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경험한 하이브리드 근무
나의 하루는 이렇게 시작한다.
7시에 일어나 아내와 함께 아이를 준비시킨다.
아내는 주로 머리를 따주고 옷을 입히고, 나는 간단한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물과 간식을 챙긴다. 아침식사를 마친 후에는 대충 차려입고 아이를 차에 태우고 학교로 향한다. 8시 15분이면 학교에 도착한다.
그렇게 아이를 학교에 내려주고 나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전기차를 충전하면서 빵을 하나 사 먹는다. 혹시나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가서 사기도 한다. 그리고 집에 도착해 네스프레소 커피 한 잔을 내리고 일을 시작한다. 그럼 대충 9시가 된다.
일을 하면서도 잠시 짬을 내 집안일을 하거나, 점심이나 간식을 먹는다. 회의가 많은 일이라, 학교에 아이를 데리러 가는 일은 아내가 담당한다. 그렇게 6시가 되면 일에서 손을 떼고 저녁을 함께 만들어 먹는다.
팬데믹 이후, 이것이 바뀐 나의 일상이다.
이미 유연한 근무시간이 정착화되어 있던 회사였지만, 팬데믹 이후에는 그 유연함이 극에 달했다. 팬데믹 도중에는 100% 자택근무를 했고, 그 후에도 하이브리드 근무라는 이름으로 일주일에 2회만 출근을 한다.
한국에 있는 지인은 한국에는 하이브리드 근무가 없어지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그런데 영국을 비롯해 유럽에서는 하이브리드 근무가 완전히 정착한 것 같은 모습이다. 오늘은 유럽에서 본 하이브리드 근무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먼저 하이브리드 근무는 팬데믹으로 인해 100% 재택근무를 해야만 했던 회사들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도입한 방식이다. 보통 일주일에 2-3일은 사무실에 출근을 하고, 나머지는 집에서 근무하는 방식이다.
팬데믹 전에는 유럽이나 미국도 한국처럼 5일 출근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물론 한국에 비해 훨씬 유연하고, 근태보다는 성과에 초점을 맞추면서 근무시간에 대한 강제 등이 훨씬 적었지만, 그럼에도 5일 출근은 당연하게 여겨졌다. 재택근무 또한 자유롭게 할 수 있었지만, 보통은 매니저의 재량이었다.
그러나 팬데믹 중에 100% 재택근무를 시행하는 회사들이 늘면서, 사람들의 일상이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우선 출퇴근에 대한 부담이 줄어들면서, 미쳐버린 주거비용을 피해 시내에서 더 멀리 떨어진 곳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런던의 경우에는 생활비가 급상승하면서, 기차로 3시간 거리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종종 볼 수 있다. 아예 스페인 같은 물가가 저렴한 나라에서 출퇴근을 하는 케이스도 보았다.
또한 재택근무를 하면서 좀 더 많은 시간을 "일" 보다는 "삶"에 집중하게 되었다.
자녀가 있는 경우에는 자녀의 교육에, 없는 경우에도 취미생활이나 다른 활동들이 사람들의 삶의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업 문화 자체도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예전에는 회의라 하면 보통 체리색 가구가 있는 회의실에 모여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팬데믹 기간 중 화상회의가 전면 도입되면서, 이제는 같은 빌딩에 있어도 화상회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게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이미 완전히 바뀌어버린 일상 때문에, 이제 유럽 사람들은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Owl Labs의 조사에 따르면, 영국인 응답자의 64%가 재택근무는 법적인 권리가 되어야 한다고 답했고, 만약 회사가 5일 출근을 강제한다면 다른 직장을 알아보거나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응답자가 무려 46%에 달했다.
실제로 요즘 직원들을 인터뷰하면 꼭 물어보는 것이 하이브리드 근무에 관해서다.
https://owllabs.co.uk/state-of-hybrid-work/2023/
게다가 도서관처럼 개인별로 정해진 자리가 없고, 인원수보다 적게 자리를 배정하는 "핫데스크(Hot Desk)"가 성행한 이후로 하이브리드 근무는 더욱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많은 수의 기업들이 핫데스크를 통해 사무실 공간을 축소하면서, 더 이상 하이브리드 근무를 포기할 수도 없는 단계에 이르게 된 것이다.
어떤 이들은 하이브리드 근무를 하면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한다.
쉽게 말해 직원들이 집에서 일하면 "딴짓"을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위에서 인용한 Owl Labs의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약 30%가 "사이드 잡"을 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비해 고용 시장이 훨씬 유연하고, 파트타임 근무가 훨씬 보편화된 영국을 한국인의 잣대로 봐서는 안된다.
또한 우버나 유튜브 등 새로운 형태의 고용이 생겨나면서, N잡이 훨씬 보편화되었다. 즉, 집에서 일하기 때문에 감시를 피해 다른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아예 직업이 여러개인 셈이다.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하이브리드 근무가 오히려 생산성을 높였다. 몇 가지 이유를 살펴보자.
먼저, 출퇴근 시간이 없어져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1시간 반 걸리는 출근길에 한국과도 다를 바 없는 지옥철을 타고나면,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지쳐버린다. 준비하시는 시간까지 합쳐서 3시간가량을 그냥 휴식만 취하더라도 피로도가 훨씬 덜해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휴식을 제대로 취할 수 있어 근무 효율이 향상된다.
일을 하다 보면 집중력이 떨어지는 순간이 온다. 회사에서는 그럴 때 커피를 마시거나 산책을 하지만, 편안한 침대에서 15분에서 20분 잠을 자는 것에 비하면 휴식의 효과가 떨어진다. 일을 하다 지쳤을 때 짧게라도 자고 일어나면 피로도가 훨씬 덜하다.
순수하게 일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사무실에서 일할 때는 자리를 세팅하는 시간이라던가, 회의실로 이동하는 시간, 동료들과 커피를 마시며 잡담하는 시간이 꽤 있었다.
점심을 먹을 때도 카페테리아에서 줄을 서는 시간이라던가 음식이 준비되는 시간이 있는데, 집에서 일을 하면서 이런 시간들이 줄어들어, 같은 시간을 일해도 순수하게 일에 투자하는 시간이 오히려 늘었다.
하이브리드 근무가 또한 "삶의 질"을 향상한다는 데에는 생산성을 이유로 반대하는 사람들 마저도 틀리다고 말하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향상된 삶의 질 또한 생산성에 도움이 된다. 행복한 직원이라고 일을 더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불행한 직원이 태업을 하거나 생산성이 떨어질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하이브리드 근무에 대한 찬양을 늘어놓았지만, 그렇다고 환상에 빠져서는 안 된다.
실제로 하이브리드 근무가 도입된 이후, 근태 문제를 보이는 직원들의 수가 눈에 띄게 늘었다.
심지어 잠수를 타거나, 정말로 근무 시간에 다른 풀타임 잡을 하는 직원까지도 있었다. 물론 극소수에 불과하고, 그런 직원들은 풀타임 근무를 하더라도 비슷한 문제를 일으켰을 것이다.
또한 직원들에게 동기부여를 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이는 해외에서 소위 말하는 Gen Z 세대의 성향과도 관련이 있는데, 아무래도 자주 직접 얼굴을 보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보니 동기를 부여하거나 직원들의 고민을 상담해 주기가 훨씬 어려워졌다.
가장 큰 문제는 직원들 간의 소통이 단절되었다는 것이다.
기존에는 사무실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물을 마시거나, 커피를 마시면서 서로 간에 정보가 공유되곤 했다. 그러나 재택근무와 하이브리드 근무가 도입되면서, 정보 공유의 장이 줄어들었다. 이제는 일부러 시간을 만들어 서로 간에 정보를 공유하기에 이르렀다.
개인적으로 대한민국에서 하이브리드 근무를 해외처럼 실행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먼저, 비공식적인 채널에서 너무 많은 소통이 발생한다.
오죽하면 술자리에서 중요한 의사결정들이 이뤄진다고 하겠는가. 이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하이브리드 근무 시에 의사소통이 훨씬 더 어려워질 수 있다.
성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근무태도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직원이 10시에 출근해서 8시에 퇴근하든, 집에서 일을 하든, 계약에 명시된 최소 근무시간 (없는 경우도 있다)만 채우고 성과를 내면 그것으로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늦게 출근하거나 일찍 퇴근하면 눈치를 줬고, 심지어 선배들에게 불려 가 혼이 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환경에서 하이브리드 근무가 정착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까라면 까"가 널리 퍼져있다.
물론 해외에서도 야근을 하거나 집중해서 일할 때가 있다.
그러나 한국처럼 "근성"에 의지해서 일하는 경향이 훨씬 덜하다. 사람이 부족하면 일을 줄이거나 사람을 더 고용하지, 기존에 일하는 사람들을 걸레처럼 쥐어짜지 않는다는 것.
서구사회가 더 발달했다거나 더 도덕적이라 그러는 것이 아니다. 단지 고용이 유연하다 보니 그렇게 하면 금방 그만둔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것뿐이다.
물론 문제 속에 답이 있다고, 위의 문제들을 해결하면 한국에서도 성공적인 하이브리드 근무가 정착할 수 있을 것 같다.
좀 더 공적인 의사소통을 늘리고, 성과주의를 도입하며, 효율적이고 합당한 업무 배당을 한다면, 하이브리드 근무로 직원들의 행복도와 생산성을 동시에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는 시간은 영국 시간으로 6시 12분. 6시 정규 업무시간이 끝나자마자 나는 브런치를 시작했다. 집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 출퇴근이라던가 옷을 갈아입는다던가 하는 어떠한 불편함도 없이 바로 전환이 가능했다.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도 주 2회 의무 출근에서 주 3회 의무 출근으로 바꾸려다 엄청난 역풍을 맞고 계획이 연기되었다. 유럽에서는 심심치 않게 주 4일 근무제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주 5일도 많다는 것.
대한민국도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긴 근로시간을 자랑하는 나라 중의 하나이다. 언젠가는 한국에서도 성공적인 하이브리드 근무가 정착되어, 저녁 있는 삶을 사는 이들이 많아지는 그런 날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