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안 하는 게 아니라 비우는 중입니다
그저 공백이었던 지난 겨울. 스스로 자책도 많이 했지만 그 시간을 지나니 자연스레 몸과 마음에 활기가 도는 시점이 생겼다. 두 달을 미루던 일을 오늘 오전 두어 시간 만에 후다닥 끝내버릴 정도로.
건강한 밥을 해 먹으니 끼니를 기다리는 게 즐거워진다. 따뜻한 햇빛을 맞으며 걷는 게 기꺼워지는 계절이 오니 저절로 템포가 빨라진다.
어쩌면 나는 늑장 부리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던 게 아니라 몸과 마음을 비워내는 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다 비워내고 나면 자연스레 다시 채워진다. 끝까지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다.
그러니 비우는 중인 나를 탓하거나 재촉하지 않아도 된다. 나름대로 고요히 애쓰는 중인 나를 채근하지 않고 천천히 기다리는 법을 배웠다.
- 2023년 3월 1일 일기에서
구독자님께 쓰는 열네 번째 편지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문프랜입니다.
오늘도 무탈하게 보내고 계시나요?
이번 편지는 작년 3월의 첫날에 쓴 일기로 열어보았습니다. 겨울을 지나 확연히 봄에 접어든 계절처럼, 무기력했던 몸과 마음이 나도 모르는 사이 산뜻해졌다는 걸 문득 알아챈 날이었어요.
갭이어 중 제 기분과 컨디션은 정말이지 들쑥날쑥했습니다. 그래프로 그려보면 아마 이런 모습일 거예요.
오늘은 이 그래프를 쭉 따라가며 22년 가을부터 23년 봄까지의 제 갭이어 생활을 한 번 정리해 보려고 해요.
22년 11월~12월
11월 초에 퇴사하고 바로 다음 날부터 2주에 걸친 긴 여행을 했어요. 여행에서 돌아와 남은 11월은 시차, 그리고 백수가 된 낯선 감각에 적응하느라 해롱대며 보냈죠. 12월에는 다시 여행을 하며 자유를 만끽하기도 했지만, 뒤늦게 코로나에 걸려서 크게 아프며 12월의 절반이 날아가기도 했어요. 워낙 빅 이벤트가 많아 감정의 폭이 자주 출렁인 시기예요.
23년 1월
어떻게 지나가는 줄도 모르게 두 달을 보내고 나니 2023년이 덜컥 밝았고, 겨울과 함께 무기력이 시작됐습니다. 퇴사와 동시에 사라졌다고 생각한 무기력은 지독하게 긴 겨울밤처럼 끈질기게 저를 다시 괴롭혔어요. 꼼짝도 하기 싫어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는 날이 많았죠. 몸은 축 늘어지는데 마음만 늘 조급해서 문제였습니다. '정말 이렇게 대책 없이 쉬어도 되나?' 하는 얼떨떨한 마음과 '아니 근데 그러려고 퇴사한 건데' 하는 솔직한 마음이 계속 충돌했고, 그 사이에서 자책도 많이 했어요.
23년 2월
그때 동아줄처럼 잡은 게 요리(9화)와 뜨개질(10화)이에요. 이 두 가지는 일의 범주에는 들어가지 않되 작은 성취감을 얻을 수 있는 것들이었거든요. 앞으로 뭐 해먹고 살지, 어떤 사람이 될지 막막했지만 복잡한 머릿속은 외면하고 그저 눈 뜨면 뜨개질을 하고 끼니를 만들었어요. 끝없는 무기력의 늪에서는 무언가 몰두할 게 필요하다는 걸 아마도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아요.
23년 3월
그러다 얼렁뚱땅 3월이 됐는데 앞선 일기 내용처럼 갑자기 활기가 돌기 시작하는 거예요! 내가 딱히 애쓰지 않아도 무언가 저 안에서부터 저절로 채워지는 것 같은,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꼭 겨우내 그렇게 춥다가도 봄은 무조건 오는 것처럼요.
드디어 요리와 뜨개질 외에 다른 걸 할 마음이 들기 시작해서, 직장인으로 사는 4년 동안 방치했던 블로그를 다시 시작했어요. 사진만 잔뜩 찍어 놓고 묵히던 여행 기록을 올렸죠. 블로그에 여행기 포스팅해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은근히 시간이 오래 걸리잖아요. 그 귀찮은 작업을 스스로 할 정도로 의욕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23년 4월
그러다가 조금 더 용기를 내서 4월부터는 번아웃과 갭이어에 대한 글을 쓰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글이 바로 지금 읽고 계시는 <나의 갭이어 일기>의 초안이랍니다! 이때는 순서도 뒤죽박죽이었고 연재 주기도 비정기적이었지만, 컴퓨터 앞에만 앉아있으면 숨이 쉬어지지 않아 힘들어하던 퇴사 전의 제 모습에 비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발전이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1월과 2월은 기다리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번아웃으로 지친 제게 겨울잠이 필요했던 걸 수도 있고요. 하루 건너 하루는 그저 주저앉아 이불이나 뒤집어쓰고 싶은 마음이 불쑥 올라왔지만 그럴 때마다 요리, 뜨개질, 혹은 블로그의 힘을 빌려서 나를 지탱할 수 있었어요.
또 계절이 바뀌거나 제 정신적 육체적 상태가 나빠지면 겨우 회복한 지금의 리듬이 다시 덜컥 멈출 수 있다는 걸 알아요. 언젠가 또 두 번째 갭이어를 가져야 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지금은 그게 덜 두려워요. 그럴 땐 또 비워내야 하는 타이밍이라는 뜻이니까요. 끝까지 비우고 나면 다시 채워진다는 걸 이제는 알아요.
혹시 구독자님도 지금 아무것도 안 하는 자신을 자책하고 있다면 괜찮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동안 지친 몸과 마음을 비우는 과정 중에 있는 거라고요.
다시 발을 뗄 시점이 분명하고도 자연스럽게, 구독자님만의 템포에 맞게 다가올 거예요. 그리고 그 시점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게 당연하니 너무 조급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오늘 준비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이번 편지는 <나의 갭이어 일기> Part 2의 마지막 편이었어요. 다음 열다섯 번째 편지부터는 Part 3가 시작됩니다!
Part 2가 갭이어 전반전이라면 Part 3는 후반전이에요. 일에서는 완전히 눈을 떼고 좋아하는 것으로만 일상을 채웠던 시간을 지나, 슬슬 갭이어를 마무리하고 지금의 프리랜서로 방향을 잡아가던 과정을 담을 예정이에요.
갭이어를 왜 마무리하게 됐는지, 일하는 근육을 어떻게 다시 붙이기 시작했는지, 갭이어의 끝에는 무엇이 있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테니 남은 여섯 편의 편지도 기대해 주세요.
그럼, 오늘은 이만 줄일게요.
충만하고 편안한 밤 보내세요.
분명히 다가올 봄 앞에서,
프랜 드림.
추신.
구독자님에게도 '비수기'와 '성수기'가 있나요?
저는 갭이어를 보내면서 제가 생각보다 계절과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걸 처음 알게 됐어요. 회사 다닐 땐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매일 일하느라 몰랐는데, 알고 보니 저는 흐린 날엔 컨디션도 같이 나빠지더라고요.
예전 같았으면 '날씨가 무슨 상관이야, 일해야지!'라고 생각했다면, 요즘은 '그래, 그럴만하네. 오늘은 조금 천천히 하자.'라고 인정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내게도 비수기와 성수기 같은 굴곡이 있으며 그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걸 받아들이려고요.
구독자님의 비수기 혹은 성수기는 언제인가요? 저처럼 계절이나 날씨일 수도 있고, 특정한 상황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언제나 그렇듯 댓글 혹은 구독자 전용 익명 방명록에 이야기 남겨주세요. 구독자님의 답장을 기다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