퀘벡을 ‘캐나다의 프랑스’라 부르는 것은 심각한 오류다. 오랜 세월 북미와 프랑스 문화가 뒤섞여 퀘벡만의 독특한 개성이 탄생했다. 비외퀘벡(Vieux-Québec, 올드 퀘벡)의 고아한 뒷골목은 어딘지 연극 무대를 연상시키고, 퀘베쿠아는 프랑스인도 알아듣기 어렵다는 퀘벡식 프랑스어를 구사하며, 푸틴과 미트 파이처럼 짭짤하고 기름진 전통 요리를 즐긴다. 그런가 하면 비외퀘벡 너머에서는 퀘벡의 또 다른 면모가 펼쳐진다. 활기찬 생장바티스트(Saint-Jean-Baptiste)와 생로슈(Saint-Roch) 지구에서는 언더그라운드 문화와 유기농 다이닝이 인기를 끌고 있다. 진정 ‘퀘벡다운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퀘벡의 여러 동네로 떠나보자.
동이 틀 무렵, 출근하는 승객과 차량을 가득 실은 페리가 세인트 로렌스(Saint Lawrence)강 남쪽 도시 레비(Lévis)에서 비외퀘벡으로 출발한다. 심드렁하게 선실에 앉아 있는 현지인에게는 매일 반복되는 일과겠지만, 레비에서 퀘벡까지 단 12분간 운항하는 이 페리는 사실 퀘벡에서 손꼽는 전망 포인트다. 지금 눈앞에서는 퀘벡을 배경으로 한 히치콕의 스릴러 <나는 고백한다>(1953)의 오프닝 신이 펼쳐지려는 참이다. 페리가 강 건너편에 우뚝 솟은 고성으로 점점 다가가는 장면. 어떠한 설명 없이 검은 실루엣만으로도 관객을 압도하며 불길한 예감을 드리우는 고딕 스타일 무대로 퀘벡의 랜드마크인 페어몬트 르 샤토 프롱트나크(Fairmont Le Château Frontenac)만 한 곳도 없을 것이다. 오늘 아침 샤토 프롱트나크는 장밋빛으로 찬란하게 반짝인다. 양쪽으로 요새와 비외퀘벡의 고풍스러운 지붕을 거느린 채.
페리에서 쏟아져 나온 승객은 총총걸음으로 비외퀘벡 여기저기로 흩어진다. 17세기 탐험가 사뮈엘 드 샹플랭(Samuel de Champlain)이 이끄는 프랑스계 이주민은 세인트로렌스강을 거슬러 올라와 바로 이곳에 터전을 마련했다. 강을 굽어보는 디아망(Diamant) 절벽 위에는 오트빌(Haute-Ville, 어퍼 타운)이, 그 아래에는 바스빌(Basse-Ville, 로어 타운)이 펼쳐진다. 샹플랭을 비롯한 퀘벡의 역사 속 인물을 그려 넣은 트롱프뢰유(trompe-l’oeil, 눈속임) 벽화인 프레스크 데 퀘베쿠아(Fresque des Québécois)를 지나 시대극 세트장 같은 거리를 걷다 보면 아담한 퓌니퀼레르(funiculaire) 역이 나온다. 100년 넘게 운행 중인 녹색 퓌니퀼레르를 타고 절벽 위 페어몬트 르 샤토 프롱트나크에 도착한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부럽지 않은 인상적인 등장이다. 혹은 퀘벡에서 가장 오래된 계단인 에스칼리에 카스쿠(Escalier Casse-Cou)를 걸어 올라가는 방법도 있다. 깎아지른 듯한 계단 위로는 금방이라도 카메오로 분한 히치콕이 지나갈 것만 같다.
◈ Spoiler ◈
<나는 고백한다>는 살인범의 고해성사를 들은 신부가 도리어 범인으로 의심받는 이야기다. 퀘벡을 촬영지로 택한 것은 북미에서 가톨릭 전통이 가장 강한 도시였기 때문. 촬영 당시 히치콕은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메서드 연기에 대해 불평했다고 한다.
호텔 복도는 끝없이 뻗어 있고, 예고 없이 휘어진다. 토론토, 뉴욕 등지에서 온 기자들과 함께 앞장선 자그마한 남자의 경쾌한 발걸음을 바삐 쫓는다. “덕분에 저와 제 동료들은 모두 이렇게 날씬하답니다.” 페어몬트 르 샤토 프롱트나크의 마케팅 매니저 맥심 오빈(Maxime Aubin)이 우리를 돌아보며 말한다. “여기서 10년 넘게 근무했는데 아직도 길이 헷갈릴 때가 있어요.” 총 12킬로미터의 미궁 같은 복도는 샤토 프롱트나크 내부를 혈관처럼 뻗어나간다. 마침 오늘은 버지니아 울프의 136번째 생일이다. 하지만 오빈이 서두르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니다. 앞으로 몇 시간 후면 로비 안쪽의 무도회장에서 호텔 창립 125주년 기념 갈라 파티가 열린다. 육중한 샹들리에와 공작처럼 화려하게 차려입은 수백 명의 사람, 아방가르드 음악 퍼포먼스, 칵테일과 생굴 요리가 기다리는.
샤토 프롱트나크는 캐나다 근대사의 결정적 순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19세기 말, 캐나다 태평양 철도(Canadian Pacific Railway)는 퀘벡에서 브리티시컬럼비아까지, 캐나다 동서를 잇는 역사적인 대륙 횡단 철도 건설에 착수했다. 광활한 프레리와 로키산맥을 관통하는 이 철도는 단 5년 만에 완공됐고, 부유층의 기차 여행을 독려하기 위해 몬트리올을 시작으로 국토 곳곳에 유럽의 고성을 본뜬 샤토에스크(châteauesque) 양식의 철도 호텔이 들어섰다. 1893년 세인트로렌스강 하구, 비외퀘벡의 가파른 디아망 절벽 위에는 녹색 구리 지붕과 뾰족한 첨탑을 거느린 으리으리한 고성이 등장했다. 그렇게 샤토 프롱트나크는 퀘벡의 상징이 되었다. 시가지 너머로 우뚝 솟은 고성의 실루엣이 점차 가까워지면 기차와 페리에 몸을 실은 승객은 비로소 ‘북미의 파리’에 도착했음을 실감했으리라.
반질반질하게 낡은 객실 문 사이로 뻗은 복도와 황금빛 엘리베이터를 날렵하게 오가며 오빈은 샤토 프롱트나크의 보물 중 일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창립 125주년을 맞은 올해에는 8개의 특별한 스위트룸을 공개할 예정이에요. 호텔의 역사와 얽힌 인물 8명의 이름을 땄는데, 누군지 맞힐 수 있겠어요?” 물론이다. 셀린 디옹, 히치콕, 트뤼도 총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곳에서 정상회담을 한 루스벨트와 처칠부터 그레이스 켈리, 폴 매카트니까지. 샤토 프롱트나크를 거쳐간 저명인사 리스트는 이곳의 ‘십팔번’ 자랑거리다. 셀린 디옹 스위트룸에 걸린 디바의 앳된 사진을 보며 토론토에서 온 어느 기자는 “아! 그녀가 얼마나 어렸는지 봐…”라고 감탄한다. 탁 트인 창 너머로는 유빙이 반짝거리며 세인트로렌스강 상류로 떠가고, 그 앞에는 새하얀 눈밭과 터보건 슬라이드가 뻗어 있다. 100년 넘게 겨울이면 사람들은 저 위를 시속 70킬로미터로 질주해 내려갔으리라.
저무는 해가 비추는 아담한 수영장을 지나 한때 컬링장이던 자리에 들어선 레스토랑, 치즈와 와인 저장실, 옛 서재를 개조한 프라이빗 룸을 거쳐 로비로 돌아온다. 10여 개의 샹들리에와 번쩍이는 구식 회전문, 3대의 금빛 엘리베이터와 우편함에 둘러싸인 로비는 영화 <나는 고백한다>의 클라이맥스에 등장한 모습 그대로다. 누명을 벗고 진짜 범인을 쫓아 들이닥친 주인공 몽고메리 클리프트(Montgomery Clift)와 경찰 대신, 파티를 고대하는 인파와 스키 부츠에 눈을 묻힌 채 돌아다니는 투숙객이 점령하고 있지만.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오빈은 작별 인사를 남기고 요정처럼 모습을 감춘다. 어쩌면 잠시 후에 열릴 파티를 위해 변신하기 위해서. 객실로 돌아오자 접힌 침대보 모서리에 메이플 사탕이 1개 놓여 있다.
◈ Spoiler ◈
페어몬트 르 샤토 프롱트나크 로비의 우편함에는 로맨틱한 사연이 전해진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한 군인이 연인에게 청혼하는 편지를 이 우편함에 넣었지만, 우연히 구석에 끼어버리는 바람에 수십 년 후에야 청소부가 발견한 것. 그들의 운명을 상상 하며 직접 쓴 편지를 우편함 에 넣어보자.
북미에서 가장 오래된 식료품점이 북미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인 퀘벡에 있는 것은 일견 당연해 보인다. 비외퀘벡 서쪽, 역사가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생장바티스트 지구. 페어몬트 르 샤토 프롱트나크가 문을 열기 20여 년 전, 퀘벡 토박이 무아상(Moisan) 형제는 이곳에 J. A. 무아상(J. A. Moisan)을 오픈했다. 지금까지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이곳은 그야말로 <해리 포터>에 나올 법한 만물상이다. 과일과 채소부터 소시지, 빵, 조리 식품, 세계 각국의 향신료, 메이플 시럽과 차, 사탕까지 온갖 것을 다 판다. 중절모와 나비넥타이로 차려입은 점원이 단골손님을 반기고, 창가의 카페 좌석에서는 나이 지긋한 손님이 한참 동안 두꺼운 책에 빠져 있다.
물론 이 동네도 변화를 겪고 있다. J. A. 무아상에서 1블록 떨어진 칸투크 미크로 토레파크시옹(Cantook Micro Torréfaction)은 3대째 운영하는 로스터리 겸 카페. 아버지에게 가게를 물려받은 시몽 파비(Simon Fabi)는 로스터리 앞쪽에 모던한 분위기의 카페를 새로 마련했다. 카운터 뒤에는 직접 제작한 수십 개의 원두 보관함이 쭉 늘어서 있고, 로스터리 입구 위에는 순록 뿔이 걸려 있다. 드립 커피를 주문하자 직원은 원두를 저울에 잰 다음 갈아서 내려준다. “칸투크라는 카페 이름은 벌목 도구인 훅(hook)에서 따왔어요. 훅은 숲이 많은 퀘벡에서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꼭 필요한 도구이자 퀘벡과 캐나다 건설의 상징이죠.” 파비가 창고에서 꺼내온 자신의 훅을 보여주며 말한다. 그는 실제로 이것을 쓸 일이 많다. 가족과 함께 퀘벡 외곽, ‘북부 야생의 끝자락’에 있는 오두막에 살기 때문이다. 광활한 자크 카르티에(Jacques-Cartier) 국립공원이 그들의 앞마당이다.
칸투크의 운영 철학은 바로 그 숲에서 영향을 받은 듯하다. 파비는 직원과 함께 주기적으로 코스타리카 등지의 커피 농장을 방문한다. “저는 제품과 그것을 만드는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제가 농장을 방문하는 이유예요. 커피나무가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농장에서 일하는 이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직접 보고 싶거든요.” 그 사이 파비의 친구인 이웃 식당 주인이 순록 심장 요리를 한 접시 가져다준다. 우리는 그것을 한 입씩 나눠 먹는다. “분점을 낼 생각은 전혀 없어요.” 파비가 말을 잇는다. “우리 카페가 손님이 이야기하러 오고, 사람을 만나러 오는 일상의 일부이길 바라요. 일만 하기에는 인생이 짧죠. 제 삶은 괜찮아요. 숲속에 작은 집과 땅도 있으니까요.”
생장바티스트 지구 북쪽, 17세기부터 조선업과 제조업이 번성하며 노동자가 모여들던 생로슈는 퀘벡을 일컫는 저 유명한 애칭인 ‘북미의 파리’보다는 차라리 ‘캐나다의 포틀랜드’가 떠오르는 동네다. 프랑스어로 ‘종탑’을 뜻하는 르 클로셰르 팡셰(Le Clocher Penché)는 빈티지 숍과 카페, 극장이 늘어선 이곳에 최초로 문을 연 식당 중 하나로, 지난 10년간 퀘벡의 유기농 요리 트렌드를 이끌어왔다. 창 너머로 종탑 아래 잿빛 성당이 보이는 실내는 브레이크타임에도 시끌시끌하다. 벽에는 현지 아티스트의 작품과 레스토랑에 식자재를 공급하는 농부, 축산업자의 사진이 걸려 있다. 곧 양파 수프에 이어 메인 요리가 나온다. 치킨 껍질로 감싼 수비드 닭고기, 달걀 타르틀레트, 당근, 채소 퓌레를 활용한 산뜻한 플레이팅이 돋보인다.
접시를 하나씩 비워갈 즈음, 셰프 마티외 브리송(Mathieu Brisson)이 슬쩍 다가와 옆에 앉더니 맛있다는 칭찬에 소박한 미소를 짓는다. “우리의 요리에 들어가는 모든 것은 철저히 현지산이며 홈메이드고, 대부분이 유기농이에요. 와인과 블러드 소시지, 피클까지도요.” 브리송이 말한다. “제게는 ‘로컬이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거든요. 따라서 우리 집 메뉴는 제철 식자재에 따라 종종 바뀌죠. 저와 직원들은 요일별로 번갈아 허브와 채소를 채취하러 간답니다. 근교의 농장이나 숲, 심지어 도시에서도 채취할 곳이 많죠.” 브리송은 일상의 작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요리에 관한 창조적 아이디어를 얻는다고 설명한다. “예컨대 우리 주방은 아주 작은데, 그렇기 때문에 요리할 때 접시를 어디에 놓을 것인가 하는 문제부터 시작해서 매사를 창조적으로 생각해야 한답니다.”
거리 끝자락, 빈티지 레코드 가게 르 노크 아웃(Le Knock Out)의 오후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출신 록 밴드 디 오 시스(Thee Oh Sees)의 노래와 함께 흘러간다. 파격적이고 기괴한 포스터와 일러스트레이션, 빈티지 대합실 의자와 핀볼 기계로 장식한 실내에는 LP판과 카세트테이프를 빽빽이 진열해놓았다. 레 콜로크(Les Colocs) 같은 로컬 록 밴드부터 펫 숍 보이즈(Pet Shop Boys), 바네사 파라디(Vanessa Paradis)까지. ‘HELTER SKELTER(비틀스가 1968년 발표한 곡)’라쓰인 티셔츠를 입은 파트타임 직원 타냐(Tanya)는 칠판에 이번 주말 공연의 홍보 문구를 쓴다. 한자 한자 엄청 공을 들여서. 비범한 차림새의 손님이 하나둘 들어와 타냐와 친근하게 안부를 주고받고는 가게 안을 어슬렁거리며 탐색하다 떠난다.
“주말이면 가게 안쪽에서 현지 밴드가 공연을 해요. 꽤 많은 언더그라운드 밴드가 우리 가게에서 데뷔하죠. 티르 르 코요테(Tire le Coyote)도 우리 가게에서 시작한 개러지 밴드인데, 내일 무려 <라디오 캐나다(Radio Canada)>에 출연한답니다.” 타냐에 따르면 퀘벡은 일렉트로니카와 메탈 음악의 도시라고. 어쩌면 지나치게 평화로운 환경에 대한 반작용일까? 타냐도 동감한다. “아마 숲과 호수가 음악적 영감을 주는 것 같아요. 퀘벡 출신의 많은 밴드가 퀘벡뿐 아니라 몬트리올, 미국에서까지 활약하고 있죠.” 고심끝에 고른 것이 바네사 파라디의 샹송 카세트테이프라고 해도 물론 눈치 볼 필요는 없다. 여기는 퀘벡, 낭만주의자든 펑크족이든 평화롭게 어울려 살아가는 곳이니까.
*드니 빌뇌브(Denis Villeneuve), 프랑수아 지라르(François Girard), 자비에 돌란(Xavier Dolan)은 퀘벡 출신으로 할리우드에서 승승장구하는 대표적인 영화감독이다. 자비에 돌란의 데뷔작 <아이 킬드 마이 마더>(2009)는 퀘벡에서만 80만 달 러의 수익을 올렸다.
이기선은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의 에디터다. 카세트 플레이어가 없어 퀘벡에서 산 바네사 파라디 카세트테이프를 아직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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