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동희 Jan 06. 2021

#23 영토분쟁에 휩싸인 성스러운 사원

나는 캄보디아에서 살고 있습니다


2011년 4월, 씨엠립에서 국경으로 향하는 군인들의 행렬을 마주했다. 씨엠립의 주민들은 사지로 향하는 군인들을 배웅하며 앙코르와트가 그려진 캄보디아 국기를 흔들며 응원했다. 장갑차와 트럭에 탄 군인들은 시민들의 성원에 답하며 손을 흔들면서 이동했다.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을 직접 눈 앞에 하니, 기분이 묘했다. 캄보디아 군중 속에 섞여 있었지만 외국인으로서 철저한 관찰자의 입장이었다. 사람들은 캄보디아 군인들이 태국 군인들과 싸워서 이길 것이라고 의심치 않는 분위기였지만, 낡은 군복에 샌들을 신고 전장으로 향하는 군인들의 모습을 보니 애잔한 느낌이 들었다. 가방 안에 들어있던 카메라를 꺼내 이 장면을 담고 싶었지만 20대의 어린 나는 그런 용기를 내지 못했었다.


프레아 비히어 사원을 지키는 캄보디아 군인들(2010.7.) ⓒ 박동희


캄보디아-태국 국경 분쟁


캄보디아와 태국은 2008년부터 2011년까지 프레아 비히어 사원 인근의 영토에 대한 분쟁을 하며 국지전이 이어졌다. 이 곳에 대한 분쟁은 1960년대부터 계속되어왔지만 2008년 프레아 비히어 사원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면서 다툼은 본격화되었다. 세계평화를 목적으로 한 세계유산이 오히려 잠잠하던 분쟁에 불을 지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 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분쟁의 시작은 반 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3년 캄보디아를 점령하고 있던 프랑스군이 철수하면서 이 일대는 태국군이 점령하였다. 캄보디아 측은 이 상황의 부당함을 국제사법재판소에 재소 하였고 1962년에 이 땅이 캄보디아의 영토라는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태국은 이 판결에 승복하지 않고 이 일대를 계속 점유해왔다.


사원 입구의 계곡 바로 건너편으로 보이는 태국군 초소(2010.7.) ⓒ 박동희


오래된 이 문제는 캄보디아가 프레아 비히어 사원을 세계유산에 신청하였고, 이 것이 2008년 7월에 공식적으로 등재되면서 재점화되었다. 결국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 2008년 10월 3일 국경에서 총격전이 오갔고 부상자가 발생했다. 15일에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총격전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고 3년간 이어졌다. 2011년 12월 국제사법재판소의 중재로 양국은 군대를 철수하였고, 총격전은 종료되었다. 최종적으로 캄보디아 군인 19명, 태국 군인 16명이 사망하였다.


(좌) 프레아 비히어 사원 인근에 파여있는 참호들, (우) 태국 국경을 향해 설치된 박격포 ⓒ 박동희


국제사법재판소에 다시 기소하다


캄보디아는 이 지역의 영유권을 명확히 해 달라고 또다시 국제사법재판소에 기소하였다. 결과적으로 국제사법재판소는 2013년 11월 11일, 프레아 비히어 사원 일대가 캄보디아의 땅이라고 판결하였다. 판결이 내려진 당일 태국은 모든 군경을 철수시켰다. 드디어 프레아 비히어 사원에 평화가 되찾아 온 것이다.


프레아 비히어 사원의 첫 번째 고프라 뒤로 캄보디아 국기와 유엔 국기가 휘날리고 있다 ⓒ 박동희


참고자료


'Thailand and Cambodia reach deal on temple border', BBC, 2011.12.21. [link]

"Request for Interpretation of the Judgement of 15 June 1962 in the Case Concerning the Temple of Preah Vihear (Cambodia v. Thailand)",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  2013.11.11. [link]


관련된 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