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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e Mar 15. 2024

파리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화.룡.점.정.

차카게 살자

  파리에 1주일 이상 머물면서 여행을 한다면 나비고(NAVIGO)를 충전하는 것이 좋다. 선불교통카드인 셈인데 나비고는 구입한다면 파리의 대중교통을 편하게 이용할 수 있다. 구간과 기간을 정해서 판매하므로 용도에 맞게 구매하면 된다. 다만 나비고 일주일권은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한 달권은 1일부터 말일까지 유효하므로 일주일권은 월요일 가깝게, 한 달권은 1일 가깝게 구입하는 것이 유용하다. 만약 토요일에 나비고 일주일권을 충전한다면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밖에 못쓴다. 또 나비고를 구입하면 반드시 사진을 부착하여야 한다. 사진을 부착하지 않은 나비고를 사용하다가 검표원에게 걸리면 벌금을 내야 한다.


  내 나비고는 5존까지 이용할 수 있는 일주일권이었고, 월요일에 새로 충전을 하고서는 샤르트르로 향했다. 샤르트르는 5존을 넘어서는 구간에 있는 곳이어서 8.3유로를 더 내야 했다.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 검표원이 무서운 포스로 지나갔다. 지나가면서 딱 한 남자를 지목하며 다짜고짜 강력한 말투로 뭐라고 했다. 왜 저렇게 무례하게 하는 걸까 싶었지만 그 남자는 티켓이 없었던 모양이다. 지정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유석으로 앉아있는 건데 어떻게 딱 알았을까? 파리에는 무임승차 하는 사람이 많다고 들었는데 그 검표원은 그 남자 말고는 다른 사람을 지목하지는 않았다. 대체 뭘 보고 지목하는 걸까?

 

 샤르트르 역에는 사람이 없었다. 개찰구도 따로 없었고, 표를 확인하는 사람도 없었다. 10년 전엔 그랬는데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여행하기 전 봤던 어떤 가이드 책에서 읽은 구절이 떠올랐다. 파리에는 무임승차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한 번쯤은 해봐도 되지 않겠냐, 다만 검표원에게 걸린다면 자신은 책임이 없다는.... 난 파리로 돌아갈 때 딱 한 정거장만 넘어서면 5존에 진입하고, 5존에 진입하면 나의 나비고는 유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아주 달콤한 악마의 유혹이 솟아올랐다. 샤르트르는 워낙에 사람도 없어서 무인으로 역을 운영할 텐데, 굳이 그 구간에서 타는 사람을 잡으려고 검표원이 돌까?  


  한 정거장은 유난히 길었다. 무사히 5존 안으로 기차가 들어서는 순간, 솟구치던 아드레날린이 잠잠해졌다. 이게 바로 여행의 묘미지! 하며 나의 일탈을 합리화했지만, 생각만큼 재미는 없었다. 이런 무모한 일탈도 누군가와 함께 할 때 즐거운 거지, 혼자서는 그저 빠르게 차오르는 현타와 깊은 허무함만 남길뿐이다. 혹시 검표원에게 걸리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어. 책에서 특히 월요일엔 검표원들이 더 많다는 내용을 읽은 것도 뒤늦게 생각하며 맘을 쓸었다. 하지만 내 여행을 현타와 허무감으로 물들일 순 없으므로 억지로 새겼다. 그래도 여행 와서 객기 한 번 부려봤다, 하하하.


  파리시립대학으로 갔다. '파리의 학교 식당에선 과일이 무제한 무료다, 스테이크를 10유로대로 먹을 수 있다. 특히나 파리시립대학교는 국제학생증만 있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와보고 싶었고, 먹어보고 싶었다. 학교는 꽤 넓었다. 어디가 어딘지 몰라서 지나가는 학생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학교 체육관에서 운동하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한 시간 정도면 운동이 끝난다고 했다. 운동 끝나면 자기도 밥을 먹을 거라고 했다. 학교 식당 말고 다른 곳을 구경할 계획은 없냐고 물었다. 식당까지 데려다준 그에게 인사했다."고마워, 잘 가." 기다린다고 할 걸, 같이 밥 먹고 학교 구경도 시켜달라고 할걸...


학교사이트에서 이미지 퍼옴

  학교 식당은 꽤 컸다. 입구에 메뉴와 가격이 꽤 큰 글씨로 쓰여있었다. 8유로, 10유로, 12유로짜리 세 가지 메뉴가 있었는데 나는 12유로짜리 스테이크를 골랐다. 사람들은 접시를 들고서 자신이 먹고 싶은 메뉴에 가서 줄을 서면 그 접시에 이것저것 담아줬다. 그런데 카운터가 보이지 않았다. 음식을 받는 곳에서도, 접시를 가져가는 곳에서도 돈을 내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을 따라 나도 접시를 들고 스테이크 라인에 섰다. 내 차례가 될 때까지 계속 온 사방을 둘러보며 사람들이 어디서 어떻게 계산하는지 알아내려고 애썼다. 다른 건 잘도 물어보면서 그건 왜 물어볼 생각을 못했던 걸까?


관련 이미지 퍼옴

  나가는 문 입구에 식기를 반납하는 곳이 있었다. 거기에도 사람이 있었다. 저기서 계산을 하는 건가? 먹고 나서 계산하면 뭘 먹었는지 어떻게 알지? 아 접시에 묻은 소스 같은 걸 보면 알 수 있나 보다. 나는 아주 손쉽게 내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는 자리를 잡았다. 음식의 맛은 대단하지 않았지만, 이것저것 정말 푸짐하게 줬다. 과일을 마음껏 따로 먹을 수 있는 곳은 없었지만 사이드 메뉴들을 마음대로 고르면 원하는 만큼 담아주긴 했다. 거기서 비트를 처음 먹어봤다. 나는 너무 예쁜 색깔이 신기했고, 그걸 담아주시던 분은 그걸 모르는 나를 너무 신기해했다. "너네 나라에서는 이걸 안 먹니?"


  거의 다 먹을 때까지도 나는 카운터를 찾지 못했다. 식기를 반납하면서도 돈 내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대체 이 식당은 어떻게 돈을 받는 거지? 밖에서 계산을 하고 왔어야 하나? 머릿속엔 온통 밥값을 어떻게 계산해야 할지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누군가 물을 가져오길래 나도 따라서 물을 가져왔다. 가지고 테이블로 오면서 나는 얼어붙었다. 내가 앉은자리 바로 뒤쪽에 카운터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다들 거기서 계산부터 하고 접시를 가지러 갔다. 왜 저걸 못 봤지? 왜 당당히 밥부터 먹은 거지? 어떻게 해야 하지? 어설프게 계산하겠다고 나셨다가 시비에 휘말리면 어떡하지?  


  입구를 기준으로 보면 사실 제일 잘 보일 위치에 계산하는 곳이 있다. 식당 가운데 커다랗게 뷔페처럼 음식들이 차려진 바들이 사각으로 있는데 그 한쪽면이 카운터고, 나머지 세 면이 세 가지 메뉴에 맞는 음식들을 가져갈 수 있는 식으로 세팅이 되어 있었다. 들어오면서 내가 입구에 붙어있는 메뉴판에 너무 꽂혀서 카운터를 못 본 상태로 사각지대까지 걸어와 버려서 접시를 들고 첫 번째, 두 번째 코너를 돌아 세 번째 코너에서 음식을 받아 네 번째 코너를 등지고 앉아 밥을 먹는 바람에 카운터를 못 본 거다. 완벽해도 이렇게 완벽하게 못 볼 수 있는 건가. 이 정도면 오늘은 뭔가 객기데이?


  그렇다면 식기 반납만 잘해볼까? 싶은 못된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나는 대신 나가서 커피를 너네 학교에서 사 먹을게. 그냥 오늘은 무임승차에 무전취식까지 완성해 볼래. 한 번 저질러 본 덕분인지 두 번째 범죄는 덜 떨렸다. 나갈 때까지 계산원과 눈은 마주치지 말자. 내 시선이 요동치면 나도 감당 못할 것 같으니까. 나는 범죄를 저지르는 뒷모습을 내 보이면서도 무사히 식기를 반납하고 식당을 나왔다. 오늘 내내 이어지는 승리감에 난 제대로 취했지만 함께 나눌 사람이 없다는 게 아쉬웠다. 이제 몽파르나스 타워에 가서 파리의 아름다운 야경으로 완벽하게 마무리 하자. 화.룡.점.정.

이미지 퍼옴(오마이뉴스)

  몽파르나스 역은 사람이 정말 많았다. 퇴근시간이어서 그런지 유난히도 많았다. 역도 엄청 크지만 사람도 너무 많아서 서로 팔을 스치며 지나갈 정도였다. 내 팔을 스치던 체격이 큰 한 여자가 갑자기 헤이! 하며 나를 툭툭 쳤다. 파란색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파리에서 유니폼을 입고 삥 뜯는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는 글을 읽은 게 생각났다. 나는 "NO french"를 외치며 당당히 가던 길을 갔다. 따라오며 나를 거칠게 부른다. '네 말 못 알아들어. 난 여행객이야. 몰라' 영어로 말하면서 무시하고 지나치려고 했는데 갑자기 그 여자가 나를 세게 확 잡으며 낚아챘다. "티께!" 자기 손에 든 파일을 툭툭 쳤다.


  앗! 검표원인가? 왜 나를 잡는 거야. 동양인 무시하나? 인종차별인가? 나는 '차암나' 하는 표정으로 여유 부리며 "나비고"라고 말했다. 여자는 손바닥을 펼치며 내놓으라고 했다. 나는 귀찮다는 듯이 가방을 열고 그 안에 지갑을 열어서 나비고를 꺼냈다. 그리고 손으로 오늘 충천한 날짜를 가리키며 당당히 말했다. "이씨."(여기) 여자는 갑자기 손에 든 파일을 열고 펜으로 뭐라고 쓰면서 돈을 내라고 했다. 아니 왜?? 사진을 붙이는 자리를 손으로 톡톡 가리켰다. 앗! 증명사진을 챙겨만 놓고, 붙이질 않았다. 깜짝 놀라서 "데, 데, 데졸레." 사진을 꺼내 보여주면서 지금 당장 붙이겠다고 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화가 잔뜩 난 여자는 손에 든 파일을 열어 보여줬다. 표에 항목별로 뭐라고 쓰여있고, 금액들이 쭉 쓰여 있었다. 맞는 항목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는데 그 여자는 맨 아래쪽 33유로라고 쓰여있는 부분을 가리키며 내라고 했다. 심장이 너무 쿵쾅거렸다. 소매치기가 워낙 많은 곳이라 하루 일정에 맞는 돈에 비상금 30유로 정도만 더 챙겨 가지고 다녔는데 33유로를 내고 나면 몽파르나스 타워에 못 갈지도 모른다. 돈이  없다고 했다. 그 여자는 다짜고짜 그냥 내라고 했다.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 멍하게 있으니 그 여자는 돈이 없다면 스티커를 발행하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다. 안 내고 한국 가버리면 그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만약 자신이 스티커를 발행하면 나는 그걸 들고 어딘가를 가서 벌금을 내야 하고, 그걸 제 때 내지 않으면 더 많은 돈을 내게 될 수 있고, 그걸 내지 않으면 비행기를 탈 수도 없어서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다고 말했다. 내 생각을 읽고 있니? "33유로 때문에 너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될 수도 있어. 정말 스티커를 발행하길 원하니?" 하... 갑자기 쭈굴 모드로 미안하다고 아무리 말해도 먹히지 않았다. 사진을 아무리 들이밀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어쩌면 난 괘씸죄를 적용받아 최고벌금을 내야 하는 상황인 것 같기도 했다. 지갑을 뒤졌다. 기차티켓 8유로와 밥값 12유로에, 13유로를 합쳐서 33유로를 냈다.



  몽파르나스 타워 60층 꼭대기 스카이라운지에서는 파리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에펠탑과 그 아래로 낮게 펼쳐지며 깔린 야경은 고요하고 아름답다. 7시 이후 매 정시마다 에펠탑이 반짝이는데 그때마다 커플들은 탄성을 지르며 키스를 나누기도 한다. 그 광경을 세 번이나 보면서 나는 내내 오늘 하루를 생각했다. 이거야 말로 운수 좋은 날인가? 피식피식 웃음이 나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했다. 나쁜 짓을 하면서 자꾸 나쁜 생각을 하고, 오만불손한 태도로 건방져지는 내 모습들이 낱낱이 떠올랐다. 기대했던 마무리는 이게 아니었지만, 어떻게 보면 정말 아름다운 밤이다. 다시는 객기 부리지 말아야지.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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