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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동희 Jun 16. 2024

도편수의 분노를 산 '아틀라스'

간다라 이야기 #24


전등사 대웅보전 ⓒSteve46814(CC.4.0)


강화도의 전등사 대웅전 처마 아래 네 모퉁이에는 '나부상(裸婦像)'이라 불리는 조각이 있다.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벗은 여인의 모습이지만, 실제로는 원숭이와 흡사한 괴수가 추한 모습으로 지붕을 떠받들고 있는 형상이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대웅전 건축을 담당했던 도편수가 자신의 돈을 떼어먹고 도망간 주모에게 치욕을 주기 위해 이 조각을 만든 것이라고 한다. 또한 매일같이 불경을 들으며 반성하라는 의미를 담아 대웅전의 네 귀퉁이에 배치했다는 것이다. 이 흥미로운 이야기는 이미 지상파 방송과 여러 잡지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전등사 대웅보전 나부상 좌로부터(북서, 북동, 남서, 남동) ⓒ 국가유산디지털서비스(공공누리 제 1유형)


그러나 전등사 외에도 비슷한 조각이 발견되는 사례가 있다. 예를 들어, 일본의 호류지 5층탑의 네 모퉁이에도 유사한 조각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오니(도깨비)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호류지 외에도 여러 곳에서 비슷한 사례를 볼 수 있기에, 전등사에서 전해오는 도편수의 원한을 산 나부상의 이야기는 괴상하게 생긴 야차의 모습을 본 후대의 사람들이 덧붙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전공자들 사이에서는 이 조각이 인도에서 말하는 귀신 '야차(夜叉, yakṣa)'라는 의견이 일반적이다.


일본 호류지의 야차 ⓒ max fan(flickr)


야차 자연에 존재하는 정령 같은 반신적인 존재로, 인도에서는 야크샤라고 부른다. 남성은 야차, 여성 야크시니라고 한다. 많은 애니미즘 기반의 신들이 그렇듯이 때로는 무섭지만 때로는 자애로운 모습을 한다. 특히 불교에 귀의한 야크샤는 불법의 수호신이 된 경우가 많다. 이와 관련해서는 지난 20편에서 다뤘던 점지신 하리티나, 21편에서 다뤘던 재보신 판치카의 사례를 참고할 수 있다.


경주 설굴암 석굴 북방다문천왕상과 야차 ⓒ 국가유산디지털서비스(공공누리 제 1유형)
용문석굴의 비사문천과 그를 지탱하고 있는 야차 ⓒ flickr


우리나라에서 야차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는 사천왕의 발아래에 있는 괴수들이다. 근래에 만들어진 것들은 사천왕들이 야차를 짓밟고, 야차는 괴로워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하지만, 석굴암이나 중국의 용문석굴 등 오래된 사례들을 보면 짓밟는 것이 아니라 야차 위에 서 있거나, 오히려 야차가 사천왕을 들어 올리고 있는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원래 북방의 수호신 비사문천(쿠베라)은 야차들의 왕이기에, 야차가 그들의 왕인 비사문천을 떠받들고 있다고 보는 것이 설정상 더 자연스럽다.


(좌) 태국 Nakhonphathom 박물관, (우) 베트남 Don Duang 유적 출토 조각, 다낭 박물관
인도네시아 보로부드르 사원에 조각된 야차


이렇게 야차가 무엇인가를 들어 올리는 모습으로 묘사된 것은 여러 문화권에서 일찍이부터 확인된다. 필자가 오래 활동하였던 동남아시아에서도 대부분의 나라에서 비슷한 모티브를 확인할 수 있었다. 주로 종교적으로 신성하거나 격이 높은 대상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땅은 부정하고 하늘은 깨끗하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신성한 존재를 들어 올리는 야차의 모습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었고, 그만큼 전파도 빨랐을 것이다.


캄보디아 내륙 첸라의 수도 삼보 프레이 쿡에 조각된 플라잉 팔레스
(좌) 앙코르 왓 천국의 모습, (중) 태국 피마이 사원의 내부 장식, (우) 캄보디아 앙코르 유적의 코끼리테라스


야차 대신 짐승이 그 역할을 하는 사례도 있다. 예를 들어, 캄보디아 내륙의 고대 왕국 첸라(7~8세기)의 수도 유적인 '삼보 프레이 쿡'에서는 날개 달린 짐승들이 거대한 궁전을 들어 올리는 '플라잉 팔레스'가 조각되어 있다. 이런 표현 방식은 첸라의 뒤를 이은 앙코르 왕조에서도 적극 활용되었고, 여러 크메르 유적에서도 볼 수 있다.


자울리안 유적의 회반죽 장식


그런데 이 모티브의 근원과의 연결고리를 간다라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위의 사진은 탁실라의 자울리안(Jaulian)이라는 불교 유적인데, 회반죽으로 장식된 스투파의 세부 묘사이다. 상층에는 부처로 보이는 조각들이 줄지어 있고, 가장 아래층에는 사자와 야차가 교차로 등장하며 상부를 들어 올리는 모습이 보인다.


(좌) 다르마라지카의 스투파 기단부 ⓒ Taxila Museum, (우) 하단부 야차 장식 세부 모습
모라모로두 유적의 스투파와 하단부 야차 장식 세부모습


자울리안뿐만 아니라 간다라 지역 전체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다르마라지카 스투파나 모라모라두 스투파에서도 확인되었다. 아마도 간다라 문화권에서 보편적으로 차용되었던 양식인 듯하다.


아프가니스탄 Hadda 유적의 아틀라스 장식 ⓒ 위키피디아(public domain)
(좌) 하늘을 들고 있는 아틀라스 조각 ⓒ위키피디아, (우) 오스트리아 Belvedere 궁전의 아틀라스 ⓒ Gryffindor 위키피디아


흥미로운 점은 간다라 지역의 오래된 야차 조각 중 일부가 서양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간다라 연구자들은 이 모티브를 '아틀라스(Atlas)'라고 불렀다. 아틀라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티탄족 신으로, 제우스에 대항해 싸우다 패배하여 서쪽 끝에서 하늘을 떠받드는 벌을 받은 신이다. 아틀라스는 힘이 강한 존재의 상징이 되었고, 그리스 문화에서 건물을 떠받드는 형태의 조각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페샤와르 박물관 소장 아틀라스 조각들
(좌) 이슬라마바드 박물관 소장 아틀라스 조각, (우) 라호르 박물관 소장 아틀라스 조각


그리스의 아틀라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원정 이후, 간다라에 유입되었다. 이후 점차 인도의 야차와 융합해 나갔다. 이는 간다라의 여러 박물관이나 유적에 남겨진 흔적을 통해서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아틀라스가 조각된 스투파 부재, 페샤와르 박물관


이러한 문화전파와 융합을 통해서 아틀라스 신화가 재해석되는 과정은 간다라에서 그치지 않고, 동남아시아, 동아시아에까지 이어졌다.  결과 정령신인 야차가 무거운 건물을 들어 올리고 있는 모습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한국에 영향을 미쳤다. 다만 서두에서 이야기했던 강화도 전등사의 나부상의 케이스는 한 발 더 나아갔다. 결국 그리스의 아틀라스가 전등사 도편수의 원한을 산 나부상이 되어버린 흥미로운 이야기를 남겼다.



참고자료

Peter Stewart, 'Roman sarcophagi and Gandharan sculpture', "The global Connections of Gandharan Art", 2020, pp.56-57

Juping Yang, 'The sinicization and seculariztion of some Graeco-Buddhist gods in China', "The global Connections of Gandharan Art", 2020, pp.242-243

신은미, '전등사 대웅전 귀공포 조각상 연구', "인천학연구", 28, 2018, pp.231-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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