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단편문학 챌린지 - 6화

by 데카당스

(기존에 지은 글을 삽화와 함께 브런치북으로 옮겼습니다.)


K는 어릴 적부터 온순했다. 본인은 엄격한 가풍과 타고난 성격 탓이라 하지만 내가 보기엔 약간의 우유부단함과 무관심함, 그리고 낙천적인 성향이 그를 온순하게 만들었다. 그는 누군가 시비를 걸어도 무시할 수 있는 무관심의 소유자였음에도 사실 불 같은 성정을 지니고 있어, 온순함 때문에 놀림을 받으면서도 눈에서는 불길이 일곤 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K와 쭉 동급생으로 지내 그의 내력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다. 때로는 내가 그를 놀리기도 했지만 겉으로 보기에 우리는 잘 어울리는 친구 사이였고, 마음속으로는 서로의 우정을 인정하고 있었다.


우리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모두 같은 반으로 다녔는데, 내가 도중에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갔을 때 우연인지 필연인지 K도 같은 동네로 이사를 왔다. 한 번은 K의 부모님을 뵌 적이 있는데, 우리 부모님처럼 정직하고 낙천적인 분들이라 나를 기쁘게 했었다.


K는 착한 성격 때문에 항상 친구가 많고 동시에 적도 많았다. 선과 악은 모두의 내면에 존재하지만, 각기 정도가 달라 어떤 이는 K를 친구로 여기고 어떤 이는 적으로 여겼던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K는 모든 동급생을 친구로 여겼다는 사실이다.


어렸을 때 내가 이 둘도 없는 친구에게 느꼈던 다른 모습은 바로 잔인성이었다. 착하기 그지없는 K도 심한 모욕감을 느끼면 상대가 저지른 일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한 복수를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가 저지른 복수를 깨닫는 이는 나 밖에 없었다. 그의 수법이 매우 정교했기 때문인데, 그는 복수 후에 꼭 나에게 고해성사하듯 모두 털어놨기 때문에, 나만은 그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장난에 대한 장난으로 시작한 일이 어느샌가 더 큰 보복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의 내면에 잠재한 괴물의 힘이 세져 점점 제어가 힘들어지는 것 같았다. 때로는 그가 복수를 위해 신비스러운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는데, 고등학교 때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우리가 다녔던 T 고등학교는 평범한 학교로, 무능력한 선생들로 유명했다. 아파트 숲 속에 자리 잡은 학교는 나무 한 그루 없는 좁은 운동장과 스물네 개의 교실로 이루어져 있었다. 교실에는 한 반에 50개씩 빽빽하게 책걸상이 늘어져 있었는데 학생수가 턱없이 많은 탓에 숨도 제대로 쉬기 어려운 상태에서 수업을 들어야만 했다. 몇 개 있는 창들은 제대로 열리지도 않았고 쇠로 만든 창살로 막혀 있었다.


차가운 콘크리트 건물을 우리는 수용소, 혹은 정신병원이나 감옥 따위로 불렀다. 괴기스럽기까지 한 이 건물에서 가장 악명 높았던 장소는 미술실이었다. 미술실은 학교에서 가장 큰 방이었지만 그중 9할을 창고로 썼고, 나중에 세운 콘크리트 벽이 가로막아 결국 교실의 절반 정도에 불과한 공간이 우리에게 할당되었다. 미술 선생 J는 좁은 것을 극도로 싫어해 50명의 학생을 의자도 없이 바닥에 앉게 하고 그 자신은 선 체 수업을 진행했다. 먼지가 자욱한 바닥에 숨 쉴 공간도 없이 들어앉은 우리는 통조림 속에 들어 찬 생선과도 다를 바 없었다.


이런 수업 자체가 기막힌 일이지만 진짜 사건은 막 2학년으로 진급하던 봄에 일어났다.


K는 당시 학급회장으로 있었는데, 모범적인 학생으로 꽤나 그 자리에 어울렸다. 그는 학생들을 인솔해 미술실로 향했으며, 선생의 지시에 따라 아이들을 바닥에 앉히고 자신은 가장 앞자리에 앉았다. 학생들이 앉은 앞에는 이상한 그림들이 놓여있는 이젤 몇 개와 J선생이 있었다.


장난치기 좋아했던 학생 하나가 K를 밀친 것이 화근이었다. 그가 앞으로 넘어지면서 이젤 하나를 건드렸고, 좁은 공간에 몇 개나 놓여있던 이젤들이 연달아 쓰러지면서 소동이 벌어졌다. J선생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제와 느낀 거지만, 어떤 선생들은 수업을 중간에 타의로 끊게 되는 것을 몹시 싫어하며,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반응을 보이곤 했다. 그 점에 있어서 J선생은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


J선생은 K를 일으켜 세웠고, 물감이 묻은 붓으로 그의 얼굴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파란 물감이 튀었고, 피하려는 학생들로 실내는 소란스러워졌다. 나는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K의 눈에서 무언가 불타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미술시간이 끝나고 다들 원래의 교실로 돌아왔는데, K가 보이질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튕기듯이 일어나 본능적으로 미술실로 향했다. 불안한 마음에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미술실에 당도한 순간 나는 눈앞에 벌어진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시뻘건 연기가 미술실 한편에서 그것도 K의 손에서부터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타는 냄새와 타오르는 불길이 나를 습격하기 전에 교실로 도망치듯 뛰어갔다. 도중에 A선생을 만나 불이 났다고 말했지만 믿어주지를 않았다. 다시 달리기 시작했을 때 뒤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미술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역시나 미술실 앞에는 학생들이 몰려와 웅성이고 있었는데, 그들은 미술실 안에서 불타고 있는 J선생의 그림과 이젤을 환희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선생들이 모두 달려오기 전까지 K를 발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불타는 나무 막대를 들고 그가 지옥의 왕처럼 서있었는데도!


J선생이 뛰어들어 왔을 때엔 아직 파란색 물감이 얼굴에서 채 지워지지도 않은 K는 불길 속으로 태연하게 걸어가 하얀 연기처럼 사라지고 난 뒤였다. 망연자실한 J선생을 뒤로한 채.


이 사건으로 K는 다른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망쳐놓았다. 선생들은 엉뚱하게도 미술시간에 K를 밀었던 악동 L을 범인으로 지목했으며, 내 의견은 철저히 묵살되었다. 심지어 한 학생은 K가 아니라 L이 미술시간에 물감 묻은 붓으로 얼굴을 맞았다고 주장했으며, J선생은 말도 안 되는 그 의견에 수긍했다. 자기가 모욕을 준 학생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다니! 처음에는 그를 비웃었지만 진실을 목격한 나조차도 나중에는 L이 범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게 되었다. 결국 L은 퇴학처분을 받았다. 학교를 떠나는 마지막 날까지 그는 결백을 주장했다.




L사건 이후로 K와 나는 조용히 지냈다. 그의 내면의 괴물은 완전히 잠든 듯 보였고, 우리가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L이 떠나면서 학교 내의 모든 문제들을 같이 가져가 버린 것 같았다. 졸업 후 우리는 각기 다른 대학교로 진학했지만 우리의 인연은 끝이 아니었다.


K는 한적한 시골 마을에 세워진 명문 Y대학에 들어갔다. 그는 매우 공부를 잘했기 때문에 더 좋은 학교를 들어가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그보다는 이름이 떨어지는 H대학에 들어갔으며, 그와 나는 멀리 떨어져 지냈지만 한 달에 두 번씩 주기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대학 4년 동안 그의 심경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효과적으로 소개하기 위해 여기서는 편지의 내용을 발췌하도록 하겠다.


-19XX년 X월 X일


오랜만에 편지를 쓰기 위해 펜을 든 것 같네. 비록 2주 만이지만 이곳에서는 시간이 수은처럼 느리게 흘러간다네. 자네가 이곳에 와보면 금세 눈치채겠지만, 여기서 재미있는 일이라곤 결혼식이라던가 술집에서의 소소한 다툼이 고작이네. 아무것도 없는 시골에 커다란 학교가 떡 하니 버티고 있는 꼴이라니! 시끌시끌한 걸 좋아하는 자네라면 이곳이 지옥처럼 느껴질 거야.


(중략)


각설하고, 요즘 나는 독서에 푹 빠져있네. 독서삼매경이라고 하지 않나. 지금 나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라네. 독서를 시작하자 생각이 깊어지고 사물을 보는 시야가 넓어진 것 같은 확신이 드네. 자네가 만약 내가 나이가 들어 그런 거라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말이야.


요즘 들어서는 예전의 욱하던 버릇도 잠잠해졌네. L사건 이후에도 자네 모르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 적도 있네만, 지금은 더 이상 아무 일도 없을 거란 확신이 들어. 아무 일도 없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지. 아무튼 조용한 마을이 다 그러지 않겠나.


(후략)


-19XX년 X월 X일


친구에게.


인연이란 정말 놀라운 거야! 자네가 그 C와 결혼하게 될 줄이야! 그녀는 중학교 때만 해도 자네를 벌레 보듯 하지 않았었나. 기분 나쁘라고 하는 소리는 아니네. 어쨌든 축하해.


놀라운 얘기를 하나 하자면, 나도 이번에 결혼이란 걸 하게 되었다네. 학교의 독서클럽에서 만난 여잔데, 자네의 C와 동명이인인 데다 용모까지 쏙 빼닮았다네. 미심쩍어 물었더니 그녀와는 아주 먼 친척쯤 되는 모양이야. 우리가 결혼을 하게 되다니!


(후략)


이 두 편지 외에 나머지는 시시한 안부가 고작이었으며, 몇 통은 소실되었다. 여기 실은 두 번째 편지 이후에 두 통이 더 있었지만, 각자 취직하고 가정을 갖게 되면서 바쁜 통에 편지 왕래는 완전히 끊겨버렸다.


그런데 5년의 시간이 지난 후, 마침내 K의 편지가 도착했다. 편지에는 그의 성격에 걸맞지 않게 삐뚤한 글씨로 가득 차 있었는데, 급하게 쓴 듯 앞뒤가 맞지 않는 문장도 종종 보였다.


-19XX년 X월 X일


그동안 답장도 하지 않아 미안하기 짝이 없네. 그만큼 자네도 바빴을 테니 이해하리라 믿네. 어쨌든 나는 지금 곤경에 처해 있다네. 자네가 믿거나 말거나, 나의 사랑하는 C가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져버리고 말았다네! 생각해보게나. 놓고 온 물건을 가지러 출근길에서 되돌아왔을 때 우리 집으로 들어서는 어떤 남자를 발견한 내 심정을! 게다가 그 자식은 나도 아는 얼굴이었어. 바로 옆집에 사는 청년인 L(우리가 아는 L과는 다른 사람일세)이었단 말이야!


처음에는 괜한 의심이려니 하고 가만히 지켜봤네만, 바로 집 앞에서, 누가 보는 줄도 모르고 부둥켜안고 있는 꼴을 보았을 때 어찌나 피가 끓던지! 나는 그날 일이 아직도 눈에 선하네.


편지는 여기에서 끊어져 있었다. 그 뒤로 한참 동안 지웠다 썼다를 반복한 흔적이 있었을 뿐, 더 이상의 내용은 없었다. 편지는 내가 일하는 직장으로 배달이 되었는데, 겉봉에는 내 이름만 쓰여있어 처음에는 누군가의 장난으로 여겼다. K의 편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오랜만에 일찍 일이 끝나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였다.


나는 K에게 쓸 답장의 내용을 생각하며 버스가 빨리 가기를 애타게 기원했다. 결국 답장의 마지막 문구를 떠올릴 즈음 버스는 내가 내려야 할 정류장에 도착했고, 나는 황급히 내렸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급한 마음에 집까지 얼마 안 되는 거리를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순간 멀리 앞 쪽에서 K의 뒷모습을 얼핏 본 것만 같았다. 잘못 본 게 틀림없지만 왠지 모르게 불길한 기분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5분쯤 걷고 모퉁이를 돌면 언제나처럼 서 있던 우리 집 대신 예전의 그 미술실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유일하게 들리는 소리라면 사정없이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뿐이었으며, 주변의 풍경이 빠르게 내 주위를 스쳐가고 피가 머리까지 쏠렸다. 불길한 느낌은 모퉁이를 돌았을 때 절정에 이르렀는데, 이런 예감은 결코 빗나간 적이 없었다. 창을 통해 들여다본 집 안에는 나의 부인인 C와 시퍼런 식칼을 들고 있는 K, 그리고 정체불명의 남자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급하게 집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집안으로 들어섰을 때는 이미 난장판이 벌어지고 난 후였다. 미술실 사건 때처럼 늦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문을 들어서기 전과는 달리 마음이 침착해져서, 주위를 똑똑히 둘러볼 수 있었다. 게다가 목에 칼이 찔린 채 헐떡이는 나의 아내 C와 옆에 쓰러져있는 정체불명의 남자를 봤을 때도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없었다. 이런 끔찍한 광경에도 나의 심장과 머리는 얼음처럼 차가워졌던 것이다. 마치 당연한 일이 당연하게 일어난 것처럼! 그러나, 아무리 찾아봐도 K는 사라지고 없었다. 미술실에서 연기로 변해 사라졌을 때처럼, 그는 그만의 신비로운 능력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나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착각해 처참한 복수를 저지른 후에.




그 일이 있은 후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K의 편지도 더 이상 오지 않았으며, 예전의 주소로 보내도 주소지 불명으로 되돌아올 뿐이었다. K도 잊혔고, 아내를 잃은 상처도 잊혔으며, 그 사건도 기억 속으로 잊혀 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내가 살해당한 일은 마치 당연한 수순처럼 여겨진다. 그녀는 분명 그곳에 함께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던 남자와 내연의 관계였을 것이다. 게다가 경찰은 K가 아닌 그 남자를 아내 살해의 범인으로 지목했다. 그는 감옥에서 평생을 썩게 될 것이다. 사람을 죽여놓고, 다른 사람을 범인으로 만들고 자신은 소리도 없이 사라졌으며 보수도 요구하지 않은 나의 친구 K는 얼마나 효과적인 살인자이자, 복수자인가!


그러나 모든 일이 마무리된 지금도 하나의 질문이 남아 나를 괴롭히고 있다. 도대체, 나와 기막힌 인연으로 엮어지고, 게다가 나와 동명이인이기도 했던 절친한 친구이자 복수자, K는 누구였단 말인가?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