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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Sep 10. 2018

아직 없는 것을 꿈꾸려면

책 <진중권의 테크노 인문학의 구상> 창비, 2016년

  이 책은 미학자이자 시대적 담론을 과감한 목소리로 얘기하는 지식인 진중권의 강연을 옮겨놓은 것이다. 저자는 문자의 종언이 가져온 위기 속에서 인문학이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하던 중  '테크노 인문학'을 구상, 디지털 시대에 인문학을 어떻게 대하고 공부해야 할지 이야기한다.


  어제오늘 나온 얘기도 아닌  '인문학의 위기'는 급격한 미디어 환경의 변화에 따른 결과로 볼 수 있다. 저자는 이러한 상황에서 인문학이야말로 형식적·내용적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디지털 기술이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았고 이러한 현실에서 인문학의 주제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문학은 테크놀로지와 연동되어 미래학적인 성격을 갖추어가는 과정에서 세계 제작학으로 그 성격이 변화하였고, 세계 제작에 신선한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존재론 : 파타피직스

  

  '파타피직스(pataphysics)'라는 것은 원래는 지적인 농담이라 할 수 있는데, 농담으로서의 과학, 농담으로서의 철학이다.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이란 농담처럼, 과학적·철학적·논리적 사고방식에서 시적 환상으로서의 판타지를 결합한 사고방식으로 사고의 유희라고 할 수 있다. 디지털 시대에 들어와 가상과 현실이 중첩되고, 세계는 가상현실(AR)과 증강현실(VR)이라는 두 현실이 물리적 현실과 혼재된 상태로 변해가고 있다. 이런 세계에서는 어디까지가 가상이고 현실인지 명확히 구별하기 어려워진다. 그에 따라 참과 거짓의 구별이 의미를 잃어버린다. 가짜(가상)인 걸 알면서도 진짜를 대하듯 행동하는 것이 파타피지컬 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인터페이스가 대부분 그렇다. 비행 시뮬레이터는 어떤가. 드론에 카메라를 장착하고 내 몸과 드론을 무선으로 연결해 신체로 드론을 조종할 때, 내가 방 안에 앉아서 새처럼 하늘을 날아다니며 도시의 전경을 관찰하는 체험은 진짜일까 가짜일까. 어쩌면 이게 디지털 존재론과 관련하여 깊은 형이상학적 사유를 요구하는 진지한 문제일 수도 있다고 저자는 얘기한다.



디지털의 인간학 : 호모 루덴스의 귀환

  

  디지털 시대에는 기술자보다 기술적 상상력을 가진 사람, 즉 '이미 있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없는 것'을 떠올릴 줄 아는 사람들이 더 중요하다. 하위징아(J. Huizinga)가 말한 호모 루덴스(homo ludens)가 복귀하는 것이다. 오늘날 놀 줄 아는 사람이 요구되는 것은 자본주의 성격 자체가 변했기 때문이다. 소비자본주의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만나 기호 자본주의, 미적 자본주의, 유희 자본주의의 형태로 전개된다. 단적인 예로, 과자를 사서 스티커만 챙기고 과자는 버리는 것은 기존의 소비행태가 아닌 새로운 소비 행위라 할 수 있다. 커피숍이나 음식점에서 주는 스티커나 포인트를 받기 위해 소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포인트가 올라가면 사은품이나 회원 승급 등 혜택을 받는데, 오늘날 대부분의 기업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이런 게미피케이션(gamification)을 활용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주객이 전도된 비합리적 행태로 보이지만, 소비를 하는 목적과 가치가 바뀐 상황에선 유희건 기호건 소비자를 만족시킨다면 문제 될 것이 없다.


  미국의 어느 노숙자는 구걸에도 게임을 도입했다. 각 종교의 이름을 붙인 돈 바구니를 여러 개 늘어놓고 이런 팻말을 들고 앉아있다. “어떤 종교가 노숙자를 가장 잘 돌보는가?” 과학 연구에도 게미피케이션이 활용된다. 에이즈 바이러스인 HIV의 단백질 구조를 푸는데 게임을 도입해서 개인별, 국가별로 경쟁을 시켰다. 그 결과 과학자들이 십여 년 동안 달라붙어도 풀지 못했던 HIV의 단백질 구조를 단 3주 만에 풀어냈다고 한다. 이런 것이 바로 게미피케이션이다.


  저자는 디지털 존재론을 '파타피직스'의 개념으로 설명하고, '호모 루덴스' 개념을 도입하여 디지털 인간학을 전개한다. 그리고 '노동이 유희가 되는 사회'라는 관점에서 디지털 테크놀로지로 인해 자본주의 사회가 새로운 형태로 변모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인문학이 세계 해석학에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세계의 제작학으로 변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과학의 연구가 전통적인 인문학의 영역으로 침투해오는 것을 위기로 볼 것이 아니라 기회로 여겨 적극적으로 끌어안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살아남기에도 벅찬 시대, 공부가 필요한 시대에 마주친 또 하나의 담론은 놀라우면서도 아득하다. 선지자가 소개하는 근 미래의 삶, 나도 모르게 일상에 이미 파고든 디지털 테크놀러지라는 다른 세상은 이해하기에도 숨이 차지만, 모르는 것보단 피상적으로라도 아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얘길 들려주는 사람이야 말로 기술을 가진 사람보다 기술적 상상력을 가진 사람,  '아직 없는 것'을 꿈꾸는 사람이 아닐까. 위기를 넘어 다 죽어간다고 매일 난리 치는 인문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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