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경험해 본 악명 높은 영국의 의료시스템
어느 늦은 오후, 평소처럼 집 2층의 사무실 방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으아앙!"
갑자기 1층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어렴풋이 들려오는 아내의 목소리. 알아서 잘 다독이겠거니, 그냥 넘어졌겠거니 하고 회의에 집중하는데 한참이 지나도록 울음이 그치질 않는다.
회의를 끝내고 1층으로 내려가보니, 아이는 울상이 되어 티비를 보고 있었다. 축 늘어진 팔을 보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래도 팔이 빠진 것 같아. 빨리 병원에 가보자."
그렇게 차를 몰고 제일 가까운 A&E 센터(Accident & Emergency Centre, 한국으로 따지면 응급실)로 달려갔다. 차를 대고 들어가 보니 센터 안이 시장통이었다.
'이거 장난 아니게 오래 걸리겠는데?'
접수대에서 서류 작성을 마치고 2시간(!) 정도 기다리니, 안 쪽으로 들어가라 안내를 해준다. 이제 진료를 받는구나 생각했는데 안 쪽에 소아과 대기실이 별도로 있었다. 그곳에서 2시간을 더 기다리자, 드디어 의사를 만날 수 있었다.
"안녕? 팔 한 번 들어보겠니?"
친절한 의사 선생님이 이미 잘 시간을 지나 비몽사몽 한 아이에게 물어본다. 그러자 아이가 문제없이 팔을 움직이는 게 아니겠는가!
영국은 국영 의료 서비스를 채용한 나라다.
모든 사람에게 무상으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며 그 비용은 세금으로 충당하는 방식이다. 무상으로 의료를 제공하다 보니 모럴해저드라던가 전반적인 의료 수준 저하 등의 문제가 발생하고, 덕분에 의료민영화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아주 좋은 사례를 제공한다.
그런데 영국의 의료시스템이 그렇게 최악인가라고 물으면, 반드시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 이유를 얘기해 보자.
영국은 미국에 이어 의약분야에서는 세계 최고의 선진국이다.
높은 수준의 연구기관과 제약회사 덕에 팬데믹 기간 동안 영국은 백신 개발의 최전선에서 싸웠다. 글로벌 제약회사인 글락소스미스클라인과 팬데믹 백신으로 유명해진 아스트라제네카가 전부 영국 회사이다.
영국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NHS(National Health Service, 영국 의료당국)는 죽어가는 환자는 살리지만 멀쩡한 환자는 죽인다고 말하곤 한다.
한 지인의 경우, 아이가 갑자기 밤 중에 체온이 35도까지 떨어지는 저체온증을 겪었는데, 부르자마자 구급차가 달려온 것은 물론이고 병원에서 진료 및 응급처치까지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이뤄졌다고 한다.
비록 4시간을 기다려야 했지만, 엑스레이 촬영이나 진료 등이 모두 무료였다.
4시간까지는 아니지만 엄청 오래 기다려야 하고, 5분 의사를 만나는데 300달러씩 내야 했던 미국에 비해서 의료천국처럼 느껴졌다. 살인적인 보험료를 내고도 Copay라고 해서 추가로 진료를 받을 때마다 비용을 내야 했던 미국에 비하면, 정말 훌륭한 복지인 셈이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 무상으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다 보니 그에 따르는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영국 의료시스템의 문제는 다음과 같다.
영국은 모든 의사가 NHS에 소속되어 있다.
준공무원이다 보니, 고임금을 받는 한국과는 다르게 임금이 높지 않은 편이다. 영국에서 면허를 따고 호주 등으로 건너가 의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영국에서 의사들의 입지는 높지 않다. 그러다 보니 만성적인 의료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의료인력이 부족하다 보니, 병원에서 기다리는 것은 일상이 되었다.
4시간은 기본이고,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70세 노인이 병원에서 8시간을 기다리고 나서야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아이 치과진료를 위해 NHS 치과에 문의를 했더니, 무려 6개월 후에 다시 오라는 답변을 얻었다. 그동안 이빨 다 썩겠다!
영국에서 살 거라면 절대 삐까번쩍한 한국의 병원들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선진국답게 위생 관리는 철저하지만, 의료시설이 대단히 낡고 오래되었다.
영국 의료시스템을 한 마디로 요약해 보자면, "죽지는 않게 해 줄게"랄까.
어느 날부터 갑자기 아이가 밥을 제대로 못 먹더니, 이가 아프다고 호소하기 시작했다.
걱정이 앞서서 유명한 치과들을 수소문해 보니, 리치몬드(Richmond)에 유명한 사설 아동치과가 있다고 한다. 영국에도 물론 시설이 좋은 사설병원이 존재한다. 비싼 것이 흠이지만.
그렇게 치과에서 진료를 받아보니, 위아래 합해서 4개의 이가 썩었다고 한다. 신경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 병원에서 견적을 받아본 우리는 입을 다물수가 없었다.
"최소 3,000파운드(약 500만 원)는 들 겁니다."
당장 NHS치과에 문의를 해보니, 6개월 후에나 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한참 고민을 한 결과, 우리는 결국 한국행을 선택했다. 비행기 티켓과 치료비를 모두 합쳐도 500만 원이 훨씬 안되었던 것.
영국으로 돌아온 지 몇 개월 후, 갑자기 NHS치과에서 연락이 왔다. 예약한 날짜가 되었으니 병원에 방문하라고 한다. 어느새 6개월이 지난 것이다.
그렇게 치과에서 진료를 받고 있는데, 갑자기 의사가 병원의 다른 의사들을 전부 부르기 시작한다. 한국에서는 흔한 치아색 크라운을 보라고 다른 의사들을 불렀던 것이다. 정말 신기하다면서 질문세례가 이어진다.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던 "썰"을 우리가 직접 겪다니!
영국이 "절대다수의 절대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의 산물이라면, 미국의 의료시스템은 철저한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갑자기 미국을 들먹이는 이유는, 정확한 비교를 가능케 하기 위해서다. 세계 최고의 의료시스템을 갖춘 한국과 비교하면 영국의 의료시스템은 형편없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세계 최강국인 미국과 비교하면 어떨까?
우선 미국은 공공의료보험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미국에서 회사를 다닐 적, 한 달에 500-600달러에 달하는 보험료를 내야 했다. 이것도 회사에서 50%를 대주고 나머지 금액을 냈던 것이다.
그렇게 보험료를 내면 끝인가? 본인부담금인 Copay가 있는데, 몇 천 달러 상한선까지는 얼마가 나오던 Copay를 내야 한다.
병원비가 얼마 안 나온다면, Copay가 얼마든지 부담이 안될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은 의료비를 병원 마음대로 책정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자본주의를 채택했다.
우리가 미국에서 아이를 출산했을 때, 병원은 우리에게 2만 달러, 한화로 약 2천6백만 원을 청구했다. 암에 걸리거나 하면 수억을 청구하는 것은 기본이다.
청구하는 내역도 상상을 초월한다.
알약을 넣어 놓은 작은 플라스틱 컵, 심장수술을 한 환자에게 마음의 안정을 위해 안고 있으라며 빌려주는 (주는 게 아니다) 인형, 먹지도 않은 병원 밥 등에 말도 안 되는 가격을 책정한다. 혹시나 산에서 조난당해 헬기를 부른다면? 몇 억은 쉽게 나온다.
이처럼 철저한 자본주의를 따르다 보니, 미국에서 아픈 것은 생존과 직결된다.
가난한 이들은 이빨이 빠지거나, 손가락이 잘리거나 하는 정도 부상은 치료하지 않고 그냥 산다. 월마트에 가면 스스로 깨진 이를 때울 수 있는 아말감 세트를 팔 정도.
이래도 영국의 의료시스템이 별로라고 생각한다면, 미국에서 딱 1년만 살아보기를 권장한다. 한국이 의료선진국, 영국이 의료후진국(후진국이라고 말하면 좀 뭣하지만)이라면, 미국은 의료지옥이니까.
영국인들의 NHS에 대한 불만은 상상을 초월한다.
의료진들의 친절과는 무관하게 만족스러운 서비스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친듯한 물가 상승에도 영국인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데에는 NHS의 역할이 크다.
오래 기다려야 하지만 적어도 미국에서처럼 의료비 때문에 파산할 일은 없기 때문이다. 아픈 것이 생존과 직결되는 아직도 서부개척시대와 같은 미국에 비하면, 정말 훌륭한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 최종 평가를 내리고 싶다. 영국의 의료는 밉지만 미워할 수만은 없는 그런 존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