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숙원의 바푸온 사원 복원공사가 끝났다. 1960년에 착수한 공사는 51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나서야 겨우 마칠 수 있었다. 긴 세월만큼 우여곡절도 많았기에, '세상에서 가장 큰 3차원 직소퍼즐', '반 세기에 걸친 복원 공사' 등 많은 수식어를 부여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 복원공사의 '종료'는 '다했다'라는 느낌의 종료가 아니라 '이만하면 됐지'라는 느낌의 종료였다. 냉정하게 말해서 성공한 복원공사는 아니라고 평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복원을 마냥 나쁘게 말할 수 없는 것은 지난 반세기 동안 캄보디아가 겪은 격동의 역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복원된 바푸온 사원 ⓒ 박동희
20세기 후반, 세계는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에 돌입했지만, 캄보디아는 결코 냉전이 아닌 열전(hot war)의 현장이였다. 1953년 프랑스가 통치권을 양도하면서 오랜 식민통치기간이 종식되었다. 독립 후 캄보디아의 국왕 노로돔 시하누크는 중립노선을 지키겠다 선언했다. 하지만 국경이 맞닿은 베트남에서 미국의 폭격이 이어졌고, 이 폭격은 일부 캄보디아에도 감행되었다. 이런 와중에 외교적 중립을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결국 1970년 시하누크 국왕이 해외에 나간 사이에 친미 군부세력인 론 놀 정권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하지만 5년 뒤, 캄보디아 공산당은 시하누크를 내세워 쿠데타 세력을 몰아내었고 공산정권을 세웠다. 캄보디아 공산당은 과격 공산혁명을 감행하였고, 킬링필드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자국민 학살로 이어졌다. 1979년 베트남군의 개입으로 공산주의 정권은 축출되었지만, 숲으로 숨어들어 게릴라전을 이어갔다. 캄보디아의 내전은 1990년대에 이르러 겨우 끝이 났다. 20세기 후반의 캄보디아는 지옥, 그 자체였다.
사원 주변에 널려있는 부재들 ⓒ 박동희
이러한 캄보디아의 혼란과 격동의 역사를 함께 겪은 것이 바푸온 사원 복원공사이다. 프랑스 극동지역연구소 EFEO는 1961년 바푸온 사원의 본격적인 복원 공사를 시작했다. 급한 경사의 거대한 피라미드형 기단을 가진 바푸온 사원이었기에 이미 수많은 붕괴와 부분 보수가 여러 차례 진행된 상태였지만, 붕괴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보다 근본적인 공사가 필요했다. 복원팀의 책임자였던 Bernard Philippe Groslier는 사원의 기단을 비롯한 구조체를 해체하고 내부 구조를 철근 콘크리트로 보강한 뒤 재조립하는 방향의 과감하고 대대적인 복원을 감행했다.
바푸온 사원 복원 공사 장면 1961년 ⓒ EFEO
하지만 규모가 크다 보니 진도가 쉽게 나지 않았다. 또한 급한 경사로 인해 두 차례나 붕괴사고가 발생했다. 잇달은 복원의 어려움 속에 정치적 불안이 더해져 결국 공사는 중단되었다.
바푸온 복원공사 (2008) ⓒ 박동희
1990년대에 들어 캄보디아는 평화를 되찾았다. 이와 함께 앙코르 유적 복원공사들도 속속 재개되었다. 바푸온 사원 또한 1995년 재보수를 시작했다. 하지만 보통 일이 아니었다. 과거에 남겨뒀던 기록들이 난리통에 대부분 사라졌기 때문이다. 20여 년 전에 해체한 30만 개의 석재들의 원래 위치를 되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도 반 세기 이전에 찍어뒀던 흑백사진을 참고 삼아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동원했다. 관계자 인터뷰에 따르면 돌 하나의 원 위치를 찾는데에 10분 걸리는 경우도 있지만, 보름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미완성으로 남겨진 바푸온 사원의 최상층 신전 ⓒ 박동희
결국 EFEO는 2011년 4월에 복원공사 종료를 선언했다. 1995년에 재개한 뒤로부터 17년 째였고, 공사의 첫 삽을 뜬 1961년으로부터는 51년 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