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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Sep 02. 2017

하루키의 고양이

런던 에세이-'난 냉정한 사람일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고양이를 매우 좋아한다. 그래서 그의 많은 소설엔 고양이가 중요한 모티브나 상징으로 등장한다. 심지어 그는 고양이에 관한 글도 썼고 또 골수 독자와의 대화에 고양이도 엄연한 주제로 나왔다. 동물좋아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없다는 말처럼(영국 문화에서 더 잘 통한다), 가끔 이 말에 양심이 꾹꾹 찔리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난 동물을(애완용이든 동물원 동물이든) 좋아 한다고까지 할수는 없다. 그렇다고 싫어하는 건 또 절대 아니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집안에 들이는 건 싫다는 것이다. 즉, 그들과 같이 살수는 분명히 없다.



‘만약에 그런일이 벌어지면, 하루 살고 난 뒤 곧 이혼장을 내밀것이다.’



하루키의 소설 ‘해변의 카프카(Kafka on the Shore)’ 홀수 장에 나오는 인물, 겨우 15살 생일에 자유를 찾아 용감히 가출한 ‘카프카 타무라’는 지나다 고양이를 보면 다가가 쓰다듬지 않고는 못배기는 성격이다. 같은 분량으로 짝수 장에 나오는 또다른 주인공인 ‘나카타’ 노인도 마찬가지다. 그는 2차대전 막바지 설명안되는 신비한 사고로 정상적인 생활이 어렵고 글을 잃지도 쓰지도 못한다. 즉 소통이 안된다. 인간들과 소통이 어려운 그가 고양이들과는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아주는 일을 자주 한다. 고양이에게 이름도 지어준다. ‘미미’라 불리는 시아미즈(Siamese) 고양이와 나누는 그의 대화를 보면 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푸치니의 오페라까지 인용하기 때문이고 미미의 이름은 그의 오페라 '라 보엠'에서 왔다. 고양이와 오페라? 하루키는 그렇게 상상력도 좋다.



하루키가 쓴 시기상으로 앞인 소설, ‘태엽감는 새(The Wind-Up Bird Chronicle: 일본어와 영역본엔 연대기란 말이 붙어 나오는데 한국어 판에는 없다?)’에 나오는 ‘토루 오카다’는 전화상으로 ‘명령조' 말투로 하는 보시(bossy)성격의 아내 쿠미코와의 통화 뒤에 그들의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아 집밖으로 나선다. 고양이의 이름은 처남의 이름을 갖다 붙였다. 고양이를 찾다가 당돌한 16살 소녀를 만나고 또 어느 빈집의 우물도 발견한다. 이 잃어버린 고양이는 후에 아내 쿠미코의 사라짐의 전조(Omen)이다. 쿠미코가 토루에게 고양이를 좋아하느냐고 묻자 토루는 '크레이지'라고 대답한다.



하루키가 좋아하는 고양이와 같은 반려동물들은  인간에게 특별한 존재이다. 서양미술에서도 이들은 자주 등장한다. 여러 상징을 가지지만 보통 개는 충성을 고양이는 영리함과 민첩함 그리고 속임수를 뜻했다.



옆집 고양이가 가끔씩 찾아온다. 주인이 어디갔는지 찾아와서 우리집 유리문앞에 죽치고 앉아 있다. 문 열어달라는 표정과 눈치를 장사포 쏘듯 계속 내게 쏘아대면서 말이다. ‘넌 그렇게 냉정해’하고 쏘아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문열어 들여보낼수는 없다. 난 ‘카프카 타무라’처럼 고양이 등을 쓰다듬어 주지도 ‘나카타'노인처럼 이들과 소통도  안된다. 그저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손짓과 눈짓으로 인사하는 사이가 전부이다. 거리를 두기위한 나의 전략이다. 가끔 마음이 약해져 문을 열어줄까, 무슨 음식이라도 내다 줄까 하다가도 내가 냉정한 건지 한번도 그런 일은 없었다.



그러다가 한번은 영국 신부님이 우리집을  방문하셨다. 바로 그 고양이가 밖에서 문열어 달라는 그 자세 그대로 야옹하자 (나는 아랑곳없이) 신부님은 당연지사 유리문을 활짝 열어 고양이를 품에 번쩍 안았다. 한참 후에 품을 떠난 고양이는 온 집안 구석구석을 부동산 소개소  직원과 함께 집보러 온 사람처럼 훑어 보고 만져보고 냄새맡으며 활보했다. 내 허락도 없이 침대에도 올라가 누워보고, 부엌 쓰레기통 냄새도 킁킁 맡아보았으며, 다용도실 문도 열어 달라고 야옹했다. 못들은 척하자 자기가 무슨 패션 모델이냥 엘레강트하게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유유히 걸어와선 다시 얌전히 소파앞에 엎드렸다. 하긴 붙임성 많고 사회성 좋으며 애교만점인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하루키를 충분히 이해하고 그가 창조한 인물들과 동감한다. 그러나, 신부님이 가시고 난 뒤에 고양이를 당장 내쫓았다. ‘후여 후여…’ 새타령 노래가 절로 흘러 나왔다. 그리고 평소 게을러 잘 사용않는 진공청소기 전기코드를 당장 연결해 두드륵 두르륵 구석구석 이리저리 혹시 한올이라도 빠졌을지 모를 고양이 털을 흰색이든 브라운색이든 상관없이 죄다 진공기로 아낌없이 빨아들였다. 아직 깨끗해 보이는 침대보는 한치의 망설임없이 세탁기에 던져 넣었다. 난 애완동물 차별자일까? 아님, 강박증이 있는 것일까? 그것도 아님, 동물털 알레르기?



‘다 아니다.’



다음날에 또 그 놈(sorry)의 고양이가 유리문 앞에 나타났다. 어제 방문한 영국 신부님을 슬쩍 원망하면서도, 고민이 되었다… 하루키 소설이 사람 망치는구나 생각했다. 커튼을 냉정하게 내려버릴까? 책보는 척하며 눈맞춤을 피할까? 난 냉정해지고 싶지도 않고 손님이 찾아오면 항상 반기는 사람이라 자부한다.



‘그러나…’



이런 내 마음을 꿰뚫듯이 이 고양이는 더욱 간절한 자세로 유리문 바로 앞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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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이런 다소곳한 자세다. 야옹 소리도 않는다. 자세로 사람을 움직이려 한다.

약간 실망의 표정을 띈다. 이것도 책략이다. '문 안열면 가버릴꺼야'하는 협박도 조금은 들어있다.

이 표정과 자세는 그래도 문열기를 끈기있게 기다려 보겠다는 '의지'의 표정과 자세이다. 그만큼 들어오고 싶다는 것을 표현한다. (비도 안오고 눈도 안오는 화창한 날씨에 왜 들어오려 할까?) 나카다 노인처럼 소통이 가능하다면 '날씨 좋은데 정원에서 뒹굴며 놀아!'라고 얘기해 주고 싶다.

가끔 지루하면 이렇게 스트르칭도 하고 몸단장도 한다. 문제는 안되지만 남의 집앞에서?

이제 최후의 수단을 강구한다. '갈테면 가라'하지만 혹시나 싶어 마음 바꾸길 애원하는 표정이다.

참다가 참다가 안되면 화난 표정을 짓는다. 이럴땐 모르는 척하는게 상책이다.

가끔은 숨어서 동태를 살피기도 하고 또 숨바꼭질하자는 뜻도 된다.

소릴 지르면 안 그런척 하면서 기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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