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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로드 Apr 13. 2017

뜻밖의 여행지, 타이완 윈린

말하자면 어느 정도 비일상적인 일상.


소설가 무리카미 하루키의 말마따나 

어떤 여행은 저 정도의 말로 담담하게 시작하는 게 가장 적당할 듯하다. 

적어도 타이완 윈린(雲林) 현의 이야기를 꺼낼 때는 말이다.



밖의 여행지, 타이완 윈린

 윈린은 ‘탐험’이나 ‘비경’이라는 매력적인 단어로 여행자를 홀릴 수 있는 변방이 아니다. 문명을 벗어난 기이한 삶이나 드라마틱한 자연을 꿈꾸는 상상은 일찌감치 제쳐두자는 얘기다. 구글 지도에서 보면 윈린은 타이중과 타이난 사이에 끼여 있다. 태평양 서안, 양쪽 끝이 좁은 나뭇잎 모양으로 떠 있는 섬나라 위에 마우스 커서를 올려 거듭 클릭하다 보면 깊숙이 감춰진 ‘윈린 현’ 글자가 나타난다.


 공항 인근에 자리한 타오위안(桃園) 기차역에서 타이완 고속철도(Taiwan High Speed Rail)를 타고 달린다. 2007년 개통한 이 열차는 타이베이에서 남부 도시 가오슝까지 신속하게 승객을 나른다. 1시간여 만에 도착한 윈린 역은 사람의 손때가 많이 타지 않은 신제품처럼 깔끔하다. 역사에 들어서자 타이완 최대 축제를 알리는 현수막과 마치 예행연습을 하듯 승객을 맞이하는 역무원 그리고 관광 안내 부스가 눈에 띈다. 시야를 가리는 높은 건물은 모조리 쓸어버린 듯 평평한 대지, 윈린의 첫인상은 그렇다. 기차가 내뱉고 간 승객은 익숙하게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진다. 아직 해가 저물기 전이지만 택시 승강장은 영업을 마친 듯 한산하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유일한) 택시 기사에게 호텔 주소가 적힌 종이를 떠넘기고 차에 올라 창밖 낯선 풍경을 바라본다. “랜턴?” 택시 기사의 눈짓에는 역무원의 사무적인 미소 대신 묘한 환대가 섞여 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이방인을 대하는 연륜 있는 태도에 그저 고개를 끄덕인다. 깨끗하게 닦인 길, 자로 잰 듯 갈라놓은 구획, 알록달록한 펜스. 어둠이 내려앉자 가로수를 두른 울긋불긋한 조명이 하나둘 켜진다. “랜턴, 랜턴? 뷰티풀!” 그가 약간 흥분한 목소리로 외친다. 고요한 이곳을 이렇게 들썩이게 만드는 건 과연 무엇일까?




느긋한 삶의 미학

후웨이 시장에서 만난 길거리 노점 상인. ⓒ 김주원

 “윈린에 가자는 건 당신이 처음이에요.” 타이난(臺南) 출신 가이드 케빈(Kevin)이 첫인사를 건넨다. 그는 외국 여행자에게 타이완 구석구석을 안내하는 현지 가이드로, 2년간 100회가 넘는 투어를 직접 진행한 바 있다. 그러나 윈린을 택한 여행자를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날이 훤하게 밝았지만 골목의 분위기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지난밤, 식당을 고르느라 호텔 주변을 30분 동안 헤맨 건 이방인의 어설픔 때문만은 아닌 듯싶다. 화려한 투피스를 걸어둔 상점의 쇼윈도에는 언제쯤 불이 들어올까? 북적이고 활기찬 모습을 찾는 시선이 더욱 바빠진다. “11시 정도면 문을 열 거예요. 장담은 못 합니다. 그들 마음이니까요.” 케빈이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한다. 정오가 가까운 시각, 후웨이 진(虎尾鎮) 번화가에 들어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이곳 사람들은 돈에 각박한 삶을 살지 않아요. 부자라서가 아니라 노후의 여유로움을 즐기는 거죠. 젊은 사람은 대도시로 떠나고 얼마 없어요.” 케빈이 말을 잇는다. 서서히 장사를 시작하려는 상인의 느릿한 움직임이 보인다. 플라스틱 의자에 걸터앉아 담배를 태우거나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떠는 게 사전 일과라도 되는 듯 시간을 느긋하게 흘려 보내면서.


> 후웨이합동청사 건물에 들어선 에슬라이트 서점. 옆에는 고전적인 분위기의 스타벅스가 자리한다. ⓒ 김주원


 윈린에는 관광지로 유명한 몇 개의 진(鎮)과 향(鄉)이 있다. 그중 관광객을 불러들이는 것은 주로 후웨이의 몫이다. 인근에 고속 열차가 정차하는 것도 이 때문. 이곳에는 별스러운 역사가 하나 더 있는데, 일제강점기에 들어선 후웨이 역이다. 목조로 지은 일본풍 건물을 통과하면 플랫폼 건너 사탕수수를 나르던 화물열차가 낡은 레일 위에 목적 없이 자리한다. 현재 관광 안내 센터로 운영 중인데, 철도 애호가라면 반드시 들러야 할 문화 명소로도 손꼽힌다. 비록 열차는 멈춰 있지만, 멀리 보이는 설탕 공장의 굴뚝에서는 여전히 연기가 피어오른다. 설탕 산업의 수혜로 작은 취락에 불과하던 후웨이는 타이완 전역의 제당 중심지로 우뚝 섰다. 1896년 일본이 이곳에 설탕 공장을 세웠고, 사탕수수를 가득 실은 열차는 패권을 따라 바쁘게 움직였다. 후웨이 역 외에도 윈린에는 역사적 건축물이 곳곳에 자리한다. 대표 관광지로 꼽는 후웨 이합동청사(虎尾合同廳舍)와 윈린스토리하우스(雲林故事館), 윈린부다이시박물관(雲林布袋戲館)은 차도를 두고 가깝게 마주하고 있다. 1920~1930년대 행정 중 심지로 고위 관리가 거닐던 거리는 오늘날 사진기를 목에 건 관광객의 차지다. 세계적 추세에 순응하듯 후웨이 또한 구시가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오랜 건축물을 되살리는 중이다. 1930년 당대 가장 높은 건물로 위용을 뽐내던 합동청사에는 에슬라이트 서점(Eslite Bookstore)과 스타벅스 같은 대형 체인점이 들어섰고, 후웨이 치안 판사가 머물던 집은 아이들과 여행객의 체험 학습장으로 바뀌었다. 


 타이완은 우리나라보다 더 오래 일제강점기를 겪었고, 역사의 시작을 유럽 강국의 발견으로 써내려왔다. 중국과 일본 열도의 다툼에 이리저리 치이는 신세도 면치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픈 역사를 꿋꿋이 견딘 역사적 건축물이 오늘날 윈린의 문화유산을 대표한다. 물론 세계적 재생 건축을 운운할 정도로 아직 화려한 풍경은 아니다. 다만 여행자의 촉수를 뻗어보면, 역사의 풍파를 견딘 공간에서 분명 신선한 움직임이 느껴진다. 그 안에는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단단한 삶과 이방인을 웃음 짓게 하는 현지인의 순수함이 존재한다. 그러니까 이번 여행은 말하자면 ‘사소한 일상을 만나는 비일상적인 여정’이 될 것이다. 간이의자에 앉아 한나절을 보낼 것 같던 시장 상인이 드디어 솥단지에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정직한 삶의 메아리

후웨이 살롱은 스페셜 티와 커피, 간단한 디저트를 파는 카페를 겸한다. ⓒ 김주원

 후웨이 살롱(Huwei Salon)은 후웨이의 유일한 독립 서점이다. 윈린에는 2개의 독립 서점이 있는데, 후웨이 살롱이 2012년 처음 이 낯선 이름을 달았다. 무엇이라도 내줄 것 같은 포근한 인상의 주인장과는 달리 후웨이 살롱의 위치는 다소 불친절해 보일 수 있다. 자동차 1대가 겨우 지나갈 만한 외진 골목에 아주 작은 간판만 내걸고 있기 때문. “독특한 울타리를 쳐놓은 정원 딸린 집”이라고 말하면 지도보다 친절한 설명이 될 것이다. “저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린 주류가 아니에요.” 후웨이 살롱에서 1년간 일해온 야원(Ya Wen)이 주인장을 대신해 말한다. 그녀의 말은 단순한 지리적 핑계가 아닌 듯 보인다. 이곳은 페미니스트 여주인이 운영하는 비주류 문화의 집합소다. 안으로 들어서자 어느 지식인의 서가를 옮겨놓은 듯한 4개의 방에 성(姓), 자연, 사회학, 자본주의에 관한 책이 빼곡하게 꽂혀 있다.  


 후웨이 출신의 장샤팡(張翜芳)은 1940년대 지은 이 집을 6년 전 구입해서 1년간 손수 고쳤다. 당대 명망 있는 중국인 의사가 살던 곳으로, 대대로 내려오다가 그의 아들 중 1명이 내놓은 것이었다고. 건물에는 일본식 가옥임을 말해주는 히노키, 다다미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서점의 전반적 분위기는 1800년대 유럽 앤티크 박물관을 방불케 한다. ‘1860~1880년 영국 빅토리아’ ‘1900년대 프랑스 루이’.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난 창문과 테이블, 책장 등은 모두 그녀가 오랫동안 모아온 앤티크 컬렉션이다. 이 집은 건축자재부터 가구, 하찮은 소품까지 마치 원래 그 자리를 지킨 것처럼 1940년대 집을 재현한다. 애초부터 낡은 골조만 개축하고 전통 가옥 구조는 보존하자는 계획으로 공사를 시작했기에 건물 입구의 처마, 천장, 바닥 등에 타이완의 건축 역사가 고스란히 새겨 있다. 그리고 중세 유럽 응접실을 재현한 노부인의 감각적인 컬렉션은 시공간을 초월한 분위기를 완성한다. “역사가 느껴지는 공간에서 살롱 문화를 실현하고 싶었습니다.” 장샤팡이 수줍게 웃으며 말한다. 17세기 프랑스 귀족, 부르주아계급, 문인 등이 우아한 응접실 에 모여 문학과 예술 등을 논하던 사교 문화가 오늘날 이 한적한 시골에서도 비슷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 후웨이 살롱이 지역 농부를 지원하려고 판매하는 먹거리. 유럽 앤티크 가구와 소품으로 채운 내부. ⓒ 김주원


 지난해 후웨이 살롱은 3개월에 걸쳐 안전한 먹거리를 주제로 25회의 토론을 진행했다. 지역 농부, 소상인, 과수원 일꾼, 환경주의자, 다큐멘터리 감독 등이 참여해 각자 준비한 주제로 발표를 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윈린은 타이완에서 농업 생산량이 가장 많은 농업의 요충지로, 건강한 먹거리에 관한 이슈에 언제나 민감하게 귀 기울인다. 최근 후웨이 살롱은 화학약품을 일절 쓰지 않은 식품을 서점 한 편에 두고 판매하고 있다. 소규모 농작을 하는 지역 농부를 지원하는 자발적 활동 중 하나라고. 또 지역 예술가의 후원도 아끼지 않는다. 야외 정원이나 실내 벽은 예술가의 작품을 전시할 수 있도록 언제나 비워둔다. 요새는 1980년대 타이완의 풍경을 담은 1세대 매거진 포토그래퍼의 사진전과 기이하게 꼬아놓은 쇠와 돌 장식의 설치 작품이 야외에서 한창 전시 중이다. “저희와 함께 가치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모으는 데 5년이 걸렸어요.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는 타이베이였다면 아마 더 수월했을 거예요.” 야원이 말한다. 후웨이 살롱을 찾는 이들은 동네 사람이 아닌 대부분 타이난, 자이 현(嘉義縣) 등 인근 도시에서 찾아온 유별난 관광객이다. ‘비주류’라는 단어 자체가 생경한 시골 마을에서는 당연할 법한 일. 그러나 후웨이 살롱은 지금처럼 자신들의 가치를 묵묵히 실현해나갈 것이라고 말한다. 직접 농사를 짓고, 채소를 기르는 대신 그들의 정직한 삶을 알리는 목소리가 되어.




빛 바랜 세월 그리고 순박한 삶

시뤄의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시뤄 대교는 윈린에 들어서는 관문이었다. ⓒ 김주원

 후웨이에서 차를 타고 북쪽으로 20분 거리의 시뤄 진(西螺鎮)으로 향하면, 후웨이와는 다른 기운이 흐른다. 시뤄는 타이완에서 가장 긴 줘수이 강(濁水溪) 남쪽 해안에 자리한다. 도시 부흥이 그러하듯 풍부한 물과 기름진 토양은 사람을 불러모았고 도시에 상점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한때 상업은 농업보다 도시의 경제를 살리는 데 주된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와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식량 보급이 급격히 늘었고, 농업은 다시 부흥기를 맞았다. 지금 우리가 자동차로 달리고 있는 빨간색 골조의 시뤄 대교(西螺大橋)가 바로 시뤄의 황금기를 상징한다. 일본 정부는 타이완 남북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 시뤄를 택했다. 그리고 풍부한 물자를 일본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1937년 다리 건설에 착수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1953년 미국의 도움을 받아 겨우 완성했지만, 당시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골든 게이트 브리지(Golden Gate Bridge)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다리(1,939미터)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기도 했다. 자동차가 쉴 새 없이 다니는 차도 너머로 2킬로미터에 달하는 철도가 보인다. 후웨이 역에서 싣고 온 사탕 수수 열차 또한 이곳을 지나쳤으리라. 시뤄 대교는 빛 바랜 트로피처럼 한때 정부의 외면을 받은 적도 있는데, 철거 위기까지 갔다가 주민의 탄원으로 현재 자리를 지키게 됐다고. 매년 봄이면 이곳에서 다자마조(大甲媽祖) 행사가 열리고, 300명이 넘는 신도가 다리를 건너며 대만 전통 신앙인 마조(媽祖) 신에게 안녕을 빈다.


식당을 하는 어머니와 모던한 다기를 팔고 있는 아들 ⓒ 김주원

 중국 고전 영화에 등장할 법한 건축물이 양쪽으로 쭉 늘어선 옌핑라오제(延平老街). 거리에는 일제강점기에 지은 142개의 가옥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시뤄 대교 건설 프로젝트가 시작된 1930년대, 재력가들은 이곳에 집을 짓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당시 시뤄에는 200여 개가 넘는 주택이 들어섰다. 마치 건축 콘테스트를 벌이 듯 기상천외한 집이 등장하기도 했다. 어느 치과 의사는 3층 건물을 치아 모양으로 올리고, 창문도 삼각형으로 만드는 획기적인 발상을 펼쳐 보였다. 오늘날, 거리에 번영의 기운이 걷힌 지는 오래됐지만, 여태껏 누구도 손 대지 않고 외면한 덕(?)에 옌핑라오제는 최근 시뤄의 문화 유산으로 재조명받고 있다. 모더니즘과 아르데코 건축양식에서 영향을 받은 옛 건물에 당대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진귀한 풍경이 남아 있기 때문.


 “일제강점기에는 가로 면적이 넓으면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했대요. 따라서 대부분의 집이 폭이 좁고 안쪽으로 깊숙이 숨어 있어요. 집 안의 건물과 건물 사이 중정을 몇 개 두는지가 부의 척도였죠.” 가이드 케빈이 설명한다. 바로크 스타일로 꾸민 지에파 찻집(捷發乾記茶莊)으로 들어가면 한 사람이 지나갈 만한 나무 문이 뚫려 있고,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나타난다. 1개의 문을 더 통과하면 화려한 응접실이고 양쪽으로 방문이 빼꼼히 보인다. 마치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집이 집을 품는 형태다. 찻집으로 들어가면 게스트하우스, 갤러리, 1930년대 찻집에서 쓰던 골동품 컬렉션까지 만날 수 있다.


> 기타 연주에 심취한 동시장의 보헤미안 외국 청년. 옌핑라오제 문화관 내부에 보존된 지에파 찻집의 옛 모습ⓒ 김주원


 재력가의 집뿐 아니라 길 건너편에는 옛 상점이 몰려 있던 동시장(東市場)도 여전히 자리한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셔터 내린 상점이나 노점 앞을 예술가가 차지하면서 문화의 장이 되었다는 것. 어두컴컴한 시장에 카페와 갤러리, 찻집이 새롭게 문을 열었고, 주말이면 지역 예술가가 거리로 직접 나와 작업을 시연하기도 한다. “동시장은 주말에 가족끼리 나와 차도 마시고, 한적하게 구경하기 좋은 곳이 됐어요.” 일본에서 가져온 차 도구를 판매 하는 랴오준이(廖俊毅)가 다기를 정성스럽게 닦으며 말한다. 바로 옆에서 우리에게 튀김을 건네던 식당 주인은 바로 그의 어머니다. 동시장에서 식당을 하는 어머니를 따라 4년 전 랴오준이는 이곳에 입성했고, 어머니의 가게 바로 옆에 자신만의 아지트를 만들었다. 한눈에 봐도 역사가 깊어 보이는 다기는 그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발품 팔아 수집해온 골동품이다. 노점 사이에 끼여 있는 모던한 찻집은 어딘가 기이해 보이지만, 이는 오늘날 시뤄 거리의 풍경을 대변한다. “예술가는 언제나 실험적인 공간을 따라다니죠. 앞으로 동시장은 올 때마다 달라져 있을 거예요.” 랴오준이가 말한다. 기름 솥에서 연신 무언가를 튀겨 내는 아주머니부터 가게에 들어온 손님은 아랑곳없이 기타 연주에 몰두한 파란 눈 청년, 직접 만든 액세서리를 가판에 가득 채워 나온 어린 소녀 그리고 우롱차를 마시며 다기를 뚫어보는 중년 수집가까지. 1930년대 건물을 배경으로 모두 한 프레임에 들어오는 오늘날 동시장의 풍경은 어딘가 비범해 보인다.



▶ 뜻밖의 여행지, 타이완 윈린 두 번째 이야기

▶ 뜻밖의 여행지, 타이완 윈린 여행 노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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