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프랜 Oct 19. 2024

내가 아는 네 모습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아

네 편향된 애정은 그 어떤 날카로운 조언보다도 균형감을 준다

언제나 나보다 더 나를 애정 있게 봐 주는 사람. 네 덕분에 나는 오늘도 내게 더 너그러워질 수 있었다. '굳이 나까지 나를 객관적으로 보려 애쓸 필요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무얼 하든 응원해 주는 너를 통해 나는 나를 한껏 주관적으로 편애하는 법을 배운다.

사실 네 편향된 애정은 그 어떤 날카로운 조언보다도 내게 균형감을 준다. 생산적인 일 하나 없이 그저 눈을 뜨면 뜨개질을 하고 오늘 먹을 밥을 요리하고 아이돌 무대와 야구 경기를 보다가 하루를 다 보내는 내가 이전보다 훨 좋아 보인다고. 잘하고 있으니 막연한 불안감에서 벗어나도 된다고.

그렇게 말해주는 네 덕분에 내가 잘 살고 있음을, 이대로도 괜찮음을 알게 된다. 지금 이렇게 추워도 봄은 무조건 올 거라는 아주 당연한 사실을 말해주듯 단호하고 따뜻한 네 확언 덕분에.

- 2023년 2월 17일 일기에서


이제 좀 뭔가를 사부작사부작 만들고 뭐라도 해 볼까 혼자 궁리하고 있는 나를 지켜보던 친구가 문득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는 네 모습에 이제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아."

나를 가장 오랜 시간 봐 온 친구의 말이라 더 고마웠다. 나도 내게 못하는 확언을 해주는 사람. 

스무 살 이후 십 년 동안은 남들처럼 공부하고 취직하고 돈 벌려고 애써봤으니 이제는 하고 싶은 것, 자연스럽게 마음이 가는 것을 해 보자고 얘기하며.

- 2023년 5월 22일 일기에서



구독자님께 쓰는 열세 번째 편지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문프랜입니다.


눈치챈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어요. 편지를 여는 일기 속 날짜가 22년 가을과 겨울을 지나 어느덧 23년 봄까지 왔다는 걸요.


23년 2월과 23년 5월 두 일기에 등장하는 사람은 동일 인물입니다. 무려 초등학생 때 처음 만나 벌써 인생의 3분의 2를 함께 한 제 절친한 친구예요.


2022년 9월, 친구에게 퇴사 고민을 털어놓던 날


어느 책에선가 나를 이해하고 지지하는 사람들로 내 주변을 채우라는 말을 읽은 적 있어요. 자꾸 나를 의심하는 사람보다는 긍정해 주는 사람과 일부러 더 많이 교류하라고요. 물론 어느 정도의 자기객관화는 필요하겠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몰아세우지 말고 충분히 칭찬해라, 혼자서는 잘 안된다면 주변인의 힘을 빌려서라도 그렇게 하라는 뜻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나의 이해자(理解者).

제게는 이 친구가 바로 그런 존재예요.


앞뒤 없이 퇴사 결정을 알렸을 때. 퇴사 후 다시 도진 무기력에 빌빌대고 있을 때. 그러다 조금 기운을 차려서 혼자서 뭔가 해보겠다고 할 때. 갭이어의 모든 순간마다 친구는 제 이야기를 왜곡 없이 듣고 무조건적인 응원을 건네줬어요. 덕분에 힘을 얻은 날이 얼마나 많았던지요.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질문하는 제게 그래도 된다고 말해주는 이해자가 있어서 저는 늘 쉽게 안도할 수 있었어요. 아주아주 좁은 인간관계를 가진 제게도 이런 사람이 있다니! 정말 감사한 일이에요.


2010년 2월, 중학교 졸업식에서 친구와


이 인연을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자면 약 19년 전 2005년으로 거슬러 갑니다. 저희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같은 반이었는데, 정확한 시점은 까먹었지만 무슨 계기로 친해졌는지는 확실히 기억해요. 바로 '라디오'라는 공통점이 있었거든요.


'어? 나도 이 라디오 듣는데.'

'야 너두? 야 나두!'


대충 이런 대화가 우리의 시작이었어요. 지금은 더 그렇겠지만 그때도 '라디오 듣는 초등학생'은 많지 않았거든요. 저희 둘 다 어릴 때부터 내추럴-본 덕후였던지라 라디오와 각종 덕질 이야기를 나누며 급속도로 친해졌답니다. 그 후로 중학교까지 쭉 같이 다녔고, 학교가 갈라진 고등학생과 대학생 때도, 그리고 사회인이 되어서도 인연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우리가 서로 닮은 점이 정말 많다는 걸 느꼈어요. 둘 다 덕질에 진심이고, 삶에서 추구하는 가치가 비슷했거든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며 닮아갔는지 아니면 애초에 닮은 모양이라서 친해진 건지 잘 모르겠지만요.


2020년 11월, 내가 찍은 친구


그래서 둘이 만나면 대화만으로도 몇 시간이 휙 지나갑니다. 요즘 하는 일, 힘들었던 일, 최근 다녀온 여행 등 평범한 근황 토크를 하다가 갑자기 최근에 본 웹툰, 드라마, 영화 속 캐릭터와 서사에 대해 얘기하며 덕후들의 비평회를 열어요. 그러다가 또 인생관과 가치관 주제로 넘어가서 '사는 건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에 대해서 술 한 방울 마시지 않고도 딥하게 대화하죠. 그러다가 난데없이 먹태깡 이야기를 하고 슈퍼에 가서 '아 먹태깡 없네' '근데 노가리칩 이거 맛있어' 이런 대화를 하다가 헤어지곤 해요. (ㅋㅋㅋㅋ)


옆에서 들으면 이게 대체 무슨 대화인가 싶을지도 모르지만, 가벼운 수다부터 속 깊은 말까지 모든 층위를 단숨에 넘나들어도 어색하지 않은 우리가 저는 너무 좋아요.


'작년의 우리보다 올해의 우리가 더 좋아. 그거면 됐지!'

- 2023년 11월 25일 일기에서


지난 연말에는 둘이서 작은 송년회를 하면서 새해가 마냥 싫지만은 않다고, 처음으로 기대된다는 얘기를 나눴어요. 서로를 처음 만났던 10대와 많이 흔들리고 혼란스러웠던 20대를 지나 지금 30대 초입에 선 우리는 이제 자신이 뭘 좋아하고 언제 편안한지를 아는 사람이 되었다고요. 여전히 막막하지만, 어느 정도 나를 알고 믿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기대된다고 이야기했어요.


어느새 우리 인생의 절반보다 길어진 인연에 새삼 감사해하며, 조금 쑥스럽지만 '우리는 서로의 복이야' 라고 소리내어 말하면서요.


2021년 3월, 친구가 찍은 나


구독자님 주변에도 '이해자'가 있나요?


사실,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시간을 가지겠다고 하면 우려하는 말이 먼저 들려오기 마련이에요. 그 또한 나를 아끼는 마음에서 비롯됐겠지만, 이왕이면 내 결정을 지지해 주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나를 두는 편이 훨씬 도움 돼요. 적어도 갭이어를 보낼 때만큼은요.


너 지금 잘하고 있어. 그렇게 쉬어가는 게 너한테 꼭 필요했던 것 같아. 너무 조급해하지 마. 이런 말은 내가 나에게 하면 금방 휘발되어 버려요. 괜찮다는 말 뒤에 '그런데...' '하지만...' 하는 반박이 금세 따라붙죠. 겨우 세운 모래성이 밀려온 파도에 쉽게 무너지듯이요.


하지만 같은 말을 타인이 해주면 그 여운이 훨씬 오래가요. 맞아. 나는 지금 내게 필요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거야. 긴 인생에서 요만큼 쉬어간다고 큰일 안 나! 이해자가 말해주는 위로는 오랜 시간 굳힌 튼튼한 성벽이 되어 파도에 휩쓸리기 쉬운 나의 연약함을 지켜줍니다. 덕분에 나는 그 뒤에서 안심하며 한껏 어깨를 펼치고 턱을 들어 파도를 직면할 수 있어요.


갭이어를 보내는 이에게 냉철한 비판보다는 무조건적인 응원을 해 주는 이해자가 필요한 건 그래서예요. 자기의심에 빠진 사람에게는 날카로운 조언보다 '편향된 애정'이 오히려 균형감을 주니까요


원하는 만큼 충분히 쉬어가되 홀로 고립되지는 않도록. 부유하는 감각이 아닌 자유로이 유영하는 감각으로 이 시간을 지나갈 수 있도록.



혹시 내 주변에 이해자가 없다면 그들을 만날 수 있는 곳에 내가 찾아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에요. 다양한 삶의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온라인 커뮤니티들이 있거든요.


제가 아는 선에서 몇 곳만 간단히 소개해 볼게요. 이곳에서라면 분명히 나만의 이해자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니트생활자

무업 기간 사회적 단절을 경험하는 청년들을 위한 커뮤니티 플랫폼. 백수만 입사할 수 있는 가상의 회사에서 '회사놀이' 활동을 하며 소속감을 나누는 '니트컴퍼니', 작은 모임 프로젝트를 통해 내 일을 탐색하고 서로 연결되는 '닛커넥트'를 운영하고 있어요.

인스타그램 @neetpeople

홈페이지 https://neetpeople.kr/


파인더스클럽

세상이 말하는 정답이 아닌 나다운 정답을 찾아나가는 '요즘 것들의 사생활(요즘사)'에서 운영하는 커뮤니티예요. 나다운 일과 삶을 찾는 사람들이 모여 있어 서로가 서로의 레퍼런스가 되어 준답니다. 24년 1월에 시즌1, 24년 6월에 시즌 2가 진행되었고 저도 시즌1부터 합류해서 활동하고 있어요.

인스타그램 @yozmsa

홈페이지 https://yozmsa.com/


그냥하는게다비다 클럽

단톡방도 밴드도 없고 한 달에 한 번 온라인 정기모임만 존재하는, 대신 평생회원이 될 수 있는 '사교클럽'. 결이 맞는 사람들과 부담 없이 편한 마음으로 이야기 나눌 수 있다고 해요. 저는 클럽원은 아니지만, 꼭 클럽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모임장 '다비'님의 인스타그램을 보다 보면 '하고 싶으면 그냥 하자!' 하고 힘을 얻게 돼요.

인스타그램 @justdaviit



만약, 어디서도 구독자님의 이해자를 찾기 어렵다면 제게 이야기하셔도 좋아요.


이 편지를 쓰는 이유도 저처럼 갭이어를 고민하거나 현재 갭이어를 보내고 있는 분께 단 하나의 사례라도 더하고 싶었기 때문이거든요.


익명 방명록에 고민을 남겨주셔도 좋고, 제게 개인적으로 댓글이나 메일을 주셔도 돼요. 제가 주변의 이해자로부터 충분한 힘을 얻었던 만큼 그 경험을 구독자님께도 전하고 싶습니다.


그럼, 오늘 편지는 여기서 이만 줄일게요.

편안한 밤 보내세요.


당신의 이해자,

프랜 드림.




추신.

여러분의 이해자는 누구인가요?


저처럼 오래된 친구일 수도 있고 가족이나 동료일 수도 있겠죠. 나의 이해자는 누구인지, 그 사람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그에게 어떤 응원을 받았는지 궁금해요.


댓글에 남겨주시거나 구독자 전용 익명 방명록에 적어 주셔도 좋아요. 구독자님의 답장을 기다릴게요.



이전 13화 나를 기특하게 생각하기, 오직 나만의 기준으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