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의 아내

단편문학 챌린지 - 5화

by 데카당스

(기존에 지은 글을 삽화와 함께 브런치북으로 옮겼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외교관이라는 사실이 무척 자랑스러웠다. 만나는 사람마다 떠벌리고 다니는 바람에 사람들은 그녀의 이름은 기억을 못 해도 남편이 외교관이라는 사실은 알았다. 그런 그녀의 태도를 대놓고 흉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녀는 단지 그들이 부러워서 그런다고 여기며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무척 젊고 아름다웠다. 마을 남자들이 두꺼운 옷으로도 가릴 수 없는 그녀의 육감적인 몸매를 아내 몰래 슬쩍 쳐다볼 정도였다. 그러고 나면 남자들은 살집이 붙어 처녀 때 미모를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든 아내를 바라보고 한숨을 내쉬곤 했다. 아내들은 대체 왜 남편들이 한숨을 쉬는지 몰랐지만 이상하게 그녀를 미워했다. 아마 여자의 본능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아끼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집 뒷마당에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화원이었다. 프리지어, 포인세티아, 장미를 비롯해 여러 종류의 꽃들이 가득한 화원이었다. 화원 한가운데에는 비를 막기 위한 하얀 파라솔 아래에 마찬가지로 새하얀 티테이블이 놓여있었다. 티테이블과 화원은 그녀가 이사 오기 전에 살던 노파가 만들어놓은 것이었는데, 그녀와 남편이 이 집을 선택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녀는 손가락 끝부분까지 쪼글쪼글해진 전 주인으로부터 화원을 물려받아 자신의 독특한 감성으로 그곳을 변화시켰다. 가장 먼저 한 것은 화원을 둘러싼 낮은 돌담을 치우고 대신 초록 덤불을 두른 것이었다. 그다음에는 전 주인이 이국에서 가지고 왔다는 괴이한 모양의 동물 조각상을 분수로 교체했다. 이제 화원은 전 주인이 즐겨 앉던 안락의자 같은 편안함보다는, 그녀가 늘 마음에 품고 사는 들뜬 푸르름을 간직하기 시작했다. 하루 일과를 마친 그녀는 화원 한가운데에서 여유롭게 차 한잔을 즐겼다.


화원은 그녀의 자랑이 되었다. 그녀는 손님이 올 때마다 화원을 구경시켜주었다. 손님들의 칭찬을 듣는 것이야말로 삶의 낙이었다. 즐거움은 칭찬하는 손님의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커졌다. 한 번은 장관 내외가 부부의 집을 찾은 적이 있었다. 그녀가 정성스레 준비한 식사를 마치고 그들은 정해진 수순에 따라 화원의 티테이블에 앉았다. 그녀는 값비싼 중국차를 조심스렇게 내놓고, 눈빛을 반짝이며 장관 내외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정원이 정말 멋져요.”


장관 부인은 그 말과 함께 자신의 칭찬이 거짓이 아님을 확인시켜주듯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는 시험에서 백 점을 맞은 모범생처럼 들떴다. 가슴이 터질 듯 부풀었지만 그녀는 외교관의 아내답게 침착함을 유지했다. 그러나 흥분한 그녀의 맥박이 손등을 타고 장관 부인에게 전해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녀와 장관 부인은 중요한 사람의 아내들만이 알 수 있는 은밀한 신호를 서로 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들은 골프와 주식 이야기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 후로 화원을 가꾸는 그녀의 손이 더욱 분주해졌다. 시든 꽃이 있으면 손님이 오든 말든 새 꽃을 사다 갈았다. 화원은 상상 속의 낙원처럼 늘 완벽한 상태를 유지해야만 했다. 손은 흙으로 더러워지고 몸에서는 땀 때문에 시큼한 냄새가 났지만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낙원이 완벽한 모습으로 돌아올 때마다 만족감이 느껴지고 마음이 편안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꽃이 시들거나하면 손톱을 잘근거리며 씹었다. 남편이 기억하기로는 그녀가 불안할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습관이었다. 그녀는 다시 꽃을 심고 화원이 완벽해지고 나서야 손톱 물어뜯는 것을 그만두었다. 비가 세차게 왔던 어느 날에 그녀는 거의 기절하기 일보직전까지 갔었다. 손톱을 죄다 물어뜯어 짧은 손톱이 그마저도 오돌토돌해졌다. 그녀는 그 정도로 화원을 아꼈다.


그런데 평온하기만 하던 그녀의 삶에 지금껏 없던 커다란 적이 나타났다. 바로 한 떼의 두더지가 그녀의 화원을 망쳐놓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그 녀석들의 존재를 처음 눈치챈 것은 장관 내외가 다녀갔던 밤이었다. 침대 머리맡에 팔을 올리고 누워서 잠을 청하던 중, 어디선가 삑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기소리가 더 크게 들릴 만큼 작은 소리였지만 예민한 그녀의 감시망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소리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주기적으로 들려오는 소리를 따라 침실 안을 돌았다. 그러나 소리가 작아지리라 생각되는 곳에서는 소리가 커지고, 소리가 커지리라 생각되는 곳에서는 되려 소리가 작아지는 바람에 그녀는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아마 그녀보다 더욱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라 하더라도 이 조그마한 악마들의 장난을 알아챌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손님을 맞이하느라 기운을 다 써버린 그녀는 감각이 무뎌져 있는 상태였다. 그녀는 신경이 쓰였지만, 결국 피곤함을 이길 수 없어 무시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것이 화근이었다. 며칠 후부터, 화원 군데군데에 작은 구멍이 뚫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처음 포인세티아 밭에 손가락만 한 구멍이 뚫렸을 때 그녀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화원에 더부살이하는 지렁이나 벌레들도 충분히 그런 구멍들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지렁이나 벌레들은 화원의 흙을 기름지게 했기 때문에 오히려 반가운 손님이었다. 구멍이 점점 많아지고, 꽃들이 시들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무언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프리지어 꽃 몇 송이가 뿌리째 뽑혀 바닥에서 나뒹구는 것을 발견했고, 그녀는 악마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꽃송이를 붙잡고 오열했다.


그녀는 당장 해충퇴치 업체에 연락을 했다. 전화를 받은 직원은 심드렁했다. 두더지를 퇴치할 수는 있지만 그러려면 땅을 다 갈아엎어야 한다고 했다. 땅을 갈아엎지 않고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냐 물었지만, 그런 기술이 있으면 오히려 자신들이 배우고 싶은 심정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녀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열심히 수소문한 끝에 약을 이용하는 방법과 덫을 놓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녀는 두 가지 방법을 총동원하기로 했다. 충분한 계획과 섬세한 실행이 뒷받침된다면 화원에도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도 들었다.

당장 달려가 약과 덫을 한 뭉텅이 사온 그녀가 다음으로 할 일은 두더지의 집을 찾는 것이었다. 두더지들은 집과 먹이터를 구분했다. 두더지들은 낮 동안 어딘가의 집에서 실컷 자다가 밤이 되면 먹이터인 화원으로 기어들어와 지렁이나 벌레 따위를 잡아먹으며 화원을 망쳐놓았다. 먹이터인 화원에 약을 친다면 효과는 있을 테지만 독한 약 때문에 꽃이 전부 시들어버릴 것이 분명했다. 화원에 덫을 놓는다면 몇 마리는 잡히겠지만, 영악한 두더지들이 새로 굴을 파버리면 그걸로 그만이었다. 고민한 끝에 집과 먹이터 사이를 잇는 통로를 공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녀는 곧바로 행동을 시작했다. 기억을 되짚어가며 구멍이 처음 시작된 부분부터 마음속으로 두더지 굴 지도를 그렸다. 굴은 포인세티아 밭에서 시작해 장미밭, 그리고 프리지어 밭으로 이어졌다. 두더지의 본거지로 향하는 굴은 가장 먼저 굴이 뚫린 포인세티아 밭에서 연결되어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포인세티아 밭에서 두 발자국 떨어진 곳의, 굴이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지점 주변에 약을 뿌리고 덫을 골고루 놓았다. 계획대로라면 밤사이 습관대로 먹이터로 가던 놈들이 약과 덫의 습격을 받고 뒤집어져 죽을 것이다. 그녀는 씩 웃으며 잠자리에 들었다. 남편인 외교관이 무슨 좋은 일이 있느냐 물었다. 그녀는 아무 일도 아니라고 답했다. 자신의 음흉한 생각을 남편이 볼 수 없도록 감추었다.


“그건 그렇고, 이번 주말에 부통령 내외가 오시기로 한 것 알지?”


남편은 최대한 그녀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는 듯 지나가는 말로 얘기했지만 그녀의 심장은 격렬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부통령 내외라니! 그녀는 남편이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몹시 좋았다. 게다가 화원을 자랑할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장관 내외의 칭찬에도 얼마나 가슴이 벅차올랐던가. 부통령 내외의 칭찬을 들으면 그녀는 그만 기절해버릴지도 몰랐다. 그녀는 걱정 말라며 남편을 안심시켰다. 남편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잠에 들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그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물론 실망시키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빌어먹을 두더지 녀석들을 모조리 박멸해야만 한다. 그녀는 속으로 다짐했다.




다음날 아침, 그녀는 경악했다. 화원 어디를 둘러보아도 배를 까뒤집고 죽어있는 두더지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화원은 이전보다도 더욱 엉망이 되어 있었다. 프리지어 밭은 이미 쑥대밭이 되었고, 장미는 시들고, 포인세티아 밭은 간신히 버티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녀는 손톱을 입에 물고 잘근잘근 깨물었다. 아찔한 현기증이 몰려와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온 힘을 쏟아부어야만 했다.

영악한 녀석들! 두더지들은 귀신같이 약을 치고 덫을 놓은 부분을 피해 새로 굴을 팠다. 화원의 일부를 망치면서까지 약을 쳤는데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당장 주방으로 뛰어들어갔다. 나왔을 때는 두 손에 고무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고무장갑 안에는 라텍스 장갑을 이중으로 꼈다.


그녀는 손으로 땅을 파며 두더지 굴을 거슬러 올라갔다. 두더지 굴이 있는 곳은 이미 땅속이 비어있어 쉽게 무너져 내렸다. 테라스 창에 흙투성이가 된 그녀의 모습이 비쳤다. 그 모습이 영락없는 두더지 꼴이었다. 두더지를 잡으려면 두더지가 되어야 하는 법이지. 그녀는 그런 말로 자신을 타일렀다.

한참을 파헤치자 드디어 모든 굴이 하나로 이어지는 지점이 나타났다. 굴들은 그 지점에서 모여 하나의 커다란 통로를 통해 뒷마당 구석으로 향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살짝 구멍을 뚫으며 굴의 방향을 확인했다. 통로가 무너지면 또 새로운 통로를 뚫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신중을 기했다. 뒷마당 구석으로 향한 통로는 담장을 너머 옆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당장 장갑을 벗어던지고 약봉지와 덫을 들고 옆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옆 집 문 앞에 도달했을 때 그녀는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옆 집에는 ‘그 노인’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이사오던 날 자신을 음흉한 눈빛으로 쳐다보던 노인을 떠올리자 그녀는 더러운 것을 먹은 것처럼 찜찜했다.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는 편이었다. 그러나 노인의 끈적끈적한 시선은 피하고 싶었다. 게다가 소문은 또 어떻고. 말하기 좋아하는 동네 부인들에 따르면 노인은 살인과 성폭행 전과까지 있는 악마였다. 이 마을에는 유배되듯 쫓겨와 유유자적 살고 있지만 한 때는 못 말리는 망나니였다고 했다. 믿기 어려운 소문이었지만 소름 끼치는 눈빛은 소문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듯했다.


그녀는 문을 두드리려던 손을 내려놓았다. 화원을 망쳐놓은 녀석들에 대한 분노가 그녀를 밀어 여기까지 오게 했지만, 막상 문을 두드리려니 두려움이 되살아났다. 문을 열면 악마가 튀어나와 그녀를 그대로 삼켜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외교관의 아내였고,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녀는 용감하게 문을 두드렸지만 그 순간 후회되었다. 돌아서려고 하는데 몸이 돌아가질 않았다. 문 앞의 석회 바닥에서 손들이 튀어나와 그녀의 발목을 잡아 끄는 것 같았다. 아직까지 문 안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아무래도 노인은 집을 비웠거나 아니면 조용히 악마로 변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이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간절한 염원이 통한 모양인지 발목을 잡아끌던 손도 느슨해졌다. 그녀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몸을 돌렸다.


그런데 걸음을 떼려던 찰나 문이 열리고 손 하나가 튀어나와 그녀를 붙잡았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바로 그 노인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오?”


노인이 태연하게 물었다. 평온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평온함 속에 감추어진 것이 있었다. 그녀는 그것이 먹이를 바라보는 포식자의 눈빛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당장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녀는 외교관의 아내였고,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 말이다.




외교관의 아내로서 갖추어야 할 소양 중 하나를 꼽자면 단연 침착함이라고 할 수 있다. 워낙 오가는 손님들이 많다 보니 외교관 본인보다도 더 침착해야 할 때가 많았다. 특히, 남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손님 부부간의 미묘한 기류를 눈치채려면 마음을 가라앉히고 오감을 예민하게 만들어야만 했다.


그러나 노인의 집 안에 들어간 그 날만큼은 침착하기가 어려웠다. 침착하기로 따지자면 어느 외교관의 아내보다도 뛰어난 그녀라도 말이다. 그녀는 노인이 이끄는 대로 커피 테이블 앞의 소파에 앉았다. 소파는 푹신하기보단 끈적였다. 그뿐 아니라 끈적이는 공기가 집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노인은 그녀를 커피 테이블 앞에 앉혀놓고 차를 가지러 갔다. 좁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노인이 비운 자리를 비추었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불안한 느낌을 지워버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집안에 감도는 이 살벌한 기운은 일반 가정에서는 절대 찾아볼 수가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녀는 이 사실을 잘 알았다. 왜냐하면 분명 감옥에 갇힌 아버지를 면회 갔을 때도 이런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어린 시절 무등을 태워줄 때처럼 그녀를 반겨주었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의 아버지는 철창 안에, 그녀는 철창 밖에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철창 안에서는 불안한 느낌이 스멀스멀 피어 나왔고, 그녀의 세포 하나하나가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의 기억 속 아버지는 어린 소녀를 잔인하게 살해한 살인자였다. 유난히 붉은 머리의 소녀는 머리색만 제외하면 자신과 닮았었다고 그녀는 기억했다. 그녀는 철창 안에 갇힌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아버지라고 불리는 살인자를 자신의 기억과 인생에서 지워버린 것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두 번 다시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다. 외교관의 아내에게 감옥에 있는 살인범 아버지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는 용기를 내기 위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노인은 주방에서 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손님에게 차를 대접하는 것이 집주인의 본분이라고 했다. 그녀는 이 노인이 범죄자일지언정 예의는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범죄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원래 소문이란 과장되기 마련이니까.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노인에 대한 무슨 단서라도 있을까 싶었다. 거실 안은 혼자 사는 노인답게 별다른 살림살이가 없었다. 커피 테이블과 소파, 티브이와 장식장이 전부였다. 텅 빈 장식장 한가운데에는 수수한 액자에 담긴 사진 하나만 놓여있었다. 사진에는 웃고 있는 어린 소녀와 노인의 모습이 있었다. 손녀딸과 찍은 사진임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사진을 보자 조금 마음이 놓였다. 노인을 둘러싼 소문은 조용하게 혼자 살아가는 사람들이 종종 겪는 악의적인 소문에 불과했다. 그녀는 저렇게 즐겁게 웃을 수 있는 노인이 살인을 저지를 리 없다고 생각했다.


노인이 돌아왔다. 그는 어떻게 알았는지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케모마일 티를 쟁반에 받쳐 가져왔다. 차 주전자에서 나오는 은은한 향이 마지막으로 그녀의 가슴을 감싸던 보호막을 깨뜨렸다. 그녀는 마음이 누그러져 미소까지 지었다. 노인은 그녀가 웃는 것을 보고 차를 따라주며 조심스레 웃었다. 눈가에 패인 주름이 왠지 친근하게 느껴졌다.


“내 손녀딸이라우.”


노인이 차를 따르면서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사진을 지켜보던 것을 들켰다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웠다.


“살아있었다면 아마 댁 나이 정도 되었을 거요.”


노인이 눈물을 글썽이는 통에 그녀는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케모마일 티의 향이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안개를 걷어냈다.


두 사람은 두더지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노인은 화원을 망치는 두더지 얘기를 듣고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그녀는 가져온 퇴치 약과 덫을 건네었고, 노인은 반드시 두더지를 잡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녀는 오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오해받고 있는 불운한 영혼을 알아가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두더지 문제 또한 진전이 있었다. 그녀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케모마일 향이 입안을 적셨다.


그리고 그녀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그녀는 두통과 함께 깨어났다. 차가운 한기가 등을 타고 오싹하게 올라왔다. 깜짝 정신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두컴컴한 공간 한쪽에 촛불이 걸려있었다. 깜빡이는 촛불 옆으로 희미하게 계단 같은 것이 보였다.


그녀는 심호흡을 했다. 침착하게 우선 상황을 파악해보자. 그녀는 지하굴 같은 곳에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훅 불어와 그녀의 등을 때렸다.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알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누가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수치심이 느껴져서 가슴을 가렸다. 그녀는 발을 조심스럽게 내딛으며 계단을 올랐다. 계단 끝에는 단단한 철문이 있었다. 온 힘을 다해 철문을 열었지만 철문은 밀어도, 당겨도 열리지 않았고 차가운 손잡이의 느낌은 그녀를 비웃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니, 자신이 자신을 어떤 상황으로 밀어 넣었는지 알게 되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녀는 고작 두더지를 잡겠다고 자신을 살인마의 입 안으로 밀어 넣었던 것이다. 잠시나마 노인을 좋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자신을 원망했다. 노인이 그녀를 가둬놓고 어떻게 요리할지 고민하는 광경이 떠올랐다. 노인은 늙은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강한 힘으로 그녀를 범할 것이다. 아마 노인 안에 사는 악마가 노인에게 힘을 빌려줄 것이다. 악마는 아마 지혜도 빌려주었을 것이다. 그래. 처음부터 모든 것이 계획되어 있었다. 두더지를 풀어놓은 것도 그녀를 유인하기 위한 노인의 수작이었다.


이제 철문에서는 차가운 침묵만이 흘렀다. 그녀는 다시 한번 철문으로 다가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철문이 덜컥 열리고 노인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녀는 발소리도 들리지 않게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후웅 하는 바람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바람소리가 들려온 것은 어두운 벽 쪽이었다. 희미한 촛불의 불빛마저 닿지 않는 곳에 시커먼 어둠이 있었다. 그 어둠보다 더 어두운 것이 입을 쩍 벌리고, 바람을 불며 그녀를 유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바람이 나오는 곳에 손을 댔다. 차가운 벽 가운데에 유독 축축한 것이 느껴졌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부분만 벽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바람에 실려 신선한 흙냄새와 아주 희미한 꽃향기, 그리고 화학약품 같은 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보이지 않으니 더 잘 느껴지는 것들이 있었다.


축축한 부분을 손톱으로 긁어내니 쉽게 바스락거리며 떨어져 나왔다. 한 동안 미친 사람처럼 벽을 파 들어가자, 엎드려서 충분히 지나갈 수 있을만한 크기의 통로가 나왔다. 그녀는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통로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녀의 아직 뜨거운 알몸은 사방을 둘러싼 축축한 흙 사이를 간신히 헤집고 지나갔다. 흙은 머리며, 등이며, 허리며, 엉덩이며, 다리며, 은밀한 부분까지 모든 곳에 스며들었고, 흙 사이로 튀어나온 부드러운 뿌리 같은 것들이 그녀의 몸을 아찔하게 간질였다. 흙의 애무에 그녀는 정신이 아찔했지만, 바람이 흘러오는 쪽을 향해 무작정, 간신히 몸을 밀어 넣을 뿐이었다.


끝없는 통로라는 생각이 들 무렵 앞 쪽에서 빛의 기둥이 보였다. 다가가 보니 통로 천장에 뚫린 구멍에서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이었다. 구멍으로 내다보니 익숙한 하늘이 보였고, 포인세티아 향이 났다. 그러나 곧 익숙하지 않은 고통이 다리를 덮쳤다. 그녀는 입술을 물고 본능적으로 빛이 새어 나오는 천장의 작은 구멍을 손으로 파냈다. 후드득 떨어져 내린 흙이 그녀의 얼굴과 머리에 엉겨 붙었다. 드디어 벌레가 번데기를 뚫고 나오듯, 그녀는 굴을 뚫고 땅 위로 올라갔다. 온몸이 흙으로 덮여 그녀의 모습은 한 마리의 두더지와 다를 바 없었다.


다시 한번 찌릿한 고통이 다리에서부터 몰려왔다. 덜컥 겁이 나서 다리 쪽을 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떨리는 손을 대보니 차가운 쇠붙이가 만져졌다. 쇠붙이 위로는 뜨끈하고 끈적한 것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평온하고 행복했던 일상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고통은 오히려 그녀의 정신과 영혼을 더욱 맑아지게 만들었다.


그녀는 깨달았다. 살인자인 아버지의 몸에 흐르는 피는 그녀에게도 똑같이 흐르고 있었고, 언젠가는 이렇게 될 것을 그녀는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 두더지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알몸을 가려줄 외교관이라는 직책의 남편처럼, 무언가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화원을 완벽한 상태로 가꾸는 것에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완벽한 상태의 화원이 망가지는 것에 즐거움을 느꼈다. 완벽하면 완벽할수록 망가질 때 더욱 큰 즐거움을 주었기 때문에 화원을 완벽하게 가꾸었을 뿐이었다.


장관 내외와의 완벽한 식사도 겉모습뿐이었다. 그녀는 장관 부부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감지했고, 그래서 장관이 티테이블 사이로 발을 올려 자신의 은밀한 곳을 호기심 넘치는 어린아이처럼 탐험할 때도 가만히 있었고, 오히려 장관 부인이 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그 발을 조심스럽게 움직여 쾌락을 탐했다. 그녀가 장관 부부의 방문에 그토록 만족했던 것은, 그토록 완벽한 것이 망가져있다는 자신만이 알고 있는 비밀 때문이었다.


처음 이사 온 날 그녀는 두더지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제 두더지가 되기로 마음먹었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한 마리의 완벽한 두더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일이 있은 후 몇 달이 지났지만, 그녀의 남편은 지금까지도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알몸으로 화원에서 발견되었고, 다리에는 두더지를 잡겠다고 놓은 덫이 걸려 있었다. 남편이 황급히 그녀를 깨웠을 때 그녀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 날 있었던 일에 대해 부부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암묵적인 약속을 했다. 그녀는 두더지 덫을 놓다 실수로 다리를 다친 것이었다.


망가진 화원은 더 이상 손쓸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그녀는 급하게 업체를 불러 화원을 파내고 수영장을 만들었다. 화원을 파낼 때 그녀는 온몸을 부르르 떨며 혼절해버렸다. 남편은 그녀가 충격 때문에 쓰러졌다고 믿었지만, 진짜 내막은 그녀만이 알고 있었다. 결국 부통령 내외와는 밖에서 식사를 해야 했다. 그녀는 부통령 내외간의 미묘한 기류를 눈치채고는 또 한 번 마음이 한껏 부풀어올랐다.


노인은 얼마 후 경찰에 체포되었다. 암매장당한 붉은 머리 소녀의 시신이 어떤 주에서 발견되었는데, 시신에서 채취된 정액의 DNA가 노인의 것으로 밝혀졌다. 그녀는 그가 체포되던 날 시끄러운 소리에 밖으로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노인은 끌려가면서도 그녀에게 자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끈적한 눈빛을 던지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나고 평온이 돌아왔다. 그녀는 흔들의자에 앉아 라디오를 들으며 흥얼거렸다. 라디오에서는 흘러간 지난 노래가 반복해서 나왔다. 그녀는 불룩해진 배를 쓰다듬으며 생명을 잉태한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따뜻한 날씨 탓에 선잠에 들었다. 그녀는 아기를 낳는 꿈을 꾸었다. 자신의 탄생을 알리듯 아기는 힘찬 울음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것은 아기가 아니었다. 완벽한 한 마리의 두더지였다.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손톱을 입에 물고 잘근잘근 씹었다. 뜨거운 것이 가슴 한복판에서 올라왔다. 아기를 낳는다는 것은 얼마나 완벽한 일인가!


그러나 그녀는 침착해야만 했다. 그녀는 외교관의 아내였고, 해야 할 일이 많았으니 말이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