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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Oct 28. 2018

마지막 여행이 남긴 것

영화 <The Leisure Seeker> (2017)

  캠핑카를 타고 여행하는 노부부. 낭만적이고 고즈넉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젊은이들의 열정과 활기는 쉽게 예상되지 않는다. 그래도 시작은 유쾌하다.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존(도널드 서덜랜드 Donald Sutherland)과 깐깐하지만 다정한 아내 엘라(헬렌 미렌 Helen Mirren)는 40년도 더 된 캠핑카를 타고 여행한다. 두 사람 모두 70은 훌쩍 넘어 보인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존이 커다란 차를 운전하는 모습은 아슬아슬하다. 옆에서 아내가 코치한다 해도 위험해 보인다. 당연히 자식들 성화로 휴대전화는 불난다.  


오래 된 캠핑카를 타고 여행하는 존과 엘라 부부


  방문하겠다고 예고했는데 왜 집에 없냐고 방방 뜨는 중년의 아들과 딸. 딱 봐도 그들을 피해 노부부가 떠나온 듯하다. 자식들이 딱히 자상해 보이진 않지만 불효자들도 아니다. 쇠약하고 병든 부모의 돌발 행동에 짜증내면서도 몹시 걱정한다.


  존은 정신이 깜빡깜빡하는 와중에도 아무나 붙잡고 대학에서 가르쳤던 소설가들에 대해 설명한다. 그에게 붙잡혀 곤경에 빠진 식당 웨이트리스를 엘라가 구해준다. 아주 잠깐, 제정신으로 돌아온 존이 엘라에게 젠틀하게 말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 다른 사람처럼 행동한다. 엘라 역시 주책맞다 싶을 정도로 수다쟁이다. 잠깐 들른 주유소나 캠핑장에서 만난 낯선 가족에게 두서없이 아무 얘기나 하며 붙잡아둔다. 솔직히 못마땅하다 이런 모습. 노인이라고 다 개념 없고 악의 없이 주책맞진 않을 텐데. 알츠하이머 투병중인 할아버진 그렇다 쳐도 왜 할머니마저 이렇게 묘사해야 할까 싶다. 현실적으로 그런 노인이 많다 해도 엘라는 사리분별 잘 하고 매너 좋은 할머닌데 말이다.


슬라이드로 가족 사진을 보는 노부부


  그들의 목적지는 헤밍웨이 생가다. 문학교수였던 존이 꼭 가보고 싶어 했던 곳이다. 중간중간 캠핑장에서 밤을 보낼 땐, 슬라이드 사진으로 두 사람의 가정사가 펼쳐진다. 젊은 시절 그들과 어린아이였던 자식들의 모습은 주변 사람들마저 끌어들일 정도로 아날로그적인 낭만 그 자체다. 사진 속 앳되고 순진했던 부부는 중년을 거쳐 순식간에 노인으로 변한다. 그들이 함께 만들고 공유한 시간과 정서가 어떤 것이었는지 짐작된다.


  노부부의 여행이 평화로운 여정만 계속되는 건 아니다. 오래전, 존이 엘라의 친구이자 오랜 이웃인 옆집 여자와 잠깐 바람피웠다는 게 들통나자, 화가 난 엘라는 존을 양로원에 버린다. 다음날 찾아오긴 했지만, 존이 없는 하룻밤 동안 주름이 자글자글한 엘라는 캠핑카 안에서 젊은 새댁 못지않게 분노와 질투로 날뛰었다. 50년이 지나도 그녀의 사랑은 늙지도 시들지도 않는 것 같다. 남편이 침대에 오줌을 쌀만큼 정신이 없고 쇠약해졌어도, 한눈팔면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녀는 존을 사랑하고 미워한다.


평생 함께 한 부부


  두 노인이 (그들 입장에서 보면) 거의 인디아나 존스 급의 모험을 한 후에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목적지는 고상한 대문호의 생가가 아니다. 시끄럽고 상업적인 관광지일 뿐이다. 문학에 헌신하고, 한 남자와 가정에 일생을 바친 부부의 마지막 여정 치고는 너무 보잘것없고 품위 없는 곳이다. 그래도 남편의 소원을 들어준 엘라는 뿌듯해한다. 마치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그녀는 쓰러진다. 엘라의 온몸에 암이 퍼졌다는 게 드러나고, 이 험난했던  여행은 또 하나의 기적이 된다.   


  어렵게 아내를 찾아온 존의 도움으로 병원에서 탈출한 엘라는, 잠깐 정신이 돌아온 남편과 마지막으로 사랑을 나누고 영원히 깨지 않을 잠을 청한다. 물론 평생 떨어져 본 적이 없는 남편 존과 함께.




  자살을 미화하고 싶진 않다. 혼자도 아니고, 병을 앓고 있다 해도 남편까지 데리고 동반 자살한 여자의 행동엔 사실 뭐라 할 말이 없다. 그녀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는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이해한다는 말도, 그래선 안된다는 말도, 남은 자식들 생각은 안 하냐는 말도 다 부질없어 보인다. 엘라 앞에서는. 내가 아는 사실은 그녀가 남편과 마지막 여행을 함께 할 사랑과 의리를 가졌고, 결단을 실행에 옮길 용기를 지닌 보기 드문 할머니였다는 것뿐이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자식들에게 남긴 편지는 덤덤하지만 날카롭다. 자살하는 사람은 있어도, 이런 편지를 남기는 사람은 드물 듯싶다.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더없이 이성적이고 인자한 어머니가 자식들 심장을 꼬챙이로 찔러 주입하는 다소 이기적이지만, 단호하고 거역할 수 없는 당부 같다.


  사랑하는 윌과 제인

우리 변호사 번호 적어뒀다.
내가 모든 걸 다 처리했어.
걱정할 거 하나도 없다.
근데 우리 마지막 카드값이 장난 아닐 것 같긴 해. 마지막에 좀 즐겼거든.
이렇게 상처 줘서 정말 미안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안다.
하지만 곧 다른 감정이 생길 거야.
안도감을 느낄 거야.
우리 몸과 마음이 사라지는 걸 안 봐도 됐다는 안도감.
우리로 인해 무거워지기만 하던 부담이 사라졌다는 안도감 말이야.
그리고 죄책감 느끼지 마라. 절대.
난 네 아빠를 정말 사랑했다.
나한텐 시간이 얼마 안 남았었고 네 아빠를 혼자 두고 갈 순 없었어.
우린 항상 함께였어.
지금도 어딘가에서 함께이길 바라고.
아무도 모르지.
이건 우리의 멋진 마지막 휴가였어.
행복한 날들이 있었어.
이건 우리의 해피엔딩이야.

사랑한다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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