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

자의적 선택이지만 타의적 결과물

by 이로하

그날 급하게 병원을 가게 된 건

출근 전 아침에 샤워를 하면서 몸에 이전에는 없던 이상 증세를 느꼈을 때였다.


요즘 야근이 잦고 피곤해서 그런가, 설마 아니겠지 하고 출근 후 점심시간에 산부인과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

의사 선생님은 표정이 굳어지면서 남자친구가 있다면 얼른 연락을 해서 검사받도록 전하라 했다.


그때 갑자기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건,

계속 미리 테스트받으라고 내가 물어볼 때

알았다면서 미루던 전 남자 친구의 내내 귀찮아하던 표정이었다.


그 당시 성격과 문화 차이, 또 교제 기간이 일 년이 넘어가며 은근 양가 부모님과 남자친구의 결혼 시기 재촉,

거기에 다니고 있던 직장이 야근과 회식, 출장까지 잦아 두 사람이 많이 다투고 있던 시기였다.

그 전날에도 다퉜어서 연락을 하기 싫었지만 나는 위험할 수도 있는 바이러스이니 위해준답시고 바로 연락을 해서 상태를 말했다.


돌아온 답변은

자기는 '깨끗'하니, 지를 의심하지 말고 나부터 다른 남자랑 무슨 일이 있던 게 아닌지 생각해 보라는 거였다.

기가 찼다. 집에서 잘 시간도 모자랐던 나한테, 다른 놈이랑 잔 건 너 아니냐니…

내 몸은 괜찮냐고 걱정하는 대신 비난을 하는 그런 인간이랑 결혼생각까지 했다니, 나도 참 순진했다.


모든 발단의 시작은 몇 개월 전 회사 회식이었다.

연말에 라운지식 클럽에서 윗분들과 회식을 했고 나는 만나고 있던 ‘그놈’이 그런 장소에서 회식을 가끔 하는 걸 너무 격분을 하고 싫어하는 바람에 가서 구색만 맞추고 먼저 집에 돌아왔던 그날.


회식 장소에 임원들까지 있는데 거기를 찾아오겠다니,

집에 갈 때까지 장소 앞에서 기다리겠다니 하는 의심성 가득한 집착이 한참 여러 언행으로 심해질 때였어서

그 상황에 지치고 화가 난 나는 모든 연락을 대꾸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내가 돌아가고 없던 그 장소에 혼자 몰래 들어가 회사 회식을 마친 회사 사람들 중 싱글인 사람들이 남아

여흥을 즐기고 낯선 이성들과 얘기하는 모습을 보고 눈이 돌아간 그놈은 있던 의처증이 폭발해

내가 자는 동안 씩씩대며 집 앞까지 와 몇 번씩 전화를 하고, 내 방에 불이 켜졌는지 아닌지 확인하며 한참을 둘러보다가 새벽에야 갔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보고 다른 놈이랑 딴 데 가서 밤 보낸 거 아니냐고.


급기야 나중에는 내 핸드폰 비번을 알아내 회사 사람이나 다른 친구들과 한 문자 내용까지 보고

별로 상관도 없는 대화 내용을 구실 삼아 나를 괴롭히고, 일방적으로 화를 내며 따지기 일수였다.


안 그래도 당장 결혼 생각도 없고 결혼해서 빨리 아이를 낳고 싶은 생각이 있지도 않았던 터라,

그런 행동들이 켭켭이 쌓여, 거듭되는 싸움에 바싹 말라버린 나는 이른바 “화병”이 생겨

식도염까지 얻게 돼 밤마다 잠을 못 자는 상태로 회사에서는 야근까지 이어 나갔다.


그러다 트리거가 ‘네가 딴 놈이랑 잔 것’으로 치부된 그 일과 일련의 사건들이 벌어지면서

나는 착한 여자친구를 관두고 그냥 오롯이 나를 위한 ‘나쁜 년’으로 살기로 마음먹었다.


그때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의처증이 가득한 그놈은

주말에 지랑 술 한잔 하다가도 '지켜주는 믿는 사람'이 있으니 마음이 편한 상태가 된 내가 평소보다 조금 이르게 취기라도 보이면 갑자기 돌변을 해, 다른 놈이랑 술 마시면 이렇게 맨날 취하냐고 화를 냈다.

나는 그럴 때는 억울해서 조용히 그냥 울기만 했다.

(사실 나까지 화를 내면 더 돌변을 해 때리지는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운전을 할 때는 보복 운전이 심해 내가 한두 번 말린 게 아니었지만 어린 마음의 나는

날 지켜주려는 마음에 저러나 하면서 눈 감고 합리화를 하고는 했다.


그런 내가 논리적인 독설을 퍼부을 줄 아는 그런 나 자신의 면모를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사람에게는 자신이 마주하지 못하는 여러 캐릭터가 숨어있다는 걸 그때 각성하게 되었다.


이런 놈이랑 결혼이 다 뭐야, 이런 찌질이 같은 하남자는 두 번 다시 상대하기 싫어서 정리 전에 내 입장을 밝히고 상황은 떳떳하게 정리해 말하고 싶어서 전화를 했다. 집 앞의 놀이터, 새벽 두 시였다.


검사 결과로 나온 바이러스 번호들을 읊어주자, 갑자기 침묵하더니 술술 고백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지가 학창 시절에 전 여자 친구가 바이러스 보유자여서 옮았었다는 거였다.

그리고 그때 둘이 같이 치료받았기 때문에 자기는 바이러스가 사라진 지 알았단다.

그 바이러스 번호들, 내 거랑 완전 동일하다고.


그때부터 꼬리를 내리고 내일 만나자, 만나서 얘기하자를 시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있던 정, 의리 이게 0도 아니고 마이너스 100이 된 상태였던지라,

아니 심지어 앞에 있었음 물도 붓고 뺨도 때리고 침도 뱉고 싶었던 심정으로

소리를 지르며 화내고, 욕하고 하고 싶은 말 다 내뱉었다. 아마 그간 내가 그렇게 화를 낸 건 처음이었던 것 같다.

전화를 끊은 후에 모든 연락처를 다 삭제하고 블락하고, 아침에 해가 뜰 때까지 밤새 흔적을 다 지웠다.


내 젊은 시절 몇 년이 이딴 놈한테 이렇게 다 날아가는구나, 지난 시간들이 불쌍하고, 비참하고, 더러운 기분이었다.

진짜 제대로 똥 밟은 기분.


그 후, 한 일 년 동안은 그놈의 직접적인 스토킹이 시작되었다.

(전화 몇십 번씩 다른 번호로 걸기, 집 앞에서 기다리면서 훔쳐보기, 그 내용으로 이메일을 보내 협박, 집 주변을 돌며 사진 찍어 올리기 등)

한동안은 집에 갈 때 엄마한테 전화해서 집에 같이 들어갔고, 나는 바이러스를 가졌단 사실에 절망해서 몇 년 아무도 못 만나고 매일 술을 마시며 나를 망가트리고 흥청망청 고주망태로 자기 가학적인 시간을 보냈다.

이제 누가 날 좋아해 주나, 내가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한테 병을 옮기고 살겠나 싶었다.

그때 내 최저 몸무게까지 찍기도 했다. 사람들은 나를 종이인형, 혹은 옷걸이 나풀나풀이라고 불렀다.


근데 정말 아이러니 한건, 그놈이 중산층의 평범한 집에서 곱게 자라난 엘리트 축에 속하는 범생이였다는 거다.

정말, 겪어보기 전에는 시간 지나도 사람을 모른다고.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없던 거지, 복선들을 무시했던 거지, 뭐 나한테도 어느 정도의 책임은 있었다.


그때는 엄마한테 자세한 내막을 말을 못 하니, 툭하면 “너는 그때 걔랑 결혼했어야 한다”라는 엄마의 비꼬는 말에도 다른 토를 달지 못했던 나는 한참 더 나이를 먹은 중년이 돼서야 무슨 일이 있는지를 엄마에게 전부 털어놓았다.


고개를 들지 못하던 엄마는 그때부터 나한테 결혼하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자유롭게 혼자 맘 편히 살라고.


그 후 몇 년 동안 간접적인 스토킹이 더 이어졌다.

몇 년 전이었나, 그놈이 결혼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래, 똥파리도 짝이 있는데 이제 나 좀 안 괴롭히려나 해서 오히려 반가운 마음이 들었는데.

새로 만들었던 내 SNS 계정은 어떻게 알았는지 그놈은 결혼 후에도 내 스토리를 훔쳐보고 있었다.

PTSD 가 도진 나는 그날로 계정을 폭파하고 모든 걸 지웠다.


그리고 나는 부모님이랑 같이 살던 옛집을 나와 다른 동네로 이사를 해 독립을 하게 되었다.

내 안전이 절대 보장되지 않는 불안감으로 매일 밤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난 피해자인데, 왜 내가 숨어야 하지? 했지만 그때는 미투나 데이트 폭력 같은 말이 나오기 몇 년 전이라

그냥 더러워서 피한다는 마음으로 내가 단속하고 사는 게 그냥 마음이 편했던 것 같다.




세상에 좋은 사람도 있고, 자기 인연이 어디엔가는 있겠지만

그 후에도 몇 번 더 했던 연애를 겪으면서 그런 감정 소모와 그 후에 찾아오는 여러 다양한 트라우마를 겪으며

나는 말 그대로 번아웃으로, 연애에 불이 타서 시커멓게 재가 돼 지쳐버렸다.


연애는 정말 열정과 정성이 있는 사람들이,

자신은 혼자는 절대 되지 않을 거라 믿는 사람들이 끝까지 일구어 내는 뜨거운 결과물인 것 같다.

좋아도, 싫어도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하지만

나는 그걸 해낼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하고 나이가 들어가는 중년의 요즘이다.


혼자는 외롭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건 마음의 평화로움이다.

속 끓일 일도, 스트레스받을 일도 없어서 너무 행복하다.

나는 아직은 그렇게 외딴섬을 선택하는 나를 존중한다.


또 모르지, 언젠가 그 섬에 누군가 배 타고 찾아오면 그게 내 인연일 수도…

그때까지 내 섬과 그 뱃길 잘 닦아놓으며 기다리는 중이다.


그리고 현재 싱글인 모든 미래의 상처받은 마음들, 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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