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건 네가 나약해서가 아니라고
퇴사 의사를 전달하고 이틀째 되던 날. 회사는 내 퇴사 건을 검토 중이었고, 퇴사가 확정되고 인수인계가 진행되기 전까지는 정해진 일을 해야 하니 평소처럼 노트북을 켰다. 그런데 노트북 앞에 앉아 오늘 할 일을 정리하다가 가슴이 너무 답답해졌다. 으레 '스트레스 받는다'는 표현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가슴이 답답했다. 심지어 점점 숨을 쉬기 어렵다는 느낌도 들었다.
사실 전날도 전전날도 비슷한 증상이 있어서 긴가민가했는데, 며칠 동안 지속되니 아무래도 이건 마음의 문제구나 싶었다. 아무리 곧 퇴사한다고 해도 최소 한 달은 남은 상황. 계속 이 상태라면 정상적인 인수인계조차 어려울 것 같아 결국 그동안 망설였던 정신건강의학과, 흔히 말하는 '정신과' 내원을 예약했다. 정신과 내원 경험이 있는 주변 지인들에게 이야기를 종종 들어오긴 했으나 내가 환자가 되어 가는 건 처음이었다.
오늘이 그 예약일이라 오전에 반차를 내고 병원에 다녀왔다. 의사 선생님과 마주 보고 앉아 어떤 배경이 있었고 지금 어떤 점이 어려운지 간단히 얘기하고, 스트레스 지수를 보는 검사를 진행하고, 셀프 설문지도 작성했다. 스트레스 검사는 팔목과 발목에 집게 같은 걸 집어 놓고 1~2분 가만히 있으면 그래프로 수치가 나오는 방식이었다.
검사를 마치고 바로 그래프를 보여주셨는데, 확실히 지금 스트레스와 불안도가 평균보다 높은 편이라고 했다. 대신 나머지 수치는 평균에 속하고, 불안과 안정의 비율도 사실 비슷해서 균형이 완전히 무너진 건 아니라고. 스트레스로 인한 일시적인 불안 증세로 가슴이 답답하고 숨도 가쁜 것 같다며 아침과 점심 약 일주일 치를 처방해 주셨다. 아침 약은 항우울제, 점심 약은 안정제.
의사 선생님께서 간결하지만 명확하게 어떤 약이고 어떤 부작용이 있을 수 있는데 그럴 땐 이렇게 하면 된다, 하고 설명을 잘 해주셔서 좋았다. 무엇보다 지금 내 증상이 심한 건지 약한 건지 잘 몰라서 불안했는데 눈으로 수치를 보고 나니 조금 나쁘게 나왔더라도 오히려 안심됐다. 내가 어떤 상태인지 객관적으로 알 수 있어 좋았달까.
정신과 내원은 처음이라, 안 그런 척하려고 애썼지만 사실 알게 모르게 긴장을 많이 했다. 그런데 막상 가 보니 그냥 몸 아파서 가는 병원과 똑같았다. 몸이 아플 때 병원 가는 건 그렇게 당연하면서 마음이 아플 때 병원 가는 건 왜 그리 어려운지. 설문 검사비 2만 원을 제외하면 진료비와 약값도 얼마 안 나왔다. 지레 겁먹을 필요 없었다.
안정제를 먹었더니 엄청 졸린데 컴퓨터 앞에 앉아있을 때 답답한 느낌은 정말 완화되었다. 약 먹어보고 일주일 후에 또 내원하기로. 그때는 오늘 기입한 셀프 설문지 결과를 보면서 이야기하기로 했다.
- 2022년 9월 27일 일기에서
지난주에 검사한 설문지 결과를 보러 정신과에 다시 내원했는데 뜻밖의 결과가 나왔다.
크게 불안, 우울, 대인기피 세 가지에 대한 결과를 볼 수 있었는데 의외로 불안 척도는 정상이거나 조금 높은 수준인 반면 우울증과 대인기피가 가장 높은 수치, 즉 가장 나쁜 상태로 나왔다. 내가 스스로 기입한 검사지 결과라서 더욱 놀랐다.
그동안 무기력한 게 오래 지속되었으니 어느 정도의 우울 증세를 짐작하긴 했지만... 사실 이 정도로 나쁘게 나올 줄은 몰라서 진짜, 조금, 많이 심란했다.
의사 선생님은 생각보다 대인기피가 높게 나온 것도 의아했다며, '최근에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일해야 했었나요?' 하고 물어보셨다. 생각해 보면 그렇긴 했다. 갑작스럽게 많은 사람들과 계속 긴밀하게 소통해야 하는 상황이 있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일주일 후에 또 내원하기로 하고 집에 오니 힘이 쭉 빠졌다. 내가 정말로 우울증이란 사실이 충격이었다. 사실 번아웃과 우울증은 비슷한 말일 텐데. 나도 모르게 심한 우울증은 아닐 거라고 짐작했나 보다.
마음에 감기가 든 거라고, 누구나 마음에 상처가 생기면 갖게 되는 병이라고 간단하게 여기려 해도 그게 쉽지는 않다.
시간이 지날수록 과거의 내게 무수히 많은 신호들이 있었음을 생각한다. 아침에 출근하기 힘들어 뭉그적대고, 점심 먹고 나면 다시 일로 돌아가기 힘들어 30분이고 1시간이고 무기력하게 누워있곤 했고, 그렇게 일을 미루다가 주말에 해야지 해놓고 막상 주말이 되면 스트레스 받으며 또 다음 주로 미루고...
이게 일종의 번아웃 신호였다는 걸 지금에야 깨닫는다. 남들도 다 이렇게 살겠지, 생각하며 유독 나약한 나를 탓하고 넘겼던 날들을. 그때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건 네가 나약해서가 아니라고. 설령 정말 네가 나약하더라도, 네 그릇의 크기를 남들의 기준에 맞춰 억지로 키우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 2022년 10월 4일 일기에서
구독자님께 쓰는 세 번째 편지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문프랜입니다.
오늘은 제가 번아웃으로 인해 정신과에 처음 갔던 날과 두 번째 갔던 날의 일기를 꺼내 봤어요. 사실 갭이어 기간 동안 정신과에 내원했던 경험은 꼭 한 번 일부러라도 하고 싶었던 이야기예요.
오늘날 정신과 이야기가 예전보다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굳이 꺼내거나 찾아보지는 않는 주제잖아요. 저 또한 한동안은 정신과에 다니는 걸 되도록 말하지 않았고요.
왜 그럴까 생각해 봤는데, 물론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몸보다 마음의 일에 유난히 각박한 시선 때문이 아닐까 싶었어요. 몸이 아프다고 하면 아픈 사람의 잘못이 아니다, 누가 아프고 싶어서 아프냐며 위로를 받죠. 하지만 마음이 아프다고 하면 '남들은 버티는 걸 너는 왜 못 버텨서 그런 델 다니냐' '남들도 다 그만큼 힘든데 그냥 산다' '그런 걸 견뎌야 성공한다' 처럼, 한 사람의 기질이나 맥락은 무시한 채 마음의 한계는 누구나 의지대로 얼마든지 늘릴 수 있다는 듯한 말이 따라붙곤 해요.
하지만 저는 마음의 문제도 몸과 똑같다고 봐요. 각자의 면역력과 운동능력이 조금씩 다르듯이, 누구는 다리를 자주 삐고 누구는 뼈가 튼튼하고 누구는 살성이 약하듯이. 마음의 면역력과 운동능력도 사람마다 다른 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또한 아무리 태어나길 건강해도 외부의 사건사고로 인해 상처가 나면 병원에 가는 것도 당연하고요. 그러니 마음이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거나 생채기가 생겼다면 낫기 위해서 병원에 가는 건 얼마든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한편으로는 '잘 모른다'는 막연함도 정신과를 꺼리게 되는 이유 중 하나인 것 같아요. 번아웃으로 인해 무력감에 빠지면서 주변에서 정신과 내원을 권했지만 저도 한동안 망설였거든요. 정신과는 가면 어떤 분위기지? 가면 뭘 하지? 어떻게 처방하지? 돈은 얼마나 들지? 얼마나 자주 가야 하지? 하면서요.
하지만 우리가 동네 이비인후과나 정형외과에 갈 때는 이 정도로 고민하지 않잖아요. 결국 데이터가 없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정신과에 가 본 사람은 외부의 시선이 두려워 굳이 말을 꺼내지 않고, 가 보지 않은 사람은 검색창에 '정신과' 세 글자를 치는 것조차 껄끄러워하다 보니 직접 경험은커녕 간접 경험도 접하기 어려워서 막연한 두려움만 커지는 거죠.
그래서 일부러라도 더욱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마음의 질병은 사람마다 증상의 경중이 다르고 처방 또한 천차만별이니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는 이런 일 때문에 얼마만큼 내원했고 어떤 약을 처방 받았는지. 병원은 어떤 분위기였고 돈은 얼마나 나왔는지. 그런 이야기들이 더 많아져야 누구든 마음이 아플 때 자연스럽게 '아, 나도 정신과에 가 봐야겠다'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니 다시 돌아와서, 제가 정신과에 다닐 때 경험담을 좀 더 적어 볼게요.
제가 처방받은 약은 안정제와 항우울제 두 가지였는데 저는 약을 먹은 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그전에는 컴퓨터 앞에 앉아있기조차 힘들었는데, 그래도 약을 먹으니까 일상이 이만큼이라도 유지된다는 생각이 제게 정말 위안이 되었어요.
처음 한 달 정도는 1주에 한 번 내원해서 맞는 약을 찾는 과정을 거쳤고, 그다음부터는 2주에 한 번 내원하면서 별다른 변화가 없었는지 보고, 나아졌다면 약의 용량을 줄이거나 약한 약으로 바꾸는 식으로 의사 선생님 처방 하에 점차 약을 끊어갔어요.
사실 약도 한 번에 끊은 건 아니에요. 약을 거의 다 끊어가던 시점에 코로나에 걸렸거든요. 평소에는 집에 있는 걸 그렇게 좋아하면서 그때는 격리하는 게 왜 그렇게 답답하고 불안하던지. 몸이 아프니까 멘탈도 다시 도루묵이 되어버려서 격리 4일 차쯤에는 세상이 무너진 듯이 엉엉 울었어요. 완전히 탈출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수렁으로 빠지는 기분. 몸이 아픈 것보다도 그 좌절감이 너무 심했어요.
결국 격리가 끝나고 다시 약을 처방받아 먹고, 또 한 번 천천히 줄이는 과정을 거쳐 지금은 병원과 약의 도움 없이 생활을 이어가고 있어요. 가장 마지막 내원 날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시더라고요. 불안과 우울은 완전히 없어지는 게 아니라 스트레스 상황이 되면 감기처럼 언제든 다시 올 수 있다고. 그럴 땐 너무 당황하지 말고 그 증세가 2주 정도 지나도 호전되지 않으면 꼭 다시 찾아오라고요.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살면서 감기에 한 번만 걸리고 마는 게 아니잖아요. 마음의 병도 감기와 똑같이 언제든 다시 걸릴 수 있다는 걸 어렵게 받아들인 사건이었어요.
그래도 다행히 지금은 처음처럼 마냥 막막하지만은 않아요. 내 힘으로 마음을 일으켜 세울 수 없을 때 도움받을 곳이 있다는 걸 이제는 아니까요.
이번 일기와 편지는 어떠셨나요?
너무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써 봤는데 잘 전달되었을지 모르겠어요.
설령 조금 무거운 내용이었더라도, 나중에 언젠가 혹시 구독자님의 마음에 감기가 들었을 때 자신을 탓하기보다는 이 글을 떠올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만큼은 아무 걱정 없이 잠드시기를 바라요.
그럼 이만 줄일게요.
편안하고 아늑한 밤 보내세요.
따뜻함을 담아,
프랜 드림.
추신.
구독자님의 마음에도 감기가 든 적 있었나요?
그럴 때 어떻게 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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