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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동희 Jun 10. 2024

카니슈카의 국가 프로젝트 '제4차 불전 결집'

간다라 이야기 #23

쿠샨왕조의 세 번째 왕, 카니슈카(재위: CE.127-150)의 종교 확히 알려진 바는 없지만 어렸을 때에는 불교가 아니라 조로아스터교나 이란계 종교를 믿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이가 들서 불교의 가르침에 점차 심취하게 된 듯하다. 니슈카는 수시로 스님들을 궁으로 초청하였고, 왕궁 곳곳에서 항상 설법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카니슈카 대왕이 그려진 동전(메트박물관), 카니슈카 대왕 입상(마투라 박물관) ⓒ 퍼블릭도메인


카니슈카는 스님들 설법을 듣다가 석가모니의 말씀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가 있음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카니슈카 왕이 불교에 관심을 가졌던 때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든 뒤로부터 500년이 훨씬 지난 시점이었 때문이다. 열반 이후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은 여러 지역으로 퍼져나갔으며, 각 지역의 스님들에 의해 재해석되면서 여러 종파가 생겨났다. 각 종파들은 같은 불교임에도 조금씩 다른 가르침을 전했. 래서 카니슈카가 들었던 설법 무리 저명한 승려라 할지라도 일관적이거나 체계적일 수 없었다.


이에 카니슈카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깨달음이 깊은 스님 500명을 한 곳에 모아 부처님의 가르침을 취합하기로 한 것이다. 이를 불교에서는 '제4차 불전 결집(the 4th Buddhist council)'이라고 부른다. 결집이 진행된 곳은 현재 파키스탄의 북동부 '카슈미르'라고 하는 곳인데, 간다라지역에서 북동쪽 떨어진 지역으로 산이 많고 시원한 곳이다. 카슈미르는 예로부터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지만, 지금은 분쟁지역으로 매우 위험하.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옥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이다. 다만, 과거 카니슈카가 불전결집을 했을 당시에 스님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었을 것이다. 마치 제주도에서 학술대회를 하는 것처럼.


카슈미르 풍경(CC BY 2.0, www.kashmir123.com)
불전 결집(the Buddhist council)
결집의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카니슈카 이전에 세 차례의 결집이 있었다. 첫 번째는 부처님 열반 직후에 제자들이 모여서 석가모니 부처님께 들었던 말씀을 정리하는 자리를 가졌다. 그래서 많은 경전의 문구가 '나는 이렇게 들었다(如是我聞)'로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500명의 제자들이 모였다고 한다. 두 번째 결집은 부처님 사후 100년이 지난 시점, 승가에서 계율이 잘못 지켜지고 있어 스님들이 모여 논의를 했다. 대표적인 논의 사항으로 보시로 돈을 받아도 되는지에 대한 것이 있었다. 사회가 변하면 계율도 바뀌는 법이기에 꼭 필요한 논의였다. 결과적으로 두 번째 결집은 교단에 분열을 가져왔다. 이후의 불교를 부파불교라고 부르게 되었다. 세 번째 결집은 기원전 2세기 아소카왕에 의해 진행되었다. 율, 경, 론 삼장에 대해서 논의되었고, 이때 1,000명의 비구가 모였다고 한다. 가장 최근으로는 1954년 미얀마 양곤에서 제6차 불교 결집이 2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니슈카의 결집에는 당대의 고승 바수미트라(Vasumitra)를 비롯해 모두 500명의 승려들이 모여, 논의를 거듭하며 불교 경전과 교리를 체계화해 나갔다. 아무래도 철학적인 내용을 논의하다 보니, 결집은 쉽게 진행되지 않았던 것 같다.  12년 동안 이어졌다. 결집을 통해 모두 30 만송, 960 만언에 르는 경전이 편찬되었다.(10 만송의 우파데샤론, 10 만송의 비나야비바사론 마지막으로 아비달마대비바사론을 만들었다.) 이는 지금으로 치면 200여 권의 백과사전의 분량에 해당한다고 한다.  다른 주목할 만한 점은 기존의 경전은 팔리어나 마가다 프라크리트어로 작성되어 있었지만 이 결집의 결과는 산스크리트어로 제작되었다. 그 결과 인도나 주변 지역으로 더욱 확산되기 쉬워졌다. 애당초 이러한 목적이었는지 카니슈카는 결집 이후 이 경전을 널리 보급하였다. 


불전 결집에 대한 이미지(AI 생성)


카니슈카의 불전 결집은 훗날 대승불교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다. 결집 이후 아슈바고샤(마명), 나가르주나(용수), 바수반두(세친), 쿠마라지바(구마라습)에 이르기까지 기라성 같은 고승들이 차례차례 등장하였는데, 이들은 카니슈카 결집의 성과를 바탕으로 대승불교의 철학적 발전을 이끌었다. 이는 특히 중국과 한반도로 이어져 동아시아 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원효, 혜초, 의상과 같은 한국에서 태어난 이름난 스님들의 불교철학적인 논의도 이러한 큰 흐름의 갈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카니슈카가 후원한 '제4차 불전결집'은 우리에게도 의미가 크다.


다만 이 결집에도 한계가 있다. 가장 큰 점은 상좌부불교에서 이 결집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당시 상좌부불교가 성행했던 지역은 스리랑카를 비롯하여 더 남쪽지방이었다. 이들은 부처의 말씀을 엄격히 지키거나 스스로의 수행에 중점을 두었기에, 종교성이 강한 대승불교에 대해 용인하기 어려운 점이 많았다. 더욱이 경전을 산스크리트어로 번역하는 것에 대한 반발도 컸다. 왜냐하면 이미 기원전 1세기에 스리랑카에서 이들에 의한 '4차 결집'이 이미 이루어졌었으며, 그 성과로 구전으로 전해지던 석가모니의 말씀 팔리어 정리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에서 지금도 상좌부불교에서는 팔리어로 된 경전을 사용한다.


설령 상좌부불교에서 카니슈카 대왕의 제4차 불전 결집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이는 어느 한 국왕이 불교에 대해 열정을 갖고 추진한 역사적인 프로젝트임에 틀림없다. 또한 그의 노력으로 대승불교가 간다라를 시작으로 서역, 중국, 한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와 지역에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이러한 점에서 카니슈카의 결집은 오늘날까지도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미얀마 양곤에서 있었던 제6차 불교 결집(1954)


참고자료

안종국 기자, '불교학의 고향을 가다① - 제4차 결집의 고장 카슈미르', "제주불교", 2020.8.20.

현장(권덕주역), "대당서역기", 올재, 2012, pp.117-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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