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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e Mar 23. 2024

오르세 미술관에서 미술사의 흐름에 눈뜨다

  파리는 정말 말 그래도 예술적인 곳이다. 많은 예술작품들이 살아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예술가들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퐁네프 다리를 건너며 생각 없이 들이마신 숨에 몇 백 년 전 예술가들이 내뿜은 날숨이 섞여 들어온 것 같은 환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이런 곳에 살면 예술가가 되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이러니 예술가들이 몰려들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나는 그들의 작품들을 열심히 보러 다녔다. 파리에 있는 수많은 미술관들을 도장 찍기라도 하듯 돌아다녔던 것 같다. 다니면서 참 많은 것들에 깜짝깜짝 놀래며 문화 충격을 받기도 했다. 


  파리의 미술관은 매우 동적인 곳이었다. 유치원에서 단체관람을 온 아이들을 봤는데 미술관 안에서 선생님과 함께 노래 부르며 율동을 하더니, 숨바꼭질하듯이 작품을 찾으러 다니며  뛰어다니면서 까르르 웃고, 와르르 몰려갔다가 와르르 도망 다니며 신나게 작품을 감상했다. 처음엔 저게 무슨 짓이야 싶었는데 생각이 달라졌다. 어릴 때부터 이렇게 미술관을 접하면 어른이 돼도 미술관은 즐겁고 재미있는 곳일 수 있겠구나 싶었다. 우리는 교육과정에서 교양을 쌓고 감성을 기르며 작품감상의 즐거움을 배우는 과정은 생략하고 성숙한 태도만을 가르치니 재미가 없을 수밖에.


  그리고 파리의 미술관에는 곳곳에 이젤을 세워두고 그림을 카피하고 있는 미술학도들이 많았다. 처음엔 여기 전세라도 냈나 싶었는데 눈빛이 너무 활활 타오르는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그 생각도 쏙 들어갔다. 그리고 그 작품을 감상하는 것 못지않게 그걸 따라 그리고 있는 이들을 함께 감상하는 것 또한 즐거운 감상 포인트가 되었다.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즐거웠지만, 남의 작품을 따라 그리는 것 또한 영혼을 불태우는 작업이고, 따라 그리는 것이 예술이 아닌 것도 아니고, 창작이 아니라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파리의 모든 미술관의 모든 작품들은 너무도 잘 관리되고 있었다. 파리의 기메박물관에는 동양이나 아프리카에서 약탈해 온 문화재들을 전시하고 있다. 너무 커서 우리나라관만 돌아봤는데, 거기엔 온갖 것들이 다 있었다. 우리나라 사찰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하디 흔한 탱화부터 우리나라에는 없는 김홍도가 그린 8쪽 병풍들도 거기에는 있었다. 우리나라 문화재를 빼앗아 갔다는 것에 일차적으로 화가 났다가, 그걸 우리나라에서 관리하는 것보다 더 철저히 잘 관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 또 화가 났다. 입장료도 받지 않는 동네의 작은 미술관에 가보아도 적지 않은 인력들이 배치되어 철저히 관리를 하고 있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포인트는 바로 그들의 큐레이팅 능력이다. 프랑스어도 영어도 쉽지 않은 나는 그림 앞에 붙어있는 작품의 해설이나 설명들을 스킵하는 경우가 많다. 전체 전시의도나 의미들도 찾아 읽어보지 않는 편이다. 쉽게 말하자면 그저 화살표 따라 쭉 걸어 다니며 작품을 관람하고 감상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렇게만 해도 놀라운 영감을 얻게 되거나,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전시를 정교하게 기획하고, 적절하게 구성하고 배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파리의 다른 것보다도 질투 나고 부러운 것이 바로 그 부분이다. 


  오르셰 미술관에서 갔다. 그곳에서 내 눈으로 꼭 보고 싶었던 작품은 밀레의 '만종' 딱 하나였다, 그 작품은 부부가 감자가 든 바구니를 앞에 두고 감사기도를 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그런데 살바도르 달리는 그 작품을 보며 바구니 안에 관이 들어있는 무서운 그림이라 말해서 밀레를 모욕하는 미친놈 취급을 당했다. 하지만 훗날 자외선으로 그림을 투영하다가 밀레가 처음에 관을 그렸었다가 감자로 고쳐 그렸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미술계가 발칵 뒤집혔다는 거다. 그래서 나는 그 그림을 내 눈으로 꼭 보고 싶었다. 도대체 실제로 보면 어떤 느낌이 들까. 정말 무시무시하고 슬픈 느낌이 들까?


  오르셰 미술관의 입구에 들어서면 밀레 그림이 시작이다. 많은 작품들이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데 만종이 보이지 않았다. 밀레의 작품들이 지나고 다른 작품들을 한참 더 지나가도 만종은 없었다. 처음보다 더 처음에 걸려있어서 혹시 못 보고 지나친 건가 싶어 되돌아가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안내데스크에 갔다. "실례합니다. 뭐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밀레의 만종이 보고 싶은데, 찾을 수가 없어요.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세요." "지금은 일본에 있어요." "네? 저는 그걸 보러 한국에서 왔는대요." "그렇다면 당신은 일본으로 갔어야 합니다." ㅜㅜ



  만종에 미련을 버리고 거기에 있는 작품들을 열심히 봤다. 미술교과서에서 배운 작품들이 많아서 재미있았다. 아니 내가 아는 작품들은 거의 다 있었다는 것이 더 맞는 말 같다. 3층까지 이어지는 작품들을 차례차례 따라가며 천천히 들여다봤다. 중학교 1학년 때 미술선생님께서 들려주셨던 재미있는 이야기들도 떠올리며 혼자 히죽히죽 거리기도 했다. 작가나 화풍이 바뀔 때마다 '아~ 이즈음에서 저런 화풍이 싫어졌다고 했지? 저 사람은 이랬다고 했지? 맞아. 저렇게 그려서 엄청 이단아 취급받으며 욕먹었다고 했어.'라고 혼잣말을 떠올리며 즐겁게 감상을 이어갔다. 


  그러다 문득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실주의 작가인 밀레부터 시작하는 이 전시는 미술사의 역사대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깨달은 것이 있다. 화풍의 변화는 빛에 대한 인간의 인식이 변화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주의 작품들은 빛에 대해 무언가를 많이 알고 있다는 느낌이라기보다는 그저 피사체를 보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 정도로 여겨지지만 그 빛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 피사체의 밝기가 달라지기도 하고, 나중엔 색 자체를 다르게 인식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중엔 그 빛을 픽셀 단위로 이해하게 되기도 하고, 움직이는 빛을 담으려 하기도 했다. 


  현대 미술관인 퐁피두 센터로 넘어가면 사진은 물론 동영상이나 심지어 CCTV도 전시되어 있다. 나를 찍고 있는 CCTV를 내가 보는 상황에서는 이게 미술이 맞나? 싶기도 하다. 어딘가 구석에는 실리콘 갈대 같은 것을 세워놓은 조형물도 있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빛에 따라 음영을 만들어내며 바람에 흔들리도록 내버려 둔 그 작품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싶어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소름이 돋았다. 지금의 인간은 빛을 자기 작품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개입시키고 컨트롤하는 범위 안으로 가져왔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실로 지금은 인간이 신을 내 손바닥에 올려두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측면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무엇을 보는가는 어떻게 인식하는가와 떨어져 있을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정말 미술사의 흐름이 내 생각 같은 지는 알 수 없다. 나는 미술학도도 아니고 미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예술적 깊이도 없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미술관에 걸린 작품들만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건 그 전시 자체가 아주 정교하게 기획된 것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물론 내 생각이 진실과는 동떨어진 것이라 하더라도 그런 영감을 받았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큰 의미가 있다. 

이전 14화 파리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화.룡.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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