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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프랜 Oct 19. 2024

왜 하필 갭이어여야 했냐면

번아웃은 절망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퇴사를 결정하고 회사와 개인 면담을 했다. 묵묵히 잘 다니고 있는 줄만 알았던 사람이 갑자기 퇴사한다니 팀장님은 당황하시면서, 그렇게 힘들면 혹시 휴직은 어떠냐고 조심스레 제안하셨다. 사실 번아웃만이 문제라면 3개월 혹은 6개월 정도의 긴 휴직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일은 마음에 드는데 그저 지쳐서 잠시 회복할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라면.

하지만 아무리 다시 생각해도 내가 지금 하고 싶은 건 잠시 쉬었다가 같은 자리로 돌아가는 휴직이 아닌, 현재의 상태를 끊어내고 다시 시작하는 갭이어였다.

쉬었다가 돌아온다면 번아웃은 나을지 몰라도 내 안에는 해소하지 못한 무언가가 여전히 남아있을 것 같았다. 내 오래된 고민,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한 고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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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매니저'라는 역할로 처음 입사했을 때는 직접 콘텐츠를 만드는 업무가 많았다. 자료를 조사하고, 글을 쓰고, 수정하고, 가끔은 콘텐츠에 필요한 사진을 직접 찍기도 하는 과정에서 큰 보람을 느꼈다. 특히 내가 무언가를 써서 업로드 버튼을 누르는 그 순간이 너무 좋았다. 그러느라 사실 처음 1~2년은 힘든지도 몰랐다.

그런데 3년 차, 4년 차가 되자 나의 위치도 팀의 방향도 점차 바뀌었다. 콘텐츠를 직접 제작하기보다는 매니징 업무가 메인이 되면서 콘텐츠 포맷을 기획하고, 나 대신 이 콘텐츠를 만들어 줄 사람을 찾고, 각종 지표를 보고 데이터를 분석하고, 같이 일할 팀원을 뽑기 위해 면접도 봐야 했다. 크게 보면 나는 여전히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이긴 했지만 실제로 '내가' 콘텐츠를 만드는 일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뭐가 좋고 나쁘고의 문제는 당연히 아니다. 1~2년 차에 하던 일은 사실 콘텐츠 매니저보다는 '콘텐츠 에디터'에 더 가깝기도 했고. 회사의 규모가 커지면서 하나하나를 직접 만드는 편집자보다는 여러 개를 동시에 생산할 시스템을 구축하는 관리자가 더 필요해졌을 뿐이다. 나 또한 그게 회사가 지향하는 바에 알맞은 방식임을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일을 하면 할수록 내가 정말 가고 싶은 길인지 의문이 생겼다.

연차가 쌓일수록 일의 범위는 넓어지고 강도는 강해지고 복잡도는 올라간다. 갈수록 더 많은 사람과 소통해야 하고 책임도 커진다. 당연한 일이다. 결국 이 모든 걸 견뎌야 커리어가 쌓이고 내가 성장하는 거겠지.

그런데 그게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면?

만약 내가 이 길 위에 특정한 목표를 두었다면 힘들더라도 조금 더 오래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업무는 심화되는데 내가 이렇게 일해야 할 이유는 점점 사라져만 갔다. 이전만큼 흥미롭지 않고 보람차지 않은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일한 지 어느덧 만 4년을 채워가던 시점. 스타트업에서는 이른바 고인물이라 불리는 연차였지만 누군가 내게 '일할 때 어떤 게 제일 좋아요?' 라고 물으면 내 답은 여전했다.

'업로드 버튼을 누르는 그 순간이 가장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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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무 고민과 더불어 내 안에 끈질기게 떠오르던 또 하나의 화두는 '일을 하는 환경'이었다.

나는 사람과의 관계를 어려워하고, 되도록 낯선 환경에 노출되고 싶지 않아 하고, 다른 누구에게 일 시키는 걸 잘하지 못하며 혼자서 구석에 박혀서 조용히 사부작 만드는 걸 좋아한다. 말하자면 대문자 I 인간, 모든 에너지가 안으로 수렴하는 철저한 내향 인간이다.

그리고 나는 이런 내 성향을 오래전부터 고쳐야 하는 약점이자 단점이라고 생각했다. 사회에서 제시하는 기준에 미달한다고 생각했으니까. 실제로 회사 생활을 하는 동안 남몰래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아마 나 같은 내향인들은 공감할 텐데, 어차피 일이니까 해야 할 일은 다 해내지만 그만큼 에너지를 많이 쓰고 그만큼 스트레스에 쉽게 노출된다. 그러다 보면 특별히 회사가 내게 잘못한 것도 없고 내게 나쁘게 구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나 혼자 무너지는 날들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나를 탓한다.

어느 순간 이건 이직을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란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조직에 속해 있기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는 어느 회사에 가도 같을 거라는 걸. 물론 계속 다니다 보면 사회성을 길러서 조금 더 둥글고 융통성 있는 사회인으로 거듭날 수 있겠지. 실제로 그런 분들도 많고. 하지만 타고나길 고집불통인 나는 문득 억울해졌다.

나는 그냥 이렇게 태어나서 이렇게 자랐는데. 왜 내가 날 다 바꿔야 하지?

나의 어떤 성향이 특정한 환경에서는 분명 단점이자 약점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환경에서라면? 내가 처한 상황에서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라면, 꼭 모든 게 내 잘못일까? 내 성향이 딱히 단점이 아닌 그저 하나의 '특성'으로 존재할 뿐인 환경이 분명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곳을 내가 찾아가면 되는 것 아닐까.

내가 그냥 나로 존재해도 이상하지 않은, 내 무엇을 굳이 극복하거나 뜯어고치지 않아도 되는 곳. 정확히는 그래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일의 형태. 내게는 그게 조직을 벗어나 혼자 일하는 프리랜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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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매니저보다는 콘텐츠 에디터를, 조직보다는 프리랜서를 막연히 바라던 내게 갑작스레 들이닥친 번아웃은 분명 절망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일종의 신호탄이기도 했다. 번아웃에서 무사히 회복한다면 그때는 꿈꾸기만 하던 걸 시도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래서 갭이어여야만 했다. 내 오래된 고민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는 휴직도 이직도 아닌 새로운 출발선이 필요했으니까.



구독자님께 쓰는 두 번째 편지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문프랜입니다.


오늘 글은 일기 형식이 아니었죠. 실제로 어느 하루에 쓴 일기가 아니라 몇 년 전부터 마음속에 조금씩 피어오르던 아지랑이 같은 생각들이기에 지난 1화와 달리 어떤 날짜를 특정하진 않았습니다. 당시에 미처 일기가 되지 못한 문장들을 뒤늦게 모아서 쓴 글이라고 봐주시면 좋겠어요.


퇴사하고 2년이 지난 지금 저는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습니다. 바라던 대로 어떤 프로젝트나 사람을 매니징하기보다는 제가 직접 글을 쓰고 편집하는 '콘텐츠 에디터'라는 말로 저를 부르고 있고요. 더불어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도 잃고 싶지 않아서 '콘텐츠 창작자'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지금 읽고 계시는 이 에세이레터가 그 결과물이자 첫 창작물이고요! 앞으로 또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지금은 제가 원하던 일을 원하는 방식으로 하고 있으니 만족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과 그 형태를 재조정하는 것에 갭이어는 큰 도움이 됐어요. 회사에 다니는 동안에는 눈앞에 놓인 할 일에 급급해서 나에 대한 생각을 깊게 하기 어려웠거든요. 갭이어를 갖는 동안 내가 뭘 좋아하고 어떻게 일할 때 즐거워하는지 다시금 고민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지금의 길을 택할 수 있었습니다. (열심히 고민하던 시기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앞으로 차차 이어집니다.)


이쯤에서 갑작스럽지만 하나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무려 9년 전에 제가 썼던 일기인데요. 때는 바야흐로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 동안 단기 인턴을 하다가 방학이 끝나감과 동시에 취업과 진로에 대한 압박을 느끼던 시기입니다.


2015. 8. 21. 12:42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기분이다. 영화사 인턴도 끝나가고 있고, 별일을 하진 않았지만 영화 제작은 나에게 과분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영화라는 이 판 자체가 나의 실력과 성향과 맞지 않음을 확인했다. 그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은 수확이다.

하지만 이제 내 앞에 어떤 길이 있는지 다시 한번 들여다봐야 할 시간이 왔다.

다시 글을 쓰기.
사실 언제나 제대로 써왔던 적은 없지만 팀장님 말씀대로 지금부터 써놓아야 시간이 더 지나 좋아질 것. 지금 이 순간의 나만이 표현할 수 있는 감정과 감성으로 많은 것을 기록할 것.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그것만은 놓지 않기. 십 년 전부터 해왔듯이 계속해 나가기.

내 안의 기준을 세우기.
나는 어떤 유형의 직업을 가지고 어떻게 돈을 벌며 어떻게 사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앞으로의 진로를 세울 때 가치판단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준을 세울 것.

1. 즐거웠으면 좋겠고
2. 나의 덕력을 표출할 수 있으면 좋겠고
3. 어느 정도 자유로웠으면 좋겠고
4. '콘텐츠'를 '만들'거나 '전달'하는 일이었으면 좋겠다.


앞서 보여드린 글과 완전히 일맥상통하지 않나요? 특히 '콘텐츠를 만들거나 전달하는 일이면 좋겠다'는 부분은 그냥 어제의 제가 썼다고 해도 믿을 정도죠.


이런 일기를 썼다는 것조차 잊고 있었는데 얼마 전 옛날 블로그를 뒤적이다가 우연히 발견하고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 지금이나 9년 전이나 똑같다니! 긴 시간이 지나도 나의 무언가는 바뀐 적 없이 여전했구나 싶더라고요. 


이 비장한 일기를 쓰고 난 다음, 당연하게도 저는 몇 년 더 헤매고 나서야 콘텐츠를 만드는 직장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또 몇 년을 헤매다가 갭이어를 경험했고, 갭이어를 하면서도 헤매다가 지금은 회사 밖에서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이게 끝은 아닐 거예요. 어쩌면 저는 앞으로도 쭉 헤맬지 모르죠. 프리랜서라는 자유롭고 번지르르한 이름 뒤에 숨은 불안과 계속 맞서면서. '아 내가 왜 퇴사했지!' 후회도 하면서.


하지만 제가 아무리 헤매도, 가슴팍에 넣어둔 나침반의 존재를 다시 까먹더라도. 결국 제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늘 같겠지요. 뒤늦게 생각나서 문득 꺼내 본 나침반 역시 약속처럼 같은 방향을 가리킬 테고요.


내 안에 흔들리지 않는 어떤 묵직한 닻이 하나 있다는 것. 그 사실을 몇 년 전 일기를 통해 발견하니 조금 울컥하고 또 든든했어요.


그동안 나는 금방이라도 꺾일 듯이 휘청이며 살아온 줄만 알았는데 어쩌면 그게 나름대로 그려 온 나만의 궤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퇴사를 결정하기 전 좌절했던 날들에 위로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제가 왜 회사를 그만두고 갭이어를 가져야만 했는지에서 시작해, 결국은 어떻게 일하며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인지에 대해 적어 보았어요.


어떠셨나요? 구독자님께 흥미롭거나 공감되거나 위로되는 이야기였길 바랍니다.


업로드 버튼을 누르는 게 가장 좋던 저는 지금 '발행하기' 버튼을 누르기 직전입니다. 제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죠!


지금 제 행복한 마음이 구독자님께도 전해지길 바라며, 이만 줄일게요.

감기 조심하시고 따뜻하게 주무세요.


가장 좋아하는 행복을 담아,

프랜 드림.




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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