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튼

단편문학 챌린지 - 4화

by 데카당스

(예전에 지은 작품을 삽화와 함께 브런치북으로 옮겨왔습니다)


한가한 어느 오후였다. 그을린 피부의 인부 넷이 빨간색 버튼이 달린 상자 모양의 커다란 기계를 들쳐메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인부들은 가마꾼이라도 된 것처럼 빈 손으로 비키라는 손짓을 하며 사무실의 좁은 복도를 지나갔다. 그들의 땀내에 직원들의 시선이 모였다. 직원들은 처음에는 목을 길게 빼고 무슨 일일까 궁금해했지만, 기계가 사무실 구석에 놓이고 인부들이 돌아갈 쯤에는 이 일을 그저 날마다 회사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일들 중의 하나로 여기고 안정을 되찾았다. 직원들의 이메일 수신함에는 별다른 설명 없이 짧은 공지사항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전 직원은 날마다 출근 뒤에 각 층에 설치된 버튼을 누를 것.

직원들은 공지를 보고 술렁였다. 드디어 회사가 미쳤나봐요. 그러게요. 누가 저런 쓸데없는 짓을 하겠어요. 그러게 말이에요. 그들은 단조로운 톤으로 의미 없는 얘기만 나누고 다시 모니터에 고개를 처박았다. 지나친 고민과 이상한 것에 대한 관심은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법이었다. 그들은 그저 해가 지면 하루가 저물고, 해가 뜨면 다시 하루가 시작되겠구나 하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물론 어딜가나 궁금한 것을 못참는 사람도 있는 법이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부서의 한 직원이 상사 A에게 왜 버튼을 눌러야 하는지 물었다. 상사 A는 자신도 잘 모른다며 자신에게 지시를 전달한 상사 B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직원이 상사 B에게 묻자 상사 B는 상사 C에게 물으라 했고, 마지막으로 상사 C에게 물었을 때 상사 C는 다시 상사 A를 지목했다. 결국 그 직원은 원하던 답을 얻지 못하고 오후 시간만 낭비하고 말았다. 그는 누가 이런 말도 안되는 지시를 따르겠냐고 중얼이며 차가운 시선으로 버튼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가 뽑은지 한참 지나 차갑게 식은 자판기 커피를 마저 마셨다.


그러나 다음 날부터 사람들은 버튼을 누르기 위해 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사무실뿐이 아니었다. 전국의 모든 공공기관과 학교, 심지어 아파트에도 버튼이 설치되었고, 어디든 버튼을 누를 수 있는 곳에는 버튼을 누르는 사람들로 긴 줄이 생겨났다. 사람들은 유원지에서 놀이기구를 기다릴 때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사무실에서와 마찬가지로 누구도 버튼을 눌러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들은 단지 상사의 명령이나 선생님의 지시, 혹은 아는 사람의 권유를 따를 뿐이었다. 이유를 물어보는 이들은 오후 시간을 낭비한 사무실의 직원처럼 시간만 낭비하고 말았다. 질문은 빙빙 돌다 제자리로 돌아왔다.


결국 아무도 제대로 모르는 까닭에 속빈 추측만 나돌았다. 상상력이 빈곤한 이들은 버튼에 달린 특수한 장치를 통해 정부가 국민들의 건강을 체크하고 있다는 건전한 의견을 내놓았다. 좀 더 급진적인 이들은 정부가 버튼을 통해 국민을 통제하고 있다고 했다. 한편 어떤 과학자들은 버튼을 누르는 것은 부족한 전력난을 해소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했으며, 온 국민이 버튼을 누르는 운동에너지를 전력으로 환산하면 발전소 하나 분량 정도 된다는 것을 증명했다. 추측은 무성했지만, 아무도 진실을 알지 못했다.


그렇게 버튼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




버튼이 나타난 뒤 직원들의 일상에 크게 달라진 것은 없어보였다. 달라진 것들 중에 그나마 눈에 띄는 것은 아침 인사말이 ‘좋은 아침입니다’에서 ‘버튼은 누르셨습니까?’로 바뀌었다는 점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 마흔 살이 된 만년대리 동일은 도통 누군가의 장난으로 시작된 그 인사법에 적응이 되질 않았다. 그래서 누군가가 ‘버튼은 누르셨습니까?’하고 물으면 화들짝 놀라며 예전 습관대로 ‘좋은 아침입니다’하고 답하곤 했다. 그러면 상대는 어깨를 으쓱하며 사라졌다. 아침마다 공허한 인사를 주고받는 것이 직원들의 몸에 밴 예절이었지만, 마흔 살인데도 예순은 되어 보이는 그늘진 얼굴의 동일은 아침인사를 정확하게 하는 일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그의 온 신경은 조만간 있을 승진인사에 가 있었다.


승진인사 시기가 되면 사무실에서 제일 한가한 직원까지도 바빠지기 마련이었다. 연줄이 있는 이들은 조금이라도 승진에 도움이 될까싶어 식사 약속을 잡느라 분주했다. 실력에 자신 있는 이들은 자신들의 말 한 마디를 평소보다 조심해서 다루는 한편 상사에게 보내는 이메일의 철자법을 두세 번씩 고치느라 바빠졌다. 반면 연줄도 실력도 없는 이들은 세상일에서 초연해지느라 바빴다. 그들 중 일부는 새들처럼 돌아다니며 재잘거리느라 특히 정신이 없었는데, 온갖 승진에 대한 상상과 소문들도 모두 그들에게서 나왔다.


동일은 ‘초연파’라기보다는 ‘무념무상(無念無想)파’에 가까웠다. 모두가 바삐 움직이면서 제 자리를 찾아가는 와중에 자신만 십년 동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면, 어느 누구라도 불운을 탓하기 보단 그처럼 생각 자체를 비워버렸을 것이다. 지난 십년간 월급봉투는 조금도 두둑해지지 않았지만 밤에 두 다리 잘 뻗고 자고,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었으니 딱히 불운하다고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누구 못지않게 잘 들리는 두 귀가 있다는 사실이 불행이라면 불행이었다. 마음을 비운다고 귀로 들어오는 소리까지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어느 날 멋대로 돌아다니는 소문을 들은 뒤부터 그의 마음 속에 근심과 질투가 일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잠도 제대로 잘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소문의 주인공은 K였다. K는 동일의 학교 후배이자 고향 후배, 게다가 같은 부서에서 일하는 입사 후배였다. 동일이 불알을 흔들며 뛰어다니던 시절에 요람에서 몸이나 뒤집고 있던 K가, 어느새 최연소 승진 타이틀을 두 번이나 갈아치우고 이제는 동일보다도 앞서게 생겼던 것이다. 겉으로는 대견하다고, 자랑스럽다고 누가 물으면 답하곤 했지만 동일의 속마음은 썩어가고 있었다. 그는 몇 번이고 마음속으로 K의 잘생기고 능글맞은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상상 속에서 코가 뭉그러지고 이빨이 빠진 K는 더 이상 미남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편해졌다. 동일은 버튼을 누르려는 사람들의 줄에 섞여 있으면서도 혼자 히죽거리며 K를 두드려 패는 상상을 했다. 그래서 정작 진짜 K가 자신의 앞에 나타났을 때 당황하고 말았다. K는 언제나처럼 빠른 걸음으로 사람들의 행렬 옆을 지나가다가, 동일을 발견하자 반가운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K가 다가오는 동안 동일은 어떤 자세를 취하며 그를 맞이해야할지 고민했다. 자기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연습했던 대로 오른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K가 먼저 공격을 해오는 바람에 그는 주먹질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선배님, 버튼은 누르셨습니까?”


K는 마치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던진 것처럼 웃으며 동일을 바라보았다. 동일은 순간 부아가 치밀어 올라서 “안보여? 여기 줄 서 있는거!”하고 큰 소리를 냈다. 갑작스런 호통에 K는 당황했지만 금세 능청스러운 미소를 되찾았다. 소심한 동일은 속으로 은근 통쾌해하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너는? 버튼 눌렀어?”하고 말을 돌렸다. 그는 줄 안에, K는 줄 밖에 서 있었으니 당연히 물어봄직한 질문이었다.


“저는 저런 건 별 관심 없어요. 다들 아침인사를 이상하게 하길래 한 번 따라해봤어요.”


K는 그렇게 답하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동일은 괜히 무안해서 비어있는 자신의 머리 한 가운데를 긁적였다. 이십 대 후반에 생긴 오백 원짜리 동전만한 구멍은 자기 영역을 조금씩 넓히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머리를 위에서 내려다보면 가운데가 텅 비어서 새 둥지 모양이 되어버렸다. 자신보다 키가 큰 K가 머리 위의 둥지를 내려다보았을 생각을 하니 민망했다. 게다가 둥지 안에는 울어줄 새 한 마리도 없었다. 그는 상상 속의 모자로 머리를 덮었다.


퇴근한 뒤 동일은 떠들썩한 주점 거리를 지나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주점 거리에는 마땅히 술에 취한 사람이 있기 마련인데 그는 그들을 보는 족족 속으로 형편 없는 이들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동일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상당히 현명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지나간 시간은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간파했고, 지나간 시간을 돌이키기보단 술을 마시며 지금의 순간을 즐겼다. 반면 그런 점에서 동일을 현명하지 못했는데, 그는 술도 마시지 않았고, 광역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내내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돌이켜보며 고통을 받았다. 버스의 벨소리가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마도 무저갱 속을 여전히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다고 해서 그의 처지가 나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의 하나뿐인 아들은 방에 틀어박혀 컴퓨터 게임에 열중해 있었다. 아들은 자신의 운명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투명인간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기 위해 가상의 적들을 썰고 베면서 뿜어져 나오는 아드레날린에 심취해 있었다. 괴로운 운명을 애써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취해버리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아들은 그보다 약간은 더 현명했다. 그러나 아들보다도 더 현명한, 틈만 나면 완전히 취해버리는 아내는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투명인간 동일은 조심스레 모습을 드러내며 아들에게 접근했다. 평소에는 가구보다도 존재감이 없는 그였지만, 그날만큼은 온 힘을 다해 아들이 앉은 등받이 의자보다 더 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는 아들이 자신을 가상의 칼로 썰고 벨까 두려워 조심스레 “엄마는?”하고 물었다.


“엄마는 친구들하고 약속 있다고 나갔어.”


동일은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냉장고에서 식은 밥과 반찬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먹었다. 평소 저녁 내내 텔레비전 연속극을 보는 아내의, 안개처럼 불편한 존재감이 없어서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물까지 유리컵에 따라 마시고 자신의 보금자리인 거실 소파로 갔다. 소파에는 투명인간의 몸에서 베어 나온 기름 자국이 영역표시처럼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는 그림자 같이 시커먼 그 자리에 자신의 몸을 끼워 맞추며 누웠다. 텔레비전을 틀고 뉴스를 보며 세상 돌아가는 것을 배웠다. 버튼에 대한 군중 간의 논쟁에서 급진주의자가 승리한 모양이었다. 버튼을 부수자는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시위의 주동자인 한 남자가 화면에 나왔다. 울분이 사람이 되었거나 사람이 울분이 되었을법한 남자였다. 남자가 뭐라고 소리치며 말했지만 그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다른 뉴스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한참동안 뉴스를 보고 난 후에 세상의 이치에 조금 더 밝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그래서 만족스럽게 배를 두드리며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잠결에 현관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연애하던 시절 아내가 즐겨 뿌리던 향수 냄새가 어렴풋이 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버튼이 나타난 지 벌써 한 달 째로, 장마가 지난 뒤의 어느 날이었다. 그 해 장마철에는 유독 비가 많이 내려서, 빌딩으로 가득찬 도심 지역이 불어난 물 때문에 한동안 폐쇄되었을 정도였다. 사무실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건조한 볕이 들이닥쳤고, 도로 위를 달리는 차들은 메마른 궤적을 남겼다. 동일은 그 날도 여지없이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쓸모없는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손가락을 타고 모니터로 흘러들어간 글자와 숫자들이 그럴싸한 보고서를 만들었지만, 동일의 머릿속에는 이제 코앞으로 다가온 승진인사에 대한 잡념들만 가득했다. 소문처럼 K가 승진한다면 그는 K에게 다가가 진심으로 축하하는 척 하면서 주먹을 날릴 것이다. 그러면 K는 기쁜 마음으로 장난을 받아주면서 고맙다고 그에게 인사를 할 것이다. 근사한 그림이 그려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직원들은 동일과 K의 진심어린 우정에 박수를 보내리라. 그는 공상을 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그의 공상은 훼방꾼의 등장으로 깨지고 말았다. 부장의 호출이었다.


그는 지난 십 년간 단 한 번도 굳게 닫혀있는 부장실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부장실은 그에게 있어 미지의 영역이자 버튼을 설치하는 일부터 승진 인사까지, 세상의 모든 신비가 시작되는 곳이었다. 양쪽으로 높게 솟은 파티션 성벽을 지나자 굳게 닫힌 나무문이 드러났다. 그는 마른 침을 삼켰다.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도 모르는 불운하고 아둔한 죄수처럼 조심스레 부장실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아무 반응이 없자 그는 덜컥 겁이 났다. 그가 K를 위해 준비한 계획을 눈치 챈 부장이 그에게 벌을 주려한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부장실 문이 열리고, 안에서 예상치도 못한 인물이 걸어 나왔다. K였다. K는 얼굴빛이 어두웠는데, 늘 웃고 있는 K에게 어울리지 않는 색깔이었다. K는 동일의 얼굴을 한 번 힐끔 쳐다보더니 그를 그대로 지나쳐버렸다. 그는 K의 이상한 태도가 자신의 불행을 예견하는 것 같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들어오라는 부장의 손짓을 보고도 들어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동일은 고개를 숙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부장은 모니터로 뉴스 동영상 하나를 보고 있었다. 도심을 덮친 장마로 불어난 물 때문에 모든 것이 마비되었을 때를 찍은 영상이었다. 다급한 아나운서의 목소리 뒤로 흙탕물에 뒤덮인 도시가 드러났다. 홍수가 나서 세상이 멸망하면 저런 모습이겠구나 하고 동일은 생각했다.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미처 홍수를 피하지 못한 주인 잃은 자동차들만 덩그러니 남아 도로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차오른 물 때문에 윗부분만 간신히 보일 지경이었다. 부장은 그에게 의자를 권하며 앉게 했다. 그는 의자에 앉으면서도 부장이 왜 이 영상을 보여주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눈만 껌뻑였다.


갑자기 화면이 바뀌었다. 카메라가 줌 인 하면서 도로 위의 한 지점을 비추었는데, 분명 물살도 아니고 자동차도 아닌 무언가 까만 것이 움직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이었다. 그는 검은 서류가방을 머리 위에 얹은 채 가슴까지 차오른 물을 간신히 거스르며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어느 건물 앞에 도착하더니, 계단을 올라 건물의 차양 아래로 들어섰다. 비가 들이치지 않는 것을 확인하자 머리에 우산 대신 쓴 서류가방을 내리고 손으로 툭툭 쳐서 물기를 털어냈다. 그러나 그 신사는 방송국의 중계 헬기가 공중에서 그를 비추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 분명했다. 만약 그랬다면 빠진 머리카락 때문에 새 둥지처럼 보이는 자신의 반 대머리를 사람들이 훤히 볼 수 있도록, 성급하게 가방을 고쳐드는 실수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상을 보는 내내 어리둥절해하던 동일은 그제야 영상 속 인물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화면 속의 동일은 옷을 툭툭 털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영상이 끝나자 부장은 감탄한 듯 눈을 반짝이며 동일을 돌아보았다.


“아주 인상적이었네.”


그는 부장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십 년간 제자리를 머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타고난 둔감함이었다. 뭐라고 변명해야할지 생각이 안나 우물쭈물하는 사이, 부장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 전날에 직원들에게 출근하지 말라고 연락이 갔을 것인데, 대체 왜 출근한 건가?”


부장의 질문에 그는 있는 대로 솔직히 “연락을 못 받았습니다. 버튼을 누르기 위해서 출근했습니다.”라고 답했다. 부장의 날카로운 두 눈이 거짓말을 하는 혀를 베어버릴 것 같아서 자신도 모르게 대답이 터져 나왔다. 대답을 들은 부장의 눈이 더욱 날카롭게 빛나는 바람에 그는 목을 움츠려야만 했다.


“인상적이군. 그래도 나는 공정해야하는 입장이니까 이해해주게나. 그래서 말인데, 질문 한 가지만 더 하겠네. K는 버튼을 잘 누르고 있는가?”


동일은 질문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K가 버튼을 누르고 있는지 안 누르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줄만 서고 버튼 앞까지 가서 버튼은 누르지 않은 채 사무실로 돌아온다 하더라도 누가 그것을 알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아주 우둔한 사람이라도 기지를 발휘하는 때가 있기 마련이었다. 아니면 동일의 마음속에 있는 K를 미워하는 악마가 그에게 귀띔을 해주었을 것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그 짧은 순간에 K가 스치며 했던 말을 떠올렸을 리가 없었다. 동일은 약간은 모호한 태도로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라고 답했다. 부장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것이 전부였다. 동일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정말 꿈같은 일은 그 날 오후에 일어났다. 하루를 마감하고, 모처럼 현명함을 발휘해 부장실에 있었던 일까지 이미 지난 일로 잊어버리려고 하는 찰나였다. 부장은 그 층의 직원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눈치 빠른 직원들은 그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감했다. 회사에 살고 있는 새들이 퍼뜨린 소문이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순간이 오고야 만 것이다. 그 새들은 K의 이름을 노래했지만 이상하게도 노래의 주인공은 오늘따라 하얗게 질린 얼굴로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게다가 금방이라도 도망치려는 사람처럼 안절부절 못하며 온 몸을 떨고 있었다. 반면 무념무상파의 대표 주자였던 동일은 벌어지고 있는 일에서 도망치기 위해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그런데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으리라고 헛된 기대를 하며 눈을 뜨자, 사람들이 그를 향해 박수를 치고 있는 이상한 광경이 보였다. 그는 어리둥절해하며 박수를 치던 사람 중 하나에게 물었고, 그제야 자신이 십년 만에 승진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집으로 가는 중에도 도저히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진짜인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와 반대로 모든 승리의 권한을 잃은 K는 그길로 어디론가 사라졌다. K가 어디로 사라졌고, 언제 다시 나타날지 누구도 묻지 않았고,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모든 것이 하룻밤 사이에 바뀌었다. 지금껏 집에서 투명인간이었던 그는 이제 더 이상 가구보다 못한 하찮은 존재가 아니었다. 아들은 그가 집에 돌아오면 하던 게임을 멈추었고, 아내는 더 이상 친구들과의 모임—그녀가 말하기로는 그러했다—에 나가지 않았다. 저녁엔 세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따뜻한 밥과 반찬을 먹었다.


“외식 한 번 해야지? 승진도 했는데.”


행복의 절정은 그가 저녁을 준비하려는 아내를 말리고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아들과 아내는 존경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골목대장처럼 멋지게 가족을 이끌고 식당으로 가서 소고기를 배터지게 먹었다. 그는 배를 두드리며 이를 쑤셨다. 아들도 존경하는 아버지를 따라 배를 두드리며 이를 쑤시는 흉내를 냈다. 그날 저녁 그는 승진 후에 아내가 허락해준 안방의 퀸 사이즈 침대로 돌아왔다. 아내는 모로 누워 샤워하는 그를 기다렸다. 그날 밤 그의 늠름한 물건 때문에 아내가 질러대는 비명으로 집안이 무척 시끄러웠다. 한 때 투명인간이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던 소파만이 그의 흔적을 간직한 채 거실에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었다.


동일은 이제 열렬한 버튼의 광신도가 되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먼저 사람들에게,


“버튼 누르셨습니까?”


하고 아침인사를 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전과는 달리 존경심을 담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버튼 누르셨습니까?”하고 회답을 했다.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버튼을 두 번도 모자라 세 번 누르고 자리로 돌아갔다. 모든 것이 전과 달랐다. 그는 이제 어느 삼십대 못지않게 젊어보였다. 정력과 활기가 넘쳐서 지나가는 여직원들이 그를 보고 수군거릴 정도였다. 게다가 놀랍게도, 현대의학마저 손을 놓아버린 그의 머리가 다시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는 일을 하다가도 종종 머리 가운데를 만져 까끌까끌하게 자라나는 새싹들을 만지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러다가도 혹시나 너무 만져서 도로 머리카락이 빠질까봐 깜짝 놀라며 손을 내리는 것은 그 혼자만 알고 있는 우스운 비밀이었다.




군중들은 행진을 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조금씩 알큰하게 취해있었는데, 일부는 정말로 초저녁에 마신 술 때문이었고, 대부분은 행진이 자아내는 축제 같은 분위기 때문이었다. 버튼을 누르던 손은 이제 횃불을 들고 있었다. 횃불이 없으면 촛불을 들었고, 촛불이 없으면 빈손으로 마음의 불만 밝혔다. 버튼을 누르던 손들은 이유를 몰랐지만, 불빛을 든 손은 이유를 알았다. 그들은 손으로 홍수를 이루며 거리를 활보했다. 광장에서 시작한 행진은 어느덧 동일의 사무실이 있는 지역을 거쳐, 차벽에 둘러싸여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장소까지 나아갔다. 누군가 광장 한 가운데 설치된 무대 위에 올라서서 구호를 외쳤다. 예전에 울분이었다가 이제는 사람이 된 남자였다.

“버튼을 철폐하라!”

그러자 성난 군중들의 목구멍에서 구호의 물결이 일었다. 그들은 무대 앞에 어디선가 가져온 여러 대의 버튼을 쌓아올렸다. 그 주위로 나뭇단을 쌓고 언제든지 봉화를 올릴 준비를 했다. 곧, 한 때 울분이었던 남자가 나뭇단에 불을 놓았다. 솟아오르는 불 속에서 버튼은 기묘한 비명을 질렀다. 물론 단순한 기계에 불과한 버튼이 진짜로 비명을 질렀을 리 없다. 그러나 왠지 주변에 모인 군중들은 버튼의 비명을 들은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군중들이 왜 시위를 하고 있는지는 알지만, 누구를 상대로 시위를 하고 있는지는 몰랐다는 점이었다. 보통 시위의 대상이 되곤 했던 정부의 고위관료들도 어리둥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버튼은 그들에게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비밀의 하나였고, 다만 빳빳하게 다린 옷깃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비밀을 아는 척 행동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들은 밖으로 나가야할지 안으로 들어가야할지 갈피를 못 잡고 중간에서 방황했다. 그 상황을 지켜보는 진짜 ‘비밀’을 알고 있는 자들은 아마 조용히 그들을 비웃었으리라. 몇 주간 이어진 시위의 분위기는 무르익어 이제 사방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그러나 진짜 비밀을 아는 이들은 땅 속 어디론가 숨어버렸고, 공허한 메아리만 맴돌았다.


그 공허한 홍수의 흐름을 검은 양복의 남자 하나가 거스르고 있었다. 그는 누가 걸지도 않았는데 누군가의 발에 걸려 넘어지고, 누가 밀지도 않았는데 땅을 구르면서도, 이글거리는 눈을 감지 않고 시선을 고정한 채, 우직한 발걸음을 계속했다. 검은 서류가방을 방패삼아 군중의 함성을 막으면서도 그는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홍수의 한복판에서는 익사하는 것보다 길을 잃기가 쉬운 법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시위의 홍수를 거슬러 오른 그는 어느 건물에 도착하자 그제야 방패로 삼던 서류가방을 오른손으로 고쳐들고, 몸에 묻은 흙을 털 수 있었다. 그는 얼마 전 승진한 행운의 사나이, 동일이었다.


그 날 저녁까지만 해도 동일은 안방 침대에 누워 아내와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아내가 좋아하는 연속극 도중에 시위에 관한 속보가 나오지 않았다면 동일은 여느 때처럼 양치를 하고, 아내와 사랑을 나눈 후, 잠자리에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속보를 보았고, 유령에 홀린 사람처럼 홀연히, 그러나 홀린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강건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즐겨 입는 검은 정장으로 갈아입고, 서류가방을 메고 현관으로 다급하게 걸어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내에게,


“잠시 다녀오리다.”


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등이 어찌나 넓고 늠름하던지, 아내는 슈퍼히어로 영화에 나오는 영웅들보다 남편이 더 멋있어 보일 지경이었다. 아내는 조심히 다녀오라면서 현관문이 닫힐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멋들어지게 밖으로 나오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사실 동일의 속은 타들어가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층계를 뛰어 내려가서는, 도로로 뛰어가 막 떠나려는 광역버스를 간발의 차로 잡아탔다. 버스에 앉아서도 그는 온 힘을 다해 달리는 사람처럼 발을 굴렀다. 그런다고 버스가 더 빨리 갈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발을 굴렀다. 버스는 시위 인파에 막혀 평소 가던 길을 우회했다. 덕분에 그는 차에서 내려 시위대의 홍수를 뚫고 걸어가야만 했다.


빌딩에 도착한 동일은 자신을 귀찮게 할지도 모르는 야간경비의 눈을 피해 몰래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향했다. 낮 동안의 열기가 빠진 사무실은 낯설었다. 열어놓은 창으로 서늘한 공기가 들어왔지만 찐득거리는 그의 몸을 식혀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비척이며 복도를 걸었다. 진짜 홍수에도 끄떡없었던 그의 검은 정장은 넝마가 되어 너덜거렸다. 복도의 끝에 도달하자 그곳에는 하얀 천에 쌓인 버튼이 있었다. 다행이 폭도들의 손길이 사무실까지는 닿지 못한 모양이었다. 천을 들쳐 버튼이 잘 있는지 확인하고, 혹시 가짜가 아닐까 싶어 버튼을 눌러 그 느낌까지 확인한 후에야 그는 안심하고 뒤로 돌아설 수 있었다.


그렇게 돌아서서 집으로 가려던 순간이었다. 마침 열어놓은 창으로 끝없이 많은 붉은 불빛들이 건물을 향해 몰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게다가 불빛들을 맨 앞에서 이끄는 것은 한 때 그의 숙적이었던 K였다! 5층에서 내려다보는 것이어서 제법 거리가 있었지만 그는 똑똑히 K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종적을 감추었던 K가, 언젠가 그에게 복수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가, 드디어 시위대를 이끌고 그에게 복수하러 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재빨리 뛰어가 사무실 문을 걸어 잠갔다. 가까이에 있는 책상을 옮겨 문 앞을 막아놓았다. 두 사람이 들어도 옮기기 힘든 책상을 혼자 옮겼는데, 도대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본인도 놀랄 정도였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아무래도 안심이 되질 않았다. 그는 이 사무실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를 알고 있었다. 황급히 뛰어가 부장실의 문을 열었다. 다행이도 부장실의 문은 열려있었다.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니 시위대의 불빛이 파도처럼 건물로 들어닥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재빨리 뛰어가 버튼을 번쩍 들고—이번에도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다—단번에 부장실 안으로 옮겼다. 그곳이라면, 나무문 앞에 붙어있는 부장실이라는 글자가 부적처럼 버튼을 지켜줄 것이 분명했다. 그는 부장실 문을 잠갔다.

곧 시위대의 들끓는 웅성임이 들려왔다. 웅성임은 계단을 타고 올라와 금세라도 막아놓은 사무실 문을 부수고 들어올 것만 같았다. 그는 젖은 눈으로 버튼을 내려다보았다. 선명한 붉은 색의 버튼은 하얀 천으로 가려놓았음에도 정숙하지만 터져나오는 욕망을 감춘 여인의 젖꼭지처럼 도드라졌다. 그는 신부의 면사포를 벗기듯 조심스레 천을 벗겨냈다. 관대한 만큼 아름다운 붉은 플라스틱 버튼이 드러났다. 그는 천천히 버튼을 감싸 안았다. 허리까지밖에 오지 않는 버튼의 높이 때문에 그는 엉거주춤한 꼴이 되었다. 점점 폭도들의 발소리가 가깝게 들려왔다. 그는 바스티유 감옥을 지키는 마지막 간수장의 심정이 되어 버튼을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는 화석처럼 그대로 굳어버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밤사이 시위대는 사무실까지 들이닥치지 않았다. 아침이 되었을 때 직원들은 열리지 않는 사무실 문 때문에 무척 애를 먹었다. 특히 부장은 자신의 방 안을 들여다보고는 깜짝 놀라서, 차가운 물을 종이컵으로 세 잔이나 들이키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문을 따고 들어간 방 안에는 버튼과 하나가 되어버린 인간 매미가 있었던 것이다. 용감한 직원들이 다가가서 확인해본 결과 인간 매미가 과거 동일이란 이름을 가진 직원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여름철 내내 실컷 울어댄 매미가 장렬히 산화하듯, 인간 매미도 죽은 것처럼 꼼짝 않고 버튼에 붙어 있었다. 다만 가끔씩 푸르르륵 휘유 하고 내뱉는 괴상한 숨소리만이 그가 살아있음을 가늠하게 했을 뿐이었다. 부장은 인부를 불러 버튼과 인간 매미를 통째로 치워버렸다. 인부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인간 매미에게서 한 움큼 빠진 머리카락이 그림자처럼 남아있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인간 매미는 회사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가 돌아왔을 때 보았던 세상은 그가 이전에 알던 세상과는 조금 달랐다.


시위대는 정권을 바꾸는데 성공했다. 정부의 고위관료들은 자신들과 버튼을 설치한 모종의 ‘세력’간의 관계를 부인했지만, 그 세력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도, 그 세력과의 관계가 없음을 증명하는 것도 실패했다. 결국 그들은 거리에 나앉았고, 시위대의 중심에서 버튼을 철폐하라고 외쳤던, 한 때 울분이었던 사내가 새로운 정부의 수장이 되었다. 새 정부는 ‘버튼 없는 세상’을 표방하며 한 동안 잘나갔다.


K도 사무실로 돌아왔다. 어디를 다녀왔는지 온 몸이 가무잡잡해져서 이제는 더 이상 쉽게 얕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게 되었다. 그는 아무에게도 자신이 어디에 다녀왔는지 밝히지 않았다. 소문을 좋아하는 새들은 그가 돌아오자마자 그를 특별승진 대상자 목록에 올렸다. 이번에는 새들의 예상이 맞아 떨어져, K는 돌아온 지 두 달도 되지 않아 승진했다. 이후에도 그는 승승장구했고, 중요한 사람들이 모이는 중요한 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사람이 되었다.

가엾은 인간 매미는 버튼이 사라진 후 물 먹은 종이처럼 기운이 빠져 지냈다. 붉게 빛나던 건강한 얼굴은 다시 병자가 되었고 성큼성큼 걷던 걸음걸이는 비척거리기 시작했다. 아내는 다시 향수를 뿌리고 친구들을 만나러 나갔고, 그는 아들의 방 앞을 발소리 나지 않게 지나쳐 예전의 보금자리인 퀴퀴한 냄새나는 소파로 돌아가야 했다. 회사에서는 무념무상파의 멤버들이 예전 멤버의 귀환을 축하했다. 그들의 방식대로 그들은 서로 눈인사도 하지 않고 그저 약속한 시간에 고개를 까딱이는 것으로 그의 환영식을 대신했다.


버튼은 그렇게 왔던 것처럼 조용히 사라졌다. 사람들의 일상은 산 속 깊은 곳의 호수와 닮은 데가 있었다. 누군가 돌을 던지면 금새 파문이 일었다가, 돌이 가라앉고 바람이 멎으면 다시 금세 잔잔해졌다. ‘버튼 누르셨습니까?’라는 아침인사는 ‘좋은 아침입니다’로 바뀌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갔지만 인간 매미만은 그러지 못했다.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책상에 뺨을 붙이고 버튼이 있던 쪽을 바라보았다. 버튼이 있던 자리는 이제 최신형 커피머신이 차지했다. 커피머신은 다양한 종류의 원두 향으로 직원들을 유혹했다. 직원들은 무슨 맛을 선택하던지 똑같은 맛을 내던 자판기 커피 대신, 자신의 취향에 맞는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날, 인간 매미 동일은 갑자기 일어나 커피머신으로 향했다. 그는 사람들 뒤에 느슨하게 줄을 서있다가, 자신의 차례가 되자 경멸하는 눈빛으로 커피머신을 내려다보았다. 부드러운 곡선 디자인을 강조해 소비자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은 최신형 제품이었다. 다른 직원들이 어떻게 커피를 내리는지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던 동일은 그들의 흉내를 내며 커피를 내렸다. ‘콜롬비아산 원두’라고 쓰여있는 버튼을 누르자 친환경 코팅이 되어있는 종이컵에 향기로운 커피가 한가득 담겼다. 그는 커피잔을 손에 들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커피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늘 하던대로 책상에 뺨을 붙이고 커피머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커피머신 앞에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직원들이 줄을 서 있었다. 동일은 그들을 한참동안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언가 깨달은듯 씨익 미소를 지었다. 입도 대지 않은 동일의 커피는 강렬한 향만 남기고 서서히 식어갔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