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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e Apr 05. 2024

퐁피두센터, 미술관이야, 철학관이야?

  퐁피두센터는 현대미술관이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지나온 미술의 역사를 봤다면 퐁피두센터에서는 지금 쓰고 있는 미술의 역사를 볼 수 있다는 뜻이겠지. 기대가 컸다. 퐁피두센터는 골조만 세운 피라미드 모양의 건축물이다. 편견에서 비롯된 생각이지만 얼핏 미술관 건물 같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하이테크의 효시가 된, 예술적인 건축물이라 한다. 퐁피두센터가 있는 곳은 보부르 지역이다. 보부르는 파리에서 할렘가 같은 곳으로 통했는데. 퐁피두 센터가 들어서면서 깔끔하게 구역정리가 됐다고 한다. 그 얘길 들어서인지 퐁피두 근처에 몰려있는 예술가들은 왠지 배고픈 이들일 것 같았다. 신기한 것들을 직접 만들어 팔기도 하고 다양한 공연들도 곳곳에서 펼친다. 기분 탓인지 뭔가 핫한 느낌? 몽마르트르가 약간 올드한 느낌이라면 이곳은 굉장히 영한 느낌이 있었다. 퐁피두 센터에 들어가는 길은 그들 덕분에 예술의 길인 듯 느껴졌다.


  퐁피두센터엔 그림보다 사진이 더 많았다. 우리나라의 대기업 공장들을 찍은 사진들도 꽤 많았다. 물론 다른 나라의 산업현장을 찍은 사진들도 있었는데 예술적이기보다는 역사적 기록물 같은 느낌이었다. 영상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사실 처음엔 그것도 전시의 일부인지 몰랐다.  실시간으로 퐁피두센터 외곽 그냥 길바닥을 비추고 있는 CCTV를 예술이라 상정하고 전시를 하고 있는 게 맞는 걸까? 다른 의도가 있는 걸까? 다른 영상들도 있었는데 그 영상들도 지극히 현실적인 지금 모습 그 자체다. 또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영상 중에 누드모델이 작품처럼 전시관 가운데 서있고, 그걸 감상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찍은 영상도 있었다. 그 모델을 바라보는 이들은 사람이다 아니다 얘기 나누며 손가락으로 건드려보기도 하고 안보는 척 힐끔 거리기도 하면서 다양한 태도로 감상했다.


  아니, 흥미롭고 재미있긴 한데 이게 정말 미술관이 맞아? 오르세, 루브르와 같이 파리의 3대 미술관 중 하나라며. 루브르는 그 규모와 보유작품 자체로도 훌륭하고, 오르세 또한 미술사를 잘 모르는 내가 미술사에 대한 개념을 장착할 수 있을 정도의 훌륭한 전시를 하고 있는데, 대체 여긴 뭐지? 실험적이어서 유명한 건가? 영상 말고 구조물들도 설치되어 있었다. 그중 가장 시선을 끌었던 구조물은 창가에서 갈대처럼 흔들리고 있는 무언가였다. 해도 잘 들고, 바람도 잘 통하는 곳에 실리콘인지 플라스틱인지 모르겠지만, 넓은 평면에 삐죽삐죽하게, 마치 커다랗고 넓적한 빗을 놓아둔 것 같은 모습의 구조물이 있었다. 예쁘지도 멋있지도 않았고, 뾰족하고 가늘게 서있는 가느다란 빗가닥들이 넓은 공간을 차지하며 살랑거렸다. 햇살을 입었다 벗었다 하고 있었다. 멍하니 서서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깨닫게 된 것이 있다. 그림이라는 것은 예술가가 인간의 삶이나 자연의 어떤 모습을 보면서 받았던 영감이나 자신이 인상적인 장면들을 정지된 형태로 담아둔 것이라면, 이곳에서의 사진들이나 영상, 구조물 모든 것들은 그것을 누군가가 정형화하기 이전의 단계를 살려두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들은 예술가의 영감을 감상하는 대신 각자가 모두 예술가의 한 사람으로서 영감을 얻을 수 있도록 이런 식으로 배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과거에는 인간의 삶이 온통 자연 속에서 이루어졌지만, 지금의 삶은 실로 산업화되고 도시화된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밀레가 그린 농부들의 일상이나 자연의 한 장면을 포착한 것이나 산업현장에서 일하는 이들의 일상과 산업현장 그 자체가 작품의 대상이 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모네는 빛의 움직임을 담으려고 물감을 사용했지만, 이곳에서는 빛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담고, 그것들을 담아 언제든 볼 수 있게 하고 있는 것이다. 옛날의 그림들은 빛을 기다렸다가 그 순간을 담는 것이라면, 이제는 자연의 빛과 조명으로, 원하는 만큼의 빛을, 원하는 곳에, 원하는 방식으로 마음껏 활용한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느꼈던 것처럼 빛을 신으로 치환하여 생각해 본다면, 과거에는 원하는 것들을 신이 줄 때까지 기원하며 기다렸다면, 이 시대 사람들은 자신이 원할 때 원하는 방식으로 신에게서 뽑아낼 수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정말 그런가? 정말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다는 모르겠지만, 신에게 비는 기원의 내용이 달라진 측면이 있다는 점에 대해 생각해 보면 약간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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