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테마로 한 호텔에서 묵고, 클래식한 기차역에서 삼림 열차의 추억을 더듬어보자. 때론 사원이나 카페에서 현지인의 일상을 탐구할 필요도 있다. 타이완 중부의 자이(嘉義)는 그동안 아리산(阿里山)을 가기 위한 관문 도시 정도로만 여겨졌지만, 그냥 지나치기에는 아쉬운 곳이다.
아리산의 정식 명칭은 아리산국가풍경구. 타이완 최고봉 위산(玉山)을 중심으로 해발 2,000미터 이상의 봉우리 20여 개가 모여 있는 산맥을 통칭한다. 풍경구 안에는 다양한 풍경이 공존하며, 서로 다른 취향을 지닌 여행자가 모여든다. 빽빽하게 우거진 원시림, 봄 벚꽃이 우거진 풍경, 드넓은 차밭 그리고 아름다운 일출과 운무까지. 아리산을 찾는 이유는 각자 다를 테지만, ‘아리산’으로 통칭되는 이 아름다운 세계에 발을 내딛는다는 기대와 흥분은 모두 같을 것이다.
관광버스는 들뜬 여행자를 산 위에 토해놓는다. 자이에서 차로 2시간 30분이면 삼림 열차의 중간 역인 펀치후(奮起湖)에 다다른다. 펀치후역에서 아리산역까지는 삼림 열차가 현재 운행 중단 상태다. 산속에서 또 하나의 세계가 펼쳐진다. 과거 아리산을 오르던 열차가 잠시 멈춰 석탄을 공급받던 곳. 해발 1,400미터의 고산 마을 펀치후에서 여행자는 배를 채운다. 한때 번성했던 옛 거리 라오제(老街)에서 도시락을 먹은 후, 버스를 타고 다시 출발해 차밭을 둘러싸고 있는 스줘(石 卓) 마을을 지나 아리산역까지 오른다. 아리산역에서는 해발 2,138미터의 선무(神木)역, 해발 2,451미터의 추산역까지 오르는 삼림 열차를 탈 수 있다. 좌르르 펼쳐진 운해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감상하고 싶다면 일출 시간에 맞춰 출발하는 추산행 열차를, 원시림을 트레킹하고 싶다면 선무행을 타고 자오핑(沼平)역에서 하차하면 된다. 수천 년을 지탱한 산의 진면목을 조우하는 여정은 만만치 않지만, 넉넉하고 아름다운 아리산의 자태는 한 순간도 빠짐없이 여행자를 위무한다.
>> 아리산국가풍경구 ali-nsa.net
찻주전자와 다기, 차를 덖는 솥 등 각종 다구가 진열된 호텔 로비에 앉아 향긋한 티를 마신다. 부드럽고 감미로운 타이완 우롱차다. 초록 식물과 골동품이 어우러진 공간은 아늑하면서도 모던한 다실 같다. 자이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이곳은 세계 최초로 차를 테마로 한 부티크 호텔 티스케이프 자이(Teascape Chiayi)다. 타이완 부티크 호텔 브랜드 데이플러스(Day+)는 타이완 내 5개 지역에서 각 지역의 특성을 반영한 디자인 호텔을 운영하는데, 여기도 그중 하나다. 자이 지점의 테마는 자연히 차(茶)로 점철됐 다. 아리산은 품질 좋은 고산차 생산지로 유명하기 때문. 티스케이프 자이는 ‘차에 대한 44가지 경험’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차에 담긴 철학을 라이프스타 일 경험으로 끌어낸다. 로비에서 내어 준 웰컴 티가 그 시작이라면 이제 43개의 경험이 남은 셈이다.
“이 손수건의 무늬는 어떻게 만들까요?” 일행은 옅은 갈색 무늬가 곱게 물든 천 1장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투숙객에게 제공하는 차 염색 체험 프로그램. 조약돌, 아이스크림 막대, 고무줄, 빨래집게 등 테이블 위에 놓인 도구를 이용해 각자의 방법으로 흰 천을 고이 접고 꽁꽁 싸맨다. 무늬를 넣는 작업이 끝난 천은 수거해 밤새 찻물에 담가두었다가 다음 날 손님에게 전달한다. 이는 투숙객에게 색다른 기대감을 안겨준다. 호텔에 머무는 동안 순백의 수건이 서서히 찻잎으로 물들어가는 것이다. 객실에서도 즐거운 경험은 이어진다. 찻잎과 도자 다기, 로컬 상점의 수제 전병으로 채운 예쁜 티 박스가 놓여 있고, 커다란 욕조 곁에는 은은한 향기가 나는 입욕용 찻물이 준비돼 있다. 이제 몇 가지가 남았더라? 티스케이프 자이가 준비한 모든 경험을 발견하려면, 하룻밤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다.
>> 티스케이프 자이 7,500타이완달러부터, hotelday.com.tw
타이완은 한국보다 더 긴 시간 동안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50년간의 일제강점기를 통해 일본은 타이완 국토 곳곳에 그들의 흔적을 남겼다. 자이역이 기점인 아리산 삼림 열차 또한 본래 전쟁 물자 수탈을 목적으로 운행을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제 열차는 편백나무 대신 여행자를 태운다. 사람들은 빨간 협궤 열차를 타고 느릿느릿 산을 오르며 고속 열차가 지배하는 세상을 잠시 잊곤 한다.
오늘 자이역의 삼림 열차는 멈춰 있다. 얼마 전 일어난 탈선 사고 탓이다. 선로가 산속에 위치하다 보니 삼림 열차는 태풍 같은 자연재해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나무가 쓰러져 선로를 가로막는 일은 다반사인데, 그럴 때 삼림 열차는 예고 없이 운행을 중단한다. 하지만 열차가 운행하지 않는 날에도 중간 기착지인 베이먼역(北門驛)을 들를 이유는 충분하다. 검은색 기왓장을 올린 베이먼역은 클래식 그 자체다. 1910년에 공사를 시작해 1912년 완공한 일본식 목조 건물. 그 바로 앞에는 거짓말처럼 일제강점기부터 운영해온 여관이 버티고 있다. 시간이 멈춘 듯하지만, 노선이 운행을 재개하면 베이먼역을 지나 아리산까지 씩씩하게 운행하는 협궤 열차를 볼 수 있다.
베이먼역에서 도보 거리에는 일제강점기에 편백나무로 지은 가옥 28채가 말끔하게 보존돼 있다. 임업 개발이 성행했던 때, 일제 간부들이 살던 히노키 빌리지(Hinoki Village, 檜意森活村)는 현재 카페와 공방, 숍으로 사용 중이다. 삼림 열차를 타지 못하는 게 아쉽다면 근처의 철도 차고지에서 빨간 협궤 열차와 함께 셀피를 남겨도 좋겠다.
>> 베이먼역 嘉義市共和路428号.
>> 히노키 빌리지 10am~6pm, hinokivillage.com.tw
김수지는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의 에디터다. 삼림 열차가 다시 운행할 때, 한번 더 자이를 찾을 예정이다
글. 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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