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by 지구

여름은 겨울보다 추억이 빨리 바래는 거 같다. 기억이 희미해지고 옅어지는 속도가 겨울보다 빠른 느낌이다.

추억과 기억에도 계절마다 유통기한이 다를까.

음식을 상온에 내버려 둘 시 겨울보다 여름에 더 빨리 상하는 것처럼 여름에서의 추억은 빨리 색이 바랜다.


​사실 그다지 좋아하는 계절은 아니다. 최소 우리나라의 여름은 싫어한다. 끈적한 걸 싫어한다. 사람이 몇 배로 싫어지는 것에 더해 모기까지 난동을 부리면 내가 죽는 날짜는 분명 여름이리라.


하지만 이런 내 마음의 반증일까 이상하게 겨울보다 여름에 정감이 간다. 애증이 아닌 정감 싫어하는 사람 더 신경 쓰이는 것 같은 감정. 벌래 퇴치 약, 선풍기, 에어컨, 얼음 등등 준비할 거도 많은 계절.


​머리를 짧게 자르고 하얗게 두피가 드러난 머리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고 온몸이 열기로 후끈 달아오른다.

셔츠의 단추를 하나 더 풀고픈 욕망을 꾹 참고 손으로 부채질한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여름을 대표하는 꽃은 아지랑이가 아닐까 싶다. 내가 보고픈 대로 봐도 괜찮을 꽃. 아스팔트가 정원이 되는 여름의 환상


​여름의 기억이 유독 더 짙은 이유는 열기와 땀이 날 괴롭혔기 때문이 아닐까. 괴로움을 참아가며 거리를 걷고 시원한 에이컨이 빵빵한 실내를 들어서는 순간의 쾌감.


이렇게 생각하면 내 인생의 괴로운 시기 또한 여름이라 칭할 수 있지 않을까. 괴로움을 꾹 참아가며 성공을 맛보았을 때의 순간, 열을 뿜으며 땀을 닦는 여름 같은 괴로운 순간.


그 순간 이후 에어컨이 빵빵한 성공을 맛보는 순간. 결국 피할 수 없는 계절. 결국 피할 수 없는 순간들.


이러한 괴로운 순간을 성공으로 버티던 억지로 버티던, 여름이 지나 시원한 바람이 부는 가을과 겨울이 오면 한층 더 자란 느낌을 받는다. 신체적으로 던 정신적으로 던 말이다.


꼭 꽃을 피우지 않아도 괜찮다. 싱그러운 풀잎이어도 괜찮다. 꽃이 주연이 되기 위해선 푸르른 풀잎 주연도 필요하듯, 푸르른 풀잎 주연 또한 정갈한 조약돌 같은 엑스트라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모든 주인공들을 위해 안정적인 화분 혹은 영양가 있는 흙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저 여름을 살아가면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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