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출생의 비밀 하나쯤은 있는 거야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임자. 애썼네. 참말로 고생이 많았구먼.”
춘식은 자신의 핏줄을 출산하느라 밤새 고생한 루시가 그저 고맙고 대견하여 연신 그 볼을 핥아주었다. 지친 기색임에도 자신의 애정표현이 과히 싫지 않은지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루시를 보며 춘식은 자신에게 참으로 과분한 배필이라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춘식은 원래 자신이 나고 자란 양지마을에서 행세깨나 하는 개였다. 사람들은 자신을 두고 시고르자브종이라며 놀려대기는 했으나, 어머니가 순종 진돗개였기에 그 강인한 기상과 날렵한 외모를 물려받아 온 동네를 주름잡고 다녔다. 낯선 이가 집 근처에 나타났을 때 을러대는 본새며, 작은 들짐승을 쫓아가 사냥하는 것은 양지마을에서는 춘식을 따를 자가 없었다. 그런 춘식이 서울에서 갓 내려온 루시를 처음 보았을 때, 천상에서 내려온 멍멍이인 줄 알았다. 그 친절하고 싱그러운 미소와 비단처럼 찰랑거리는 황금빛의 긴 털, 길게 뻗은 다리와 사뿐사뿐 우아한 걸음걸이. 그건 옥황상제의 곁을 지키는 천상의 개에게 어울리는 자태라 할 만했다.
춘식이 루시에게 첫눈에 반한 그날부터 적극적인 애정공세가 시작되었다. 루시의 주위를 맴돌며 자신의 늠름한 모습을 과시함은 물론, 주인 양반이 맛있는 고기를 밥그릇에 담아주는 날이면 그걸 몰래 물어다가 루시에게 가져다주곤 했다. 다행히 루시도 춘식의 절절한 마음을 알았는지 금세 춘식을 받아주었다.
하지만 원래 진정한 사랑은 쉽게 얻을 수 없는 법. 루시의 주인 양반이 둘 사이를 완강히 반대했다. 둘은 어울리지 않는다며 한사코 둘 사이를 떨어뜨려 놓으려 애썼다. 어느 날은 루시가 있는 마당 주위로 울타리를 쳐서 루시 근처로 가지도 못하게 하는 바람에 춘식은 꼬박 일주일 동안 울타리 아래로 개구멍을 파야만 했다. 그걸로도 모자라 춘식의 주인 양반에게 이러쿵저러쿵 이르는 바람에 주인 양반은 춘식에게 목줄을 채워버렸다. 물론 그까짓 목줄, 잘근잘근 씹어서 끊어버리고 다시 루시를 만나러 가기는 했지만 말이다.
끊어진 목줄을 질질 끌고 와서 루시와 밀회를 나누는 춘식을 보자 루시네 주인 양반도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그날부터는 춘식이 찾아갈 때마다 루시에게 주던 간식을 춘식에게도 조금씩 나누어 주었다.
“꼬물꼬물 하는 것이 참말로 귀엽구먼. 둘은 털색이 흰 것이 나를 닮았고, 하나는 털색이 짙으니 엄마를 닮았는 갑다.”
춘식은 오늘도 루시에게 고기 한 점 물어다 주는 참이었다.
“그런가? 근데 당신 이제 고기 그만 가져다줘도 돼. 그렇잖아도 주인집에서 맛있는 거 많이 챙겨주고 있어.”
“암만 그래도 그 딱딱한 사료에다 물컹하게 갈은 고기 비벼주는 것 보담은 푹 삶은 돼지고기가 몸에 더 좋겄지. 잘 먹어야 젖도 잘 돌 것이 아닌감.”
춘식은 아이들이 자라 젖을 뗄 때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와 루시와 아이들을 돌봤다. 아이들이 젖을 뗀 뒤로는 춘식은 아이들 몫까지 고기점을 물어다 챙겨 먹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조금씩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첫째와 둘째는 털색이 흰 것이 자신을 쏙 닮았고, 얼굴의 생김을 보면 자신과 루시를 반반 닮은 것으로 보이는데, 유독 셋째만큼은 아무리 뜯어봐도 이상했다. 얼굴이 조금씩 더 길어지고 있는 것 같고, 털색은 엄마를 닮았다면 점점 옅어지며 황금색에 가까워져야 할 텐데, 오히려 더 짙은 흑갈색이 되어가며 드문드문 황토색의 얼룩까지 보였다.
“어째 셋째는 나랑은 너무 안 닮은 것 같어.”
춘식이 지나가듯 한마디 했는데 루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날부터였다. 여전히 춘식은 루시와 아이들을 열심히 돌보며 살갑게 대했지만, 둘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한번 생겨난 불신의 씨앗은 셋째가 자라남에 따라 하루가 다르게 점점 커지고 있었다. 하지만 춘식은 그걸 굳이 수면 위로 끄집어 올려 분란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여전히 루시와 아이들을 사랑하고 있었다. 확실하지도 않은 일을 두고 공연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 둘 사이의 행복이 깨질까 두려웠다.
살얼음을 걷는 듯 불안한 평화가 깨진 것은 아이들이 태어난 지 한 반년쯤 지난 어느 날의 일이었다. 부쩍 자란 아이들은 온 집안과 마당을 헤집고 돌아다니며 루시네 주인댁의 신발이며 세간들을 물어뜯는 바람에 매일같이 잔소리를 듣고 지내던 무렵이었다.
한창 사고 치는 아이들을 이리저리 말리며 분주히 마당을 오가던 중에 문득 울타리 밖에서 마당 안쪽을 유심히 바라보는 어느 개와 눈이 딱 마주친 순간, 춘식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자가 셋째의 아비구나.’
그자의 외모에 셋째의 얼굴이 있었다. 게다가 그 자를 발견한 루시의 당황하는 표정을 보니 저간의 사정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피가 거꾸로 솟았다.
이빨을 드러내며 그자에게 맹렬히 달려들려는 찰나, 그자의 목줄을 잡아당겨 길을 재촉하는 이가 있었다. 어깨에 엽총을 둘러메고 사냥 조끼를 입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전문 수렵꾼인 모양이었다. 그자가 주인의 손에 이끌려 떠나고 나자 춘식의 눈은 루시에게 향했다. 지독한 배신감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단 한 번의 실수였어……”
루시가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나도 후회하는 일이야. 당신에게 상처를 줘서 정말 미안해. 그래도 난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니까 당신이 옆에 있어준다면 고맙겠지만, 혹시 당신이 견딜 수 없어서 떠난다 해도 받아들일게. 내가 저지른 일이니까.”
춘식은 더 이상 루시에게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분노는 슬픔으로 바뀌었고, 배신감은 미움으로 바뀌었다. 루시가 미웠다. 분명히 미운데도 떠날 수가 없었다. 불쑥불쑥 그놈과 루시 사이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라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지만 그런데도 여전히 자신은 루시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느낄 때마다 자존심도 없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사랑은 늘 더 사랑하는 쪽이 약자일 수밖에 없다. 분명 이 관계에서 약자는 자신이었다.
결국 춘식은 루시 곁에 남아 예전처럼 아이들을 돌보는 길을 선택했다. 다만 셋째에게만큼은 더 이상 예전처럼 잘 대할 수가 없었다.
“셋째를 사랑해 달라고는 하지 않을게. 그래도 못살게 굴지만은 말아줘.”
춘식이 자기도 모르게 셋째에게 크게 화를 낸 날, 루시가 한 말이었다. 춘식이 녀석을 외면하기 시작하자 이내 셋째는 외톨이가 되고 말았다. 눈치 빠른 첫째와 둘째 역시 셋째를 멀리하기 시작했고 때로는 춘식이나 루시가 보지 않을 때 못살게 괴롭히기까지 했다. 갑작스러운 삶의 변화에 셋째는 어리둥절했고 서럽고 무서웠다. 아버지가 왜 갑자기 저리도 차갑고 냉정해지셨는지, 속없는 형제들은 왜 이리도 자신을 모질게 구는지 어린 셋째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저 자신이 그들과 다르게 생겨서 미움받고 있는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먹을 것을 찾아 산에서 내려온 배고픈 멧돼지들이 양지마을을 이리저리 들쑤시고 다니는 바람에 온 마을이 발칵 뒤집혔다. 저 멀리에서부터 이웃집 개들이 짖는 소리가 들려왔을 때, 춘식은 무언가 큰일이 났음을 직감했다. 루시와 아이들, 그리고 주인댁을 지키기 위해 울타리를 뛰쳐나와 소란이 난 곳에 도착하자 자신이 혼자 감당하기 힘든 상황임을 깨달았다. 멧돼지 한 마리 정도야 어찌어찌 쫒아내 보겠지만, 숫자가 너무 많았다. 하지만, 지금, 그 멧돼지 무리가 루시네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늦기 전에 그놈들을 막지 못하면, 사랑하는 가족을 잃을 수 있었다. 지체할 수 없었다.
춘식은 일단 놈들 가까이 다가가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 컹컹 을러댔다. 자신의 위세에 눌려 다른 곳을 방향을 돌렸으면 했지만, 그놈들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놈들이 점점 루시네로 다가갈수록 춘식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일단 한 놈이라도 피를 보아야 하는 것인가. 춘식이 기회를 보아 그들 중 한 녀석에게 달려들던 찰나였다.
“아부지~! 조심하셔유~!”
누군가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에 옆을 보니 다른 멧돼지가 자신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하마터면 날카롭게 튀어나온 엄니에 옆구리를 찔릴 뻔했다. 정말이지 위험한 순간이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자신을 살린 목소리는 셋째의 것이었다.
“오냐.”
춘식은 엉겁결에 일단 대답을 하고 얼른 옆으로 피했다. 그 순간 셋째는 자신에게 달려들었던 그 멧돼지를 향해 잽싸게 달려들어 겁도 없이 콧잔등을 콱 물어버렸다. 생각보다 세게 물어뜯었는지 콧잔등에서 피가 흘렀다. 강적을 만났다고 생각한 건지 멧돼지들은 방향을 틀어 우르르 도망가기 시작했다. 춘식과 셋째는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도중에 다시 방향을 바꾸거나 다른 사고를 치지 못하도록 위협하며 완전히 산으로 몰아냈다.
다행히 누구 하나 다친 이 없이 무사했다. 곁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셋째를 보자 춘식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첫째와 둘째는 꼬리를 말고 숨어 있는 동안에 그렇게 모질게 굴었음에도 셋째만은 목숨 걸고 달려와 자신을 구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아버지’라고 자신을 불렀고 춘식은 엉겁결에 대답까지 하지 않았던가. 미워하는 마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어 가족 밖으로 밀어내고 싶었던 그 아이가 그래도 자신을 아버지로 여기고 위기의 순간에 자기 몸을 던져 가족을 지켜주려 했는데...... 춘식은 속 좁게 굴었던 것이 부끄러웠다.
그날 이후 춘식도 마음을 고쳐먹었다.
‘허긴. 가족이란 게 별건감. 한솥밥 먹고 같은 곳에서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지켜줄 수 만 있다면 그게 가족이지. 암.’
이제 아무도 셋째를 미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루시네 주인 양반은 셋째를 썬더라는 새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멧돼지도 물리치는 사냥개에게 썩 잘 어울리는 멋진 이름이었다.
-끝-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응모작 (미운 아기오리 재창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