는 핸드폰, 아주 가끔은 두고 다녀도 되겠다 싶은 하루였습니다.










3.


가만히, 10분 멍 TV




EBS 다큐멘터리 유튜브 채널에는 [가만히, 10분 멍 TV] 라는 재생목록이 있습니다. 한국의 대표 교육 공영방송답게 영상소스가 무지 많다보니 그 소스들을 활용해 콘텐츠를 제작하는 것 같아요. 보통 7-8분 내외 짧은 영상클립들로 보기에 전혀 부담이 없으며, 그 와중에 영상 퀄리티가 굉장히 높아 눈길을 확 사로잡습니다. 자연경관, 수작업, 동물의 모습, 연주 영상등 종류는 다양하고요. 콘텐츠 이름처럼 가만히 약 10분 간 멍하게 영상을 보시면 되는데요. 흥미로운 점은 생각 없이 멍해지고 꿈뻑 졸아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지만, 가끔은 이 차분한 영상을 보면서도 오히려 여러 생각이나 감정들이 마구 움틀 때도 있다는 거예요. 그럴 땐 왠지 눈을 영상에서 뗄 수가 없지만 영상에 집중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영상의 댓글을 읽어보면 편안하다, 불안이 해소된다, 차분해진다 등의 내용들이 주를 이룹니다. 그런데 정말 멍한 상태를 유지하는 게 사람을 차분하고 편안하게 만드는 걸까요? 아마 그렇다면 그 이유는 현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영상을 통해, 깊이 빠져있던 고민 또는 걱정들을 잠시 잊을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 흔히 [멍 때린다]라고 표현되는 말은 알고보면 그저 '아무 생각없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여러 근심과 걱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생각에 잠겨보는 것'은 아닐까요?







가만히 10분 멍티비 보러가기 ▼▼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vNzObWMMx6szqsOPn78-KA0sWQ7QpOW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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