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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May 12. 2018

마법의 가루를 뿌린 날들

책  <A Week in Winter> Maeve Binchy


<그 겨울의 일주일 A Week in Winter>이란 책을 읽었다. 내가 거의 안 보는 프로그램 '효리네 민박'과 콘셉트가 비슷하다. 내가 단 한 번도 안 본 '윤식당'과도 흡사한 면이 있다(고 서평에 언급되어 있다). 내가 안 본다는 건, 힐링이나 휴식을 빙자한 연예인 관찰 프로그램은 내 취향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방송을 위해 집을 공개하고 다른 삶을 체험하는 것에 별 흥미가 없다. 아예 다른 인물을 연기하는 드라마나, 대놓고 시청자의 즐거움을 위해 오락거리로 투신하는 예능 프로는 즐겨본다.


이 소설의 배경은 아일랜드 스토니브리지라는 바닷가 마을의 호텔이다. 호텔 주인의 사연부터 게스트들의 사연까지, 각양각색의 인생사가 촘촘하게 담겨 있다. 그리고 사연마다 꽤 재밌다. 그냥 재밌는 게 아니라 매우 재밌다. 장담하건대, 이 소설은 영화나 드라마로 반드시 나올 것이다. 판권이 벌써 팔렸다에 내가 예매한 12만 원짜리 오페라 VIP석 티켓을 건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것 중에 가장 소중하고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이다.)


고택을 개조해 만든 호텔 스톤하우스에서는, 손님이 오면 따뜻한 차와 치즈와 스콘을 대접한다. 손님들이 올 때마다 그 문장이 어김없이 등장하고, 그 문장을 읽을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침을 삼켰다. 스톤하우스 여주인이 내주는 스콘은 내가 먹었던 프랜차이즈 커피숍의 스콘과는 다를 것이다. 내가 아는 잘 부서지고, 달고, 상업적인 맛이 결코 아닌, 실은 어떤 맛인지도 모르는 스콘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나는 먹방이나 요리 프로를 좋아하지 않는데, 어쩌다 봐도 결코 입맛을 다신 적이 없다. 그런데 이 책에 나오는 호텔의 소박한 저녁 식탁에 대한 묘사를 읽으면, 나도 그 식탁에 둘러앉아 얻어먹고 싶어 진다. 치즈와 양고기와 수프는 평소 내가 즐겨 먹는 음식이 아닌데도 말이다.

 

이 책이(혹은 작가가) 은연중에 주입시키는 아늑한 허구를 읽고 있으면, 정말 인생은 살만하다는 착각마저 든다. 결코 뜻대로 되지 않는 삶에 지친 사람들이 힐링을 위해 찾은 호텔. 그리고 일주일 만에 그들의 고달픈 영혼은 말끔히 치유된다. 진짜 소설 같은 거짓말이고 거짓말 같은 소설이다. 온갖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이 춥고 스산한 바닷가에서 힐링했다고 주장하니, 그런가 보다 하고 읽었다. 물론 모든 손님이 그런 건 아니다. 삐딱한 예외도 있다. 그 예외를 제외하면, 주인과 직원과 게스트들은 거의 전원이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을 이 호텔에서 맞이한다. 삶이 따뜻하고 긍정적으로 변하는 체험을 했다고 간증하는 수준이다. 우울한 것보다는 낫다. 그래도 너무 아늑한 소설의 책장을 덮으니 내 방이 더 우중충해 보인다.


3년 전 겨울, 난 제주도 민박집에서 일주일 간 혼자 있었다. 동행한 선배 언니와 2박 3일을 같이 보내고, 그 언니가 먼저 서울로 간 후, 말 그대로 나 혼자 지냈던 '그 겨울의 일주일'이었다. 겨울 제주도의 민박집엔 손님이 나 밖에 없었다. 중간에 여자 게스트가 와서 같이 올레길도 걷고 밥도 두 번이나 먹었지만 그게 끝이다. 서로 연락처는 물어보지 않았다. 나도 그녀도 물어볼까 망설였지만, 우린 민박집의 일시적인 인연을 아름답게 기억만 하자는 암묵적인 약속을 했던 것 같다. 지금 그녀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안타깝다. 그녀가 한 말과 집안 얘기와 얼굴도 희미하게 떠오르는데, 예쁜 이름이었다는 것 까지도 기억나는데, 그 예쁜 이름의 실체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 일주일 동안, 난 협재 해수욕장에 세 번이나 갔었고, 제주 5일장에도 두 번이나 갔다. 밤에는 가지고 간 노트북으로 예능 프로를 다운로드하여 보고 늦잠을 잤다. 집으로 가는 날이 설 연휴 첫날이라, 아기를 낳은 지 한 달도 채 안 된 여주인이 끓여주는 떡국과 동그랑땡을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민박집에 갓 태어난 아기 이름은 '라임'이라고 했다. 제주도에서 태어난 라임이는 지금 네 살이 되었을 것이다.


제주도의 겨울 바다만 실컷 보고 온 '그 겨울의 일주일'은, 내가 읽은 책의 '그 겨울의 일주일'과는 완전 딴판이다. 결코 아늑하지도 않았고 치유가 되는 시간도 아니었다. 혼자 있어서 사진도 거의 안 찍었다. 아마 그런 식의 여행은 다시 하지 않을 듯싶다. 다만, 아무 계획 없이 멍 때리며 보낸 무용지물 같은 시간이 그리 나쁘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찬 바람만 실컷 맞은 후 김포 공항에 도착했을 때 드는 안도감, 집에 와 내 침대에 누웠을 때 느껴지는 달콤한 피로, 제주도 여행에 쓴 경비를 계산하며 그래도 선방했다고 뿌듯해할 수 있는 여유, 이런 것들이 내가 그 여행에서 얻은 소박한 힐링의 전부다.


지난 겨울엔 집에서 꼼짝 못 했는데, 찬 바람이 부는 계절이 돌아오면 어디로 떠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싶다. 굳이 생소하고 말도 안 통하는 아일랜드가 아니라 아무 데라도. 책을 읽었다고 스산한 아일랜드 바닷가를 찾아 비행기를 타기엔 나는 너무 겁이 많다. 아일랜드 음악을 들으며 맥주를 마실 수 있는 퍼브에 가고 싶지만, 그것도 며칠 지나면 시들해질 것이다. 더운 것보다는 추운 게 좋아 주로 겨울에 움직이는 편이다. 그래도 겨울 바닷가는 몇 년간 안 가도 될 것 같다. 이 책 속의 사람들은 스톤하우스에서 마법의 가루를 뿌린 것 같은 일주일을 보냈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은 일주일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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