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문학 챌린지 - 7화
(기존에 지은 글을 삽화와 함께 브런치북으로 옮겼습니다)
한 남자가 병원에 들어섰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야.
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으로 올라갔다. 한 층씩 내려오면서 병실을 하나하나 살폈다.
간호사들이 벌써부터 그를 알아보고 수군거렸다. 저 사람이 그 미친 사람인가 봐. 병원이란 병원을 모조리 뒤지고 다닌다던.
누군가의 신고를 받고 경찰이 출동했다. 저기예요. 간호사들이 두 명의 경찰을 대동하고 남자를 잡으러 병원 복도를 뛰었다. 환자들은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병실 밖으로 목을 빠끔히 내밀었다. 결국 한 병실에서 남자는 체포되었다.
그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바닷가 마을로 오는 버스 안에서였다. 이름 없는 바닷가 마을이라 그런지 여름인데도 손님은 그녀와 그 둘 뿐이었다. 젊은 두 남녀가 서로를 확인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둘은 멀찌감치 떨어진 자리에서 서로를 의식했다. 그러나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히기에 버스 안에서의 시간은 너무 짧았다.
그들은 아무 말없이 정류장에 도착했다. 아담한 간이정류장 옆에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있었다. 뒤로는 해변이 보였다. 그는 해변을 향해 걸었다. 그녀가 따라오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고개를 돌릴 용기가 없었다. 다행히도 두 사람은 목적지가 같았다. 그들은 해변에 나란히 앉아 한동안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가 넓은 마음으로 그들을 끌어안으리라 기대하면서. 그러나 바다는 저 혼자 살기 바빠 그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였다.
"저……."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커다란 두 눈망울이 쳐다보자 그는 불러놓고 그만 할 말을 잊을 뻔했다.
"사실, 말을 붙이고 싶었어요. 아까요."
괜히 말했구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는 가진 것이 없었다. 심지어 버스 요금도 없었다. 그렇지만 무작정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기사가 그를 한 번 올려다보았다. 궁색하게 지갑을 놓고 왔다는 변명을 했다. 기사는 한숨을 내쉬고는, 어차피 막차라 자신도 퇴근하는 길이니 그냥 타라고 했다. 운이 좋았다.
내가 버스요금도 없는 빈털터리인 것을 그녀도 눈치챘을까? 말 붙인 것이 후회가 되었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에게는 버스요금만큼의 자신감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괜한 걱정이었다.
"...... 저도요."
"네?"
그는 믿을 수가 없어 되물었다.
"저도 말을 붙이고 싶었다고요."
그녀는 환한 미소로 답했다. 그는 지금껏 세상을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는 이런 밝은 모습도 있었구나.
그들은 밤새 얘기를 나누었다. 말주변이 없는 그는 주로 듣는 쪽이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만 들어도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다시 해가 떴을 때엔 가슴이 무척 아렸다.
그는 사랑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함께 아침을 먹고 해변을 산책했다.
그녀는 작가였다. 괜찮은 단편이 나올 때까지 이 해변 마을에서 기약 없이 머물 거라고 했다. 악수를 하며 짧게 작별 인사를 나눴다.
"인연이 되면 또 만나요."
그는 그 길로 마을을 돌아다니며 일자리를 구했다. 다행히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있었다. 편의점 주인의 집에 남는 방이 있어 저렴하게 월세 방도 구했다. 급여는 형편없었지만 숙식을 해결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는 첫사랑을 떠올렸다. 그와 첫사랑의 운명이 엿가락처럼 서로 엮여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인연을 계속 이어나가는 데는 노래 가사처럼 끝없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했다. 첫사랑을 지켜나가기에 그는 약하고 어리석었다. 사실 지금도 그때와 별반 다를 것은 없었다. 지금도 그는 약하고 어리석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녀를 놓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포기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니까.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는 오전 열 시부터 오후 네 시까지 일했다. 그녀는 오후 네 시부터 아홉 시까지 마을의 유일한 카페 창가 자리에서 글을 썼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던 길에 그는 창가 자리에 앉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눈인사를 하고 원래 카페에 들어가려 했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카페에 들어가 앉았다. 그녀가 글을 쓰는 동안 차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별다른 할 일이 없기도 했지만 그녀와 같은 공간에 있고 싶어서였다. 아홉 시가 되어 그녀가 일어서면, 그 또한 무슨 연락이라도 받은 듯 슬그머니 일어나서는 밖으로 나가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었고, 두 사람은 짧은 시간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새 이것은 그의 일상이 되었다.
사실은 그녀 또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일이 오후 네 시에 끝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일부러 그가 퇴근하는 길가에 위치한—마을에 카페가 하나밖에 없기도 했지만— 카페에서 그가 자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전략적으로 창가 자리에 앉아 글을 썼다. 아니, 때로는 글을 쓰는 척했다. 그녀는 속마음을 들킬까 조마조마했다. 그가 책 읽는 모습을 몰래 훔쳐보다가, 문득 뭔가가 떠오른 듯 글을 썼고, 다시 그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두 사람은 멀리 떨어져 앉아 서로를 의식했다. 그들의 자리가 점점 가까워지다가 결국 서로 마주 앉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가 그녀의 바로 앞자리에 앉는 순간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고, 그녀는 발그레한 얼굴로 그의 손을 잡았다.
그들은 이제 오후 일곱 시에 카페에서 나와 손을 잡고 해변을 산책했다. 서늘한 바닷바람이 불어 덥지 않은 여름밤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했을까. 이제 시작한 연인들에게는 할 얘기가 무척 많았다. 때로 찾아오는 정적을 그들은 온갖 상상으로 메웠다.
하루는 그녀가 말했다.
"너무 두려워. 모든 것이 너무 완벽해서, 다 좋아서, 전부 거짓말일까 봐. 그게 너무 무서워. “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
그녀가 쓰고 있는 단편소설에 대한 이야기였다.
작품 속의 남녀는 완벽한 사랑에 빠진다. 그들을 둘러싼 세상은 값비싼 시계처럼 완벽하다. 그러나 두 사람이 있는 곳은 현실이 아니라 가상세계였다. 두 사람은 그 사실을 알게 되고 혹시나 서로를 살아있는 영혼이 아닌, 가상세계의 일부가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그들이 살아있는 영혼이라는 증거는 그들이 서로의 꿈에 불과하다는 증거만큼이나 불완전했다. 결국 가상세계에서 깨어나는 방법을 발견하지만 그들은 주저한다. 그녀는 아직 결말을 완성하지 못했다.
"깨어나야 진실을 알 수 있다면, 어떻게 하겠어? 진짜가 아니더라도 그곳에 남아 사랑하는 사람과 있을 거야? 아니면 깨어나 진실을 확인할 거야?“
그녀의 물음에 그는 쉽게 답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그 날 처음으로 몸을 섞었다. 그들의 영혼이 나선형을 그리며 떠올랐다. 두 영혼은 서로 얽히고설킨 채 뜨거운 키스를 나누었다. 질척한 타액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뜨겁게 달아오른 영혼은 붉게 빛났다. 그리고 두 사람은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
두 사람의 영혼이 섞였을 때, 그는 한 가지 확신이 들었다. 작품 속 이야기와는 달리 그와 그녀의 사랑은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확신이었다.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손발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정확하게 그의 몸에 들어맞는 관 따위에 갇혀있는 것 같았다. 숨을 쉬는 것도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다만 입으로 자연스레 공기가 들어왔다 나가는 것이 느껴질 뿐이었다.
그는 발가락을 움직이려 했다. 평소 친하지 않던 발가락이지만 왠지 그의 말을 들어줄 것만 같았다. 기대와는 달리 꿈쩍도 안 했다. 발가락뿐이 아니었다. 온몸이 그가 내리는 명령을 거부했다. 그의 몸은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었다.
반대로 신경은 점점 더 예민해졌다. 심장소리가 기차 경적만큼이나 크게 들렸다. 윙윙거리는 기계소리도 들렸다. 가끔 삑삑거리는 소리도.
갑자기 오줌이 마려웠다.
아무리 가위에 심하게 눌려도 보통 이만하면 깨어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요의가 점점 심해졌다. 그는 깨어나기 위해 애를 썼다. 소리도 질러봤다. 목소리가 나오기는커녕 입술도 움직이지 않았다. 눈꺼풀도 움직이지 않았다. 눈을 뜨는 것은 참 쉬운 일이었는데. 그에게는 작고 가벼운 눈꺼풀을 들어 올릴만한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그는 누운 채로 일을 저질러버렸다. 축축한 것이 속옷을 적시고 허벅지로 흘러내렸다. 지린내가 확 올라왔다. 부끄러운 심정까지 생생했다.
곧 그는 잠에서 깨어났다.
"요즘 신경을 많이 써서 그래."
그녀는 그의 꿈 얘기에—물론 누워서 오줌을 지린 얘기는 뺐지만—별일 아니라는 듯 웃어넘겼다.
"나도 한창 글이 안 써질 때 그런 꿈을 꾼 적 있어. 정우 씨도 요즘 그 이상한 손님 때문에 스트레스 많이 받았잖아."
얼마 전부터 갑자기 편의점에 나타난 손님 이야기였다. 어느 날 나타난 손님은 담배 한 갑을 사면서 그에게 지폐와 함께 명함 한 개를 건네었다. 명함에는 주소와 이름만 달랑 적혀 있었다. 혹시 이 세상에 대한 진실이 궁금하거든 여기 적힌 주소로 오시오. 손님은 조용히 그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진짜 이상한 일은 다음날부터 벌어졌다. 손님은 다음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똑같은 시간에 편의점에 나타나 담배 한 갑을 사고 그에게 명함을 건넸다. 어제도 명함을 주시지 않으셨나요? 묻는 말에 손님은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리둥절한 그에게 손님은, 어쨌든 이 세상에 대한 진실이 궁금하거든 여기 적힌 주소로 오시오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그는 손님의 장난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냥 미친 사람으로 여기며 신경 쓰지 않았다.
얼마 지난 후 손님은 발길을 끊었다. 그런데 정작 손님이 오지 않자 그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그는 손님이 주고 간 수십 장의 명함을 편의점 카운터 위에 곱게 포개어 올려놓았다. 장난치고는 지나친 정성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지만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오히려 그 손님에게 지나치게 신경 쓰는 것을 경계하는 눈초리였다.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를 꼭 끌어안으며 그녀가 말했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또 한 번 사랑을 나누었다. 그러나 그는 사랑을 나누는 동안에도 그 손님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그녀의 원룸에서 나와 명함에 적혀있던 주소로 찾아갔다. 도착한 곳에는 3층짜리 작은 병원이 하나 있었다. ㅇㅇ내과라고 적힌 투명한 문을 열자 아담한 로비가 나왔다. 로비에 앉아 있던 노인들이 일제히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접수처에 앉아 있는 직원에게 다가가 명함을 보여주었다.
“저희 원장님이신데요? 일단 번호표를 뽑고 앉아서 기다리세요.”
시키는 대로 번호표를 뽑고 자리에 앉았다. 그의 번호가 가까워질수록 불안한 느낌이 커졌다. 다리가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어릴 적 아파트 지하에서 하던 불장난이 떠올랐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차례가 되자 그는 의자에서 튕기듯 일어나 원장실에 들어갔다. 숨이 가빠왔다. 막상 원장실에 하얀 가운을 입고 앉아있는 손님을 보니 무엇을 물어야 할지 난감했다. 자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어디가 아프시죠?
원장은 처음 보는 사람처럼 그를 맞이했다. 그는 원장에게 명함을 건넸다. 원장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하네요. 주소와 이름은 분명 제가 맞는데, 저는 이런 명함을 만든 기억이 없어요.
그는 원장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했다. 원장은 처음 듣는 이야기처럼 시침을 뗐다. 게다가 자신은 그가 일하는 편의점에 가본 적도 없다고 했다. 그럼 지금 제가 거짓말을 한다는 겁니까? 혀끝까지 말이 올라왔다가 도로 들어갔다. 원장이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사람을 착각하신 것 같습니다. 손님이 많다 보면 그런 일도 종종 있기 마련이죠.
하루에 열 명도 채 오지 않는 편의점인데 사람을 착각 할리 없었다. 그러나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상대가 이토록 완강히 나온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면 혹시 기억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결국 그는 적막을 뒤로하고 원장실 밖으로 나왔다.
“잠시 만요.”
병원 밖으로 나가려는 그를 접수처 직원이 붙잡았다. 직원은 그에게 편지봉투 하나를 건넸다. 봉투에는 손 글씨로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에게'라고 적혀 있었다. 봉투를 받아 든 그의 손이 떨렸다.
“엿들어서 죄송해요. 원장님 지시가 있었어요.”
그는 직원이 시키는 대로 로비 의자에 앉아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편지를 보시게 되어 다행입니다.
저는 기억을 잃고 있습니다. 한 분씩 만나고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얘기하고 싶지만 제게는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남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눈치채셨다시피 이 편지는 최대한 많은 분들께 전하고자 복사해서 접수처 직원에게 맡겨놓았습니다. 그녀가 기억을 잃기 전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충분히 많은 분들에게 편지가 전해져 진실이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진실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편지를 읽는 분께 달려있지만 말입니다.
제가 처음 눈을 뜨게 된 것은 작년 봄이었습니다. 저는 언제나 환자 기록을 살펴보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처음 병원을 개업했을 때부터의 습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문득 이상한 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바로 병원에 드나드는 환자의 수가 계절이나 날짜에 관계없이 늘 일정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물론 작은 마을이니까 환자의 수가 일정한 것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분명 마을에 새로 이사 온 사람들과, 마을에서 떠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 중 단 한 명도 병원을 방문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편지를 읽으시는 분도 아마 마을에 와서 아파본 적이 전혀 없을 것입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저는 환자 중 한 사람을 몰래 미행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호기심 때문에 의사가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만 것입니다. 그런데 환자를 미행한 후 저는 정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환자는 집에 들어가더니, 다음번에 병원을 방문할 때까지 전혀 미동도 않고 집안에 틀어박혀 있는 겁니다! 마치 집과 병원을 오가는 것만이 그 환자의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저보다 먼저 마을에 도착한 분들을 찾아가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와 마찬가지로 이상한 점들을 느낀 분들이 있어 작은 그룹이 만들어지는 것은 금방이었습니다. 우리는 마을의 다른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우리들 사이에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어떤 꿈을 꾸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쯤 아마 눈치채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누워서 꼼짝 못 하는 저주를 받은 그 꿈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꿈을 근거로 하여 말도 안 되는 한 가지 가설을 세웠습니다. 바로 우리들은 모두 어떤 이유로 식물인간이 된 것이며, 지금 우리가 현실이라고 느끼는 것은 단지 영혼이 꾸는 꿈에 불과하단 것입니다.
당연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우리도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아직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룹이 점점 모이는 횟수가 많아지고, 서로의 삶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면서 우리는 이 가설을 완전한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너무나 완벽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꿈이 아니라면 무엇을 꿈이라 해야 할까요?
그때부터 우리는 꿈에서 깨어나는 방법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예상치도 못한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그룹의 대다수는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꿈일지언정 이토록 완벽한 세상이 있는데 누군들 벗어나고 싶었겠습니까? 만약 현실의 당신이 거리의 부랑자라거나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죄수라면 어떨까요? 꿈에서 깬 후 평생을 후회하며 살아가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식적으로 연구를 중단했습니다. 저를 비롯한 소수파만 남아 순전한 호기심으로 연구를 계속하게 되었지요.
그러나 곧 저희 소수파에게 위기감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룹의 사람들이 점점 우리의 연구에 대한 기억을 잃어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기억을 잃은 사람들은 분명 우리가 누구인지 기억하고 있었지만, 연구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은 듯 보였습니다. 그들에게 연구의 내용을 보여주어도 처음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음 날이 되면 기억을 잃고 또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랜 토론 끝에 우리가 가진 두려움의 실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다수파가 말했던 대로 완벽한 꿈을 살아가는 것은 누구나 원하는 바람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만약 기억을 잃은 당신이, 당신이 생각하던 자기 자신이 아니라면 어떨까요? 같은 모습과 같은 말투를 하고 있지만 같은 영혼이라는 보장은 없지 않겠습니까? 만약 기억을 잃어버리고 당신의 영혼이 소멸되어버린다면, 영원히 무저갱을 헤매는 슬픈 신세가 되지는 않을까요?
그래서 소수파는 우리가 연구한 것을 실천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물론 남아있는 저희는 떠나간 그들이 성공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저를 비롯한 몇 명은 마지막까지 남아 우리가 알게 된 진실과 연구 내용을 다른 아직 깨어있는 '영혼'들에게 남길뿐입니다.
아까도 말했듯, 제가 말씀드린 진실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당신에게 달려있습니다. 연구의 결과는 편지의 뒷면에 적혀있습니다. 부디 저 또한 기억을 잃기 전에 탈출할 수 있도록 행운을 빌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안녕히.
편지를 다 읽은 그는 진실에 압도되어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접수처 직원이 준 종이컵에 담긴 물을 숨도 쉬지 않고 들이켰다. 그제야 진정이 되어 붉어진 눈으로 직원을 바라보았다. 직원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읽었어요. 하지만 저는 남는 쪽을 택했어요.”
그는 왜 남는 것을 택했는지 굳이 묻지 않았다. 원장실을 힐끔 쳐다보는 접수처 직원의 애정 어린 시선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병원에서 나오는 그를 누군가 불러 세웠다. 그녀였다.
"결국 알아냈구나."
"알고 있었어?"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마을에 도착하고 며칠이 지난 후에 길에서 원장과 우연히 마주쳐 명함을 건네받았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녀는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명함을 받았다. 작가의 호기심이 발동한 그녀는 당장 주소를 찾아갔고, 똑같은 편지를 읽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꿈과 같이 완벽한 순간들을 혹시나 잃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원장의 말대로 언젠가 기억을 잃어버릴지도 몰랐다. 영혼이 없는 자신의 껍데기만 남아 꿈을 방황할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꿈이라 할지라도, 유통기한이 있는 꿈이라도 그저 행복하기만 하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현실에 대한 기억은 없었지만 결코 이곳만큼 완벽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가상현실에서 깨어날지 말지 고민하는 주인공들을 놔두고 소설을 쓰다가 말았다. 그러나 그녀는 소설의 진짜 결말을 스스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가만히 듣고 있던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점점 더 확신이 들었다.
"우리는 꿈에서 깨어나야 해. 이곳은 완벽해. 하지만 가짜야. 언제까지고 가짜만 보고 살아갈 수는 없어. 좀 더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돼. “
"만약 우리가 깨어났을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떡할 거야? “
"상관없어. “
그는 그녀에게 처음 말을 걸었을 때 자신이 빈털터리였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본인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이 마을에 머무는 척 말하곤 했지만 사실 갈 곳도 없었다.
사실은 그녀도 다를 바 없었다. 그에게 자신이 작가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변변한 작품 하나 발표한 적이 없었다. 자존심 때문에 차마 진실을 말할 수 없었던 것뿐이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고 무엇도 능히 잘하지 못했지만, 단지 서로만으로 세상을 완벽하다고 느꼈다. 현실로 깨어났을 때 그 세상이 꿈처럼 완벽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본다면 그 세상은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행복하지 않을 리 없었다.
"만약 현실의 내가 할머니라거나 엄청난 추녀라면 어떡할 거야?"
그는 그녀의 울음 섞인 물음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녀를 꼭 안았다.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바다 앞에 서있었다.
"그 날 기억나?"
그녀가 물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날을 말하는 것이었다.
"응. 엄청 떨렸어."
"사실은, 나도."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풋 하고 웃었다. 그것이 신호탄이 되어 그들은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맨 처음 해변에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었을 때 그랬듯, 바다는 낯선 이방인이 품 안으로 들어오거나 말거나 관심이 없었다. 차가운 바닷물이 허리까지 차오르자 그녀는 두려움에 온 몸을 파르르 떨었다.
"나, 도저히 못하겠어."
그는 그녀가 안심할 때까지 안아주었다. 다 잘 될 거야. 그녀는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친 바다를 향한 행진이 계속되었다. 물이 가슴팍까지 차오르자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힘들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더욱 세게 붙잡았다. 벌써 바다는 그녀를 턱까지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 순간 두 사람은 썰물에 몸을 맡기고 앞으로 크게 한 발 내디뎠다. 곧 바다 거품 사이로 두 사람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는 고통 속에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의 손을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고통이 절정에 다다를 무렵 손을 놓치고 말았다. 숨을 참지 못하게 되자 바닷물이 왈칵 입 안으로 들이닥쳤다. 가슴이 터질 듯이 아팠다. 그는 곧 정신을 잃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따라가지 못했다. 그의 손을 놓치자 본능적으로 팔을 휘저었다. 눈치 없는 바다가 그녀를 해변으로 밀어 보냈다.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구역질을 했다. 바닷물을 전부 게워 내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그는 이미 떠나간 후였다.
그의 영혼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머물던 마을이 점점 작아지기 시작하더니, 결국은 하나의 점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꼈다. 나비가 사람이 되는 꿈을 꾸는 것인지, 사람이 나비가 되는 꿈을 꾸는 것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비이건 사람이건 간에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점이다. 바로 그가 존재한다는 것.
그러나 갑자기 세상에 혼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존재한다. 그러나 너는 존재하는가.
만약 세상에 나 혼자뿐이고 모든 것이 내가 꾸는 꿈이라면, 너를 비롯한 모든 것들이 내가 만든 환상에 불과하다면, 세상은 얼마나 슬픈 곳인가. 그 순간 그는 이것이야말로 모든 영혼이 가지고 있는 숙제이자 두려움, 불안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한 가지 희망이 남아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녀였다.
그는 그녀와 처음 몸을 섞던 날을 떠올렸다. 두 사람은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하나로 합쳐지던 때, 그는 깨달을 수 있었다. 불안감을 느끼는 두 개의 영혼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둘은 끊임없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 완전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아니,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행복할 수는 있다는 것을.
그녀는 그가 떠난 후 마을로 돌아왔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가 없다는 사실만 빼고.
한 동안 공허함에 시달렸다. 그녀는 일상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같은 시간에 카페에 가고, 글을 쓰고, 같은 시간에 집으로 돌아왔다.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 책을 읽던 그가 생각나고, 함께 저녁에 걷던 길이 생각났지만 괜찮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그녀의 소설은 같은 자리를 한 달이 넘게 맴돌고 있었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공기. 여유 있는 삶. 고요한 마을.
그러나 더 이상 그곳은 완벽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제야 그녀는 깨달았다. 그와 함께 있었기에 세상이 완벽했다는 사실을.
그날 밤 그녀는 말없이 바다를 찾았다.
그는 또 다른 병원에 들어섰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야.' 이 말을 하며 얼마나 자신을 타일렀던가. 그는 기적처럼 깨어난 이후 벌써 몇 달 동안 이 병원에서 저 병원으로, 그녀를 찾아다녔다. 아마 대한민국의 병원이란 병원은 모조리 가봤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이미 소식이 빠른 간호사들 사이에서는 유명인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가 들어서자 이 병원의 간호사들도 그를 보고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경 쓰지 않았다. 이 미친 짓도 오늘로 마지막이니까.
'아무래도 그녀는 내 꿈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반쯤 포기한 마음으로 병실을 대충 훑어나갔다. 간호사들이 몰려오자 환자들도 궁금해서 병실 밖을 내다보았다. 결국 그는 병실 몇 개를 훑어보지도 못하고 출동한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그런데 경찰도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바로 그 병원에도 며칠 전 그와 마찬가지로 기적을 일으킨 장본인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무려 오 년간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기적처럼 깨어났다. 더 이상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하게 된 가족들이 이제는 결단을 내리려던 시점이었다.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기 위해 들렀던 어머니가 깨어나 있는 그녀를 보고는 얼마나 놀랐던지. 하지만 누군가를 찾으러 병원을 나가야 한다는 딸의 말에 어머니는 한 번 더 놀랐다.
간호사들끼리 주고받는 이야기를 엿들은 그녀는 병원을 돌아다닌다는 미친 사람이 그녀가 찾고 있는 사람일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녀는 어서 그를 찾으러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쯤에 그가 그녀가 있는 병원으로 들이닥쳤던 것이다.
그녀는 소란이 시작되자마자 얼른 옆 병상 아주머니의 핸드백을 훔쳐 화장실로 향했다. 급하게 립스틱을 바르고 눈썹을 그렸다. 그녀가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경찰이 그를 체포해서 데리고 가던 중이었다. 그녀는 급하게 층계참을 뛰어 내려갔다.
병원 로비에서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체포되어가던 그를 그녀가 덮쳤던 것이다. 두 사람은 병원 로비에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뒹굴었다. 경찰들은 어리둥절해져서 두 사람 다 체포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제야 병원의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챘다. 이곳에서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그들은 모두 박수를 쳤다. 두 사람은 박수소리 한가운데에서 뜨겁게 포옹을 했다.
"다행히 할머니도 아니고 추녀도 아니었어."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