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갭이어가 내 이야기가 될 지도 몰라
'진짜 번아웃인가 봐.'
이 문장을 떠올리자 최근 몇 달간 나의 이상한 상태가 한 번에 설명됐다. 일을 하기 싫은 무력감이 꽤 오래 지속되어 왔고, 출근이 어려운 건 물론이고 점심시간을 갖다가 다시 복귀해야 할 때도 침대에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누워 있어야만 겨우 일할 수 있었다. 일의 기한을 자꾸 지키지 못하고, 그나마 날 억지로라도 일하게 했던 최소한의 책임감마저 희미해졌다.
이 부분이 가장 심각했다. 스스로 책임감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내가 지금 이걸 하지 않으면 나 때문에 그만큼 고생해야 하는 팀원들에 대한 죄책감마저 없다고?
그런데 정말 그랬다. 하기 싫다는 생각만 존재했고 그것 말곤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단순한 스트레스로 치부하기에는 마음이 건강하지 않은 상태인 게 분명했다. 이럴 때가 아닌데 이러고 있는 나를 보며 실망하고, 그렇게 실망하는 와중에도 여전히 하기는 싫은 악순환의 반복.
이걸 누구에게 말할 수 있을까? 말해도 되나? 폐가 될 테니 그냥 빨리 그만두는 게 나으려나? 아냐, 너무 성급한 것 같다. 시간이 좀 지나면 낫지 않을까? 그런데... 정말 시간이 지나면 낫긴 하는 걸까?
성급한 선택을 내렸다가 후회하게 될까? 나를 위한 선택이 맞나? 솔직하게 이거 그만두면 뭐 먹고 살지? 이 안온함을 내가 포기할 수 있을까? 고작 4년 일한 것 가지고 이러는 걸까?
내 마음이 원하는 것, 책임감, 두려움, 일말의 죄책감과 체면. 번아웃이라는 걸 자각하자 수많은 질문이 따라왔다. 그렇게 하루 종일 울 것 같은 기분을 참으며 꾸역꾸역 일하다가 결국 집에 가서 엄마와 이야기하고 눈물이 터졌다. 엄마는 쌓아왔던 울음을 한 번에 토해내던 나보다 더 격앙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뭐가 문제야, 걱정할 거 없어. 그만둬도 돼.
엄마의 단언을 듣고서야 내가 괴로웠던 이유를 알았다. 나는 멋진 회사원, 믿음직한 후배이자 선배, 착한 딸. 모든 걸 다 잘 하고 싶었던 거다. 그런데 그게 진작 한계에 다다랐는 지도 모르고 나는 여전히 모두 다 손에 쥐고 싶어 했다. 내가 나를 멈추지 못해서 누군가가 나를 붙잡고 '너 지금 멈춰야 돼. 잠깐 쉬어. 그런다고 큰일 안 나' 라고 말해주길 바랐다.
내 번아웃의 신호는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사실 1년 전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늘 '남들도 이러면서 성장하는 거겠지' '다들 이렇게 일하잖아' 하며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했다. 내 몸과 마음이 보내는 신호가 분명했는데 성장의 과정이겠거니 하며 무시했다.
성장 좋지. 하지만 지금의 환경에서 지금의 방향대로라면 그렇게 힘들게 날 깎아가며 성장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이미 일을 해야 할 동기가 사라졌기 때문에.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건 단 한 가지였다. 그냥 나로 살아보기. 다음 계획 없이. 나를 위한 갭이어 기간을 가지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다시 찾기.
그러려면 모든 걸 다 가질 순 없었다. 무엇을 선택하고 누리고, 무엇을 포기하고 감내할지 정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안정적인 수입을 포기하고, 팀원들에 대한 죄책감을 감수하고, 불투명한 미래에 불안해질지언정 지금은 쉬어야겠다. 이것들은 내가 감당해야 하는 게 맞다. 이날 내린 결론이었다.
밤 9시에 죄송하게도 갑작스러운 면담 요청 메시지를 넣어두고 도망치듯 슬랙을 끈 뒤로는 잠이 안 와 뒤척였다. 하도 잠이 안 와서 저번에 읽다 만 책 <우리는 아직 무엇이든 될 수 있다>를 끝까지 다 읽었는데, 글쓴이 말에서 자신을 조금 덜 자책하기를 바란다는 대목을 보고 또 눈물이 터졌다.
번아웃이라는 걸 깨달은 날. 퇴사하고 갭이어를 갖기로 결심한 날.
- 2022년 9월 19일 일기에서
구독자님께 쓰는 첫 번째 편지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문프랜입니다.
다짜고짜 긴 글로 시작해서 당황하셨으려나요?
멋진 인사말로 첫 편지를 열어 볼까 싶어 여러 번 쓰고 고치다가, 그래도 명색이 에세이-레터인데 '에세이'부터 보여드리는 게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배치해 봤습니다. 어떠셨나요?
이제 '레터'의 차례입니다. 어쩌면 에세이보다 더 길지도 모르니 스크롤 내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시고요...
1화는 갭이어를 처음 결심한 날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 시리즈의 제목부터가 <나의 갭이어 일기>인 만큼 '갭이어(Gap Year)'라는 단어를 짚고 넘어가야겠죠.
어디 머나먼 외국의 학생들은 진로를 찾기 위해 학업을 쉬고 인턴쉽, 해외봉사, 배낭여행 등 다양한 경험을 하는 갭이어라는 걸 갖기도 한다더라, 하고 들어 본 적은 있지만 그게 제게도 적용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일단 저는 학생이 아니라 4년 차 직장인이었고, 학생이라고 해도 진로 고민을 1년씩이나 할 여유 따위 없이 수시 마감 전까지 어떻게든 진로(라는 이름의 학과)를 정해야만 했던 대한민국 사람인 데다, 그나마 합법(?)적으로 쉬는 게 가능했던 대학 시절에도 흔한 휴학 한 번 하지 않았거든요. 모든 학기를 끝낸 후 졸업을 1년 유예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휴식보다는 취업 준비의 시간이었고요.
이랬던 제가 '어쩌면 갭이어가 내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다'고 처음 생각한 건 2022년 8월. 책 <우리는 아직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김진영 저)>를 읽고 난 후였습니다.
그땐 아직 제 상태에 번아웃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전, 그러니까 무언가 자꾸 울컥울컥 올라오고는 있지만 그게 정확히 뭔지도 모르던 때였는데요. 한 서점에서 우연히 이 책을 봤는데 제목이 막 눈에 와서 박히더라고요. 직감적으로 이건 내게 필요한 거다 싶어 홀린 듯이 사 와서 읽어 보니, 정말 제가 막연히 바라던 것들이 이 책에 있었습니다.
이 책은 각자의 이유로 달리던 트랙에서 잠시 내려와 갭이어를 가진 여섯 팀의 인터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인터뷰를 엮어 낸 김진영 작가님 역시 번아웃과 갭이어를 경험하셨고요. 이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니 막막하던 제 마음속에도 갭이어라는 선택지가 어렴풋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꼭 외국의 어느 자유분방한 고등학생이 아니더라도 멀쩡하게 다니던 직장을 멈추고 쉴 수 있겠구나. 쉬어도 되는구나. 이렇게 살아도 되는구나.
일이 바빠서 책을 다 읽지 못한 채 잠시 덮어두었는데도 머릿속에는 '퇴사'와 '갭이어'라는 단어가 계속 맴돌았습니다. 그러니 결국 번아웃 증상을 깨달았을 때 그 두 가지를 결심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물론 퇴사를 질러놓고 다다음날 조금 정신이 들자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잠깐... 책 한 권에 내 인생을 너무 걸어 버린 거 아니야?'
왜 다들 퇴사는 아무렇게나 하는 게 아니라고 하잖아요. 이직도 퇴사도 일단은 회사에 다니면서 신중하게 준비하라고. 다음 스텝 없이 무작정 그만두지 말라고. 물론 그 말도 일리 있죠. 이상적인 방법인 것도 분명하고요. 하지만 이미 번아웃이 심했던 제게는 그런 앞뒤를 준비할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그냥 당장 쉬고 싶을 뿐인 제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그래도 제게 위안과 용기가 된 것은 적어도 이 세상에 나처럼 그냥 쉬기로 결정하고 일을 멈춘 사람이 최소 여섯 팀, 저자 김진영 님까지 포함하면 일곱 팀은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뿐인가요. 다른 책에서도 비슷한 케이스를 여럿 만날 수 있었고, 번아웃을 검색하다가 저와 똑같은 증상을 겪은 분이 쓴 블로그 글을 읽기도 했고요.
시야가 좁은 제 눈에 띈 것만 해도 이만큼인데 범위를 더 넓히면 이 지구촌 세상(!)엔 얼마나 더 많겠어요. 조금 우습긴 해도 제겐 이런 사례 하나하나가 정말 소중했습니다. 나처럼 '쉬고 싶어서 쉬는 사람'이 나 말고도 분명히 어딘가에 있다는 생각은 큰 힘이 되었거든요. 제게 이것들은 그냥 글 한 조각, 그냥 책 한 권이 아니라 모두 나와 같은 시기를 살고 있는 실제 사람들의 삶이었습니다.
하던 일을 멈추고 삶의 방향을 재조정하는 시기, 생산성은 없지만 오직 나를 위해 내 시간을 쓰며 회복하는 시기. 앞으로 이어질 이 글에서 '갭이어'는 이런 의미이며, 이는 전부 김진영 작가님의 책 <우리는 아직 무엇이든 될 수 있다>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힙니다.
이미 충분히 유명한 책이지만 혹시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꼭 한번 읽어보시길 적극 추천해요. 당장 갭이어가 필요하지 않더라도 내게 하나의 선택지를 열어 둘 수 있으니까요. 가끔은 그것만으로도 삶의 무게가 조금 덜어지는 것 같습니다.
기어코 에세이보다 레터가 길어졌습니다... 이 정도면 레터-에세이로 이름을 바꿔야 하지 않나 싶긴 한데 일단 모른척하고 밀고 나가 볼게요.
앞으로 제가 갭이어를 선택하기까지의 과정과, 실제로 보낸 여정, 그리고 갭이어를 어떻게 마무리했는지까지 시간순으로 되짚어보려고 합니다.
투박한 글일지라도 그저 제 감정과 이야기가 당시의 저와 같은 시기를 살고 있는 분들께 잘 전달되기만 한다면, 그래서 앞으로 남은 이야기들도 궁금해진다면 더 바랄 것 없는 시작이리라 생각해 봅니다.
그럼 이만 줄일게요.
따뜻하고 편안한 밤 보내세요.
설레는 첫 마음으로,
프랜 드림.
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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