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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Sep 04. 2017

빅톨 위고의 생가

프랑스 파리 여행 에세이-

‘장 발장(Jean Valjean)’이란 이름은 초등학교 5학년때 처음 들었다. 당시 키가 크고 호리호리하셨던 우리 담임 선생님은 말재주가 좋으신 분이셨다. 그렇지만 학교수업이란게 대개 그렇듯이 의자에 앉아만 있으면 지루해지고 하품을 계속하고 몸을 비틀어대는  꼬맹이들이었다. 이런 모습을 눈치채셨는지 선생님은 새로운 아이디어로 하루에 한번 수업 끝나기 5분전에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일일 연속극처럼 일화들을 하나 하나 연결시키면서 들려주신 여러 고전중에 하나가 이 ‘장 발장’ 이야기였다. 그땐 ‘장발-장’의 이미지는 글자 그대로 머리를 길게 기른 장씨 성을 가진 또 장발의 외국인이었다. 까마득한 시절인데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걸보면 얼마나 재미있게 그 이야기를 들었는지 알수있다. 그러나 선생님이 들려주신 이 ‘장 발장’이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이란 건 한참 세월이 흐른 후 고등학교 시절이었고 영국에서 대학다니면서 비교문학 수업중에 난생 처음으로 이 책을 다 읽었다. 이 유명한 필독서를 뗀건 아주 늦은 시기였던 것이다. 그 뒤로 런던의 웨스트엔드에서 인기 최고의 ‘레 미제라블’ 뮤지컬도 봤고 2012년 개봉한 톰 후퍼 감독의 ‘레 미제라블’ 영화도 봤다. 그리고 영화본 후에 다시 오래된 영역본 ‘레 미제라블’을 아마존 킨들에서 무료로 다운로드 받아서 읽었다.



그러나,...



초등학교 5학년 담임 선생님의 스토리 텔링과 그  효과로 인한 영향이 내겐 가장 영향을 주었다. 어린이용으로 축약한, 지금 생각해 보면 군데 군데 원작과 많이 틀리는 이야기였지만 재미와 함께 묻어 나오는 가난과 약자의 고통, 정의와 불의를 다같이 보여주는 일화들 그리고 이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영웅적인 ‘장 발장’의 소소한 기억은 직접적인 책읽기보다도, 음악을 아우런 뮤지컬보다도, 5감각을 다 이용하는 후퍼 감독의 영화연출보다도 더 나았다. 특히 장 발장이 조카들의 배고픔을 달래려고 빵을 훔쳐야만 했던 부분, 감옥에서 탈출 한 뒤 성당에서 신부가 준 음식을 거나히 먹은 뒤에 그 은혜는 뒤로하고 은촛대들과 다른 식기들을 자루에 담아 훔친 배은망덕한 ‘장 발장’(사실은 성당이 아닌 주교관이었고 신부가 아닌 미리엘 주교 Bishop Myriel였다), 그리고 경찰에 붙잡힌 ‘장 발장’과 훔친 자루속 물건들을 내보이자 그 앞에서 신부는 자기가 준것이라 거짓말하는 감동적인 장면은 선생님의 스토리텔링이 이 극적인 장면과 반전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처음으로 어쩔수 없는 ‘배은망덕’의 진실과 또 거짓말이라고 다 나쁜게 아님을 그때 깨달았다. 초등생 5학년의 윤리관은 이 이야기로 그때 양성되었다.



파리의 빅톨 위고의 옛집을 방문하면서 ‘장 발장’ 얘기를 해주신 이 초등학교 5학년 담임 선생님 기억이 많이 났다. 지금도 살아 계실까? 살아 계신다면 연세도 많이 드셨을 것이다. 이 ‘레 미제라블’을 쓴 빅톨 위고의 생가는 파리의 Place des Vosges (당시 이름은 Place Royale)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의 다른 소설인 ‘노트르담의 꼽추’의 무대인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그곳은 그리 멀지 않았다. 여기에서 1832부터 1848년까지 살았다고 하니 약 16년을 살았던 곳이다. 하지만 정치적 이유로 벨기에 브뤼셀로 또 영국령인 건지 섬(Guernsey. 저지 섬 옆의 섬. 다같이 Channel Islands라고 한다.)의 오트빌 하우스(Hauteville House)라 이름 붙여진 집에 오랫동안 살았고 지금은 이곳 파리의 집처럼 작가의 박물관이 되었다. 그는 이곳 파리의 집에서 ‘레 미제라블’을 집필했다. 선생님이 들려주신 ‘장 발장’이 탄생한 곳인 것이다. 이집에서 그는 동시대 프랑스 문인들인 시인 알프레드 드  비니(Alfred de Vigny), 알렉산더 듀마(Alexandre Dumas) 등도 초대해 담소했다고 한다.



그는 이 건물 2층에 그의 부인인 아델(Adèle)과 같이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어릴적 소꿉친구였던 그녀는 위고의 친구와 바람을 피웠고 뒤에 위고는 배우였던 줄리엣과 사랑에 빠졌고 공개적이었다. 영국령인 건지 섬에서 귀양중일 땐 그의 집인 오트빌 하우스(Hauteville House)에서 멀지 않은 곳에 줄리엣의 집을 얻어주어 살게 했다고 한다. 비록 혼외 관계를 유지하였지만 그들은 줄리엣이 1883년 죽을 때까지 함께 한 사랑이었다고 전한다.



하여튼, 파리의 이 집은 그의 친구 작가 폴 모리스(Paul Meurice)가 파리 시 당국에 많은 기부를 해서 이 집을 구매할수 있었고 이곳을 작가의 박물관으로 일반에 공개했다. 2층에 오픈된 이 집은 빅톨 위고의 삶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전시해 놓고 있었다. 즉, 그가 귀양가기 전, 귀양 중, 그리고 귀양 후로 구분해 전시하였다. 빅톨 위고는 재주도 많아 소설과 시 그리고 극작뿐아니라 그림에도 소질을 보였고 몇 작품은 이곳에 전시해 놓고 있었으며 가구 디자인도 취미로 하여 많은 가구는 직접 제작한 것이라고 하였다.



첫번 방은 그의 나폴레옹 군대의 장군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스페인의 사라고사에 살았던 당시의 유품들을 전시하였고 그가 존경한 연배인 스페인 화가 고야에 대한 설명도 해놓았다. 만약에 그가 고야의 유명한 그림들, 특히 나폴레옹 군대가 스페인인에 저지른 끔직한 장면의 그림들을 봤다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의문이 들었다. 다음은 커튼이 휘황찬 붉은 방이었고 이름도 그대로 붉은 방이라 했다. 이곳에서 창밖으로 사각형 건물안의 사각형 실내 정원을 볼 수 있었다. 그 다음이 재미있는 중국방이었다. 동양의 신비에 매혹됐는지 온통 중국풍의 유품들이 거기에 있었고 중국 자기들을 벽에 붙여 전시해 놓고선 방문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그가 직접 제작한 목판화같은 것도 있었다. 아마 이 방은 빅톨 위고의 옛집에서 가장 인기있는 방일 것이다. 그 다음 방은 중앙에 식탁이 놓여진, 그래서 아마 다이닝 룸같은 곳이 나타났다. 테이블 위에 ‘레 미제라블’에 나오는 어린 코젯(Cosette)이 물동이를 나르는 조그만 조각이 앙증스레 놓여있었다. 그리고 일반에  공개된 맨 마지막 방은 그의 침실이었다. 그는 여기 이 침대에서 1885년 숨을 거두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 방에서 죽은 건 아니었다. 귀양 후에 산 파리의 다른 집에서 그는 숨을 거두었고 이 방은 그가 귀양 중일땐 다른 용도로 쓰였는지 박물관으로 개조시 이 방을 그의 침실로 죽었을 당시와 똑같이 재현해 놓았다고 했다. 침대도 침실도 그렇게 요란하거나 화려하지도 않았다. 붉은기가 있어 혹시 중국 사람들처럼 빅톨 위고가 붉은 색을 좋아했던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빅톨 위고는 물론 거기에 없었고 물어 볼수도 없다. 또다른 침대인 센느 강 건너 판데옹에서 그는 영원한 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은 끊임없이 이야기되고 또 새롭게 해석되어 전세계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보여지고 또 들려지고 있을 것이다. 책으로, 뮤지컬로, 또 영화로 말이다. 그래서 그가 창조한 작품속의 인물은 현재진행형으로 살아있는 것이고 비록  원작자는 이 침대를 떠났지만 그의 인물들은 독자들의 머리속에 살아 꿈틀대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소설가 아모스 오즈의 말이 떠올랐다. 정치적 부침이 많은 예루살렘에서 태어나고 산, 그래서 서로 죽고 죽이는 정치적 부침을 경험한 오즈는 자신이 책이 되길 원한다고 고백했다. 왜냐하면, 한권의 책은 누가 불태우더라도 그 책의 또다른  ‘카피’는 어딘가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빅톨 위고의 침실에서 오즈의 말에 동감했다. 거기에 보태 나의 기억속에 아직도 살아 있는 ‘장 발장’은 책이 아니더라도 ‘구전’처럼 담임 선생님이 해주신 이야기때문이었다. 선생님을 직접 만날 수 없지만 속으로 감사의 말씀드렸다.

https://brunch.co.kr/@london/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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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톨 위고 생가의 입구. 2층 생가 입장은 무료이다. 그러나 표를 받아야하고 특히 1층 특별전시 입장은 표를 사야 입장할 수 있다.  

생가인 2층으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 벽에는 관계된 사진들이 걸려있었다.

빅톨 위고가 사랑한 중국방. 벽에 그가 수집한 도자기들을 전시해 놓았고 다른 벽들엔 중국과 관련된 그의 유품들을 전시해 놓고 있었다. 심지어 그가 직접 만든 것도 있었다.

중국방의 일부. 천장에 매달린 중국식 등이 보인다.

중국방의 일부. 사자 두마리 조각이 천장쪽에 있다. 채두변발한 청나라 남자가 왼쪽, 그의 부인인듯한 여인이 오른쪽에 있다. 당시는 중국과 일본에 대한 관심이 유럽에 많았고 그 흔적도 많이 남아있다. 런던에서 가까운 브라이튼 시에도 '브라이튼 파빌리온'이 이 도시의 거의 상징처럼 되었으며  겉은 인도식 내부는 중국식 인테리어로 장식했다.

빅톨 위고의 초상

빅톨 위고의 침실과 침대. 이 침대에서 그는 저 세상으로 갔다. 그러나 이 방에서 죽은 건 아니었다.  귀양살이 후 산 파리의 다른 집에서 죽었다.

'레 미제라블'의 어린 코젯(Cosette)이 힘겹게 무거운 통을 나르고 있는 조각이 그의 식탁위에 있었다.

빅톨 위고의 생가 방에서 내려다본 사각형 건물(quadrangle) 빌딩의 내부 공원.

생가를 나오면 바로 오른쪽 벽에 그려진 그라피티. 꼭 코젯 얼굴 같다.

생가를 나오면 보이는 광장쪽  회랑.

도로 표지판. 가끔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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