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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로드 Apr 09. 2019

스위스 만년설 너머로의 휴가

글레이셔 익스프레스의 새로운 럭셔리 객차로 떠나는 스위스 산악 여행. 

고전적인 기차 여행의 낭만이 21세기에 맞춰 부활했다.
스위스의 저 높은 산악 휴양지 장크트모리츠에서 체어마트까지,
글레이셔 익스프레스의 새로운 럭셔리 객차로 여행해보자.



맑은 날이 며칠이나 될까?


(좌) 장크트모리츠에서 가장 오래된 호텔인 쿨름 호텔 장크트모리츠. (우) 쿨름 호텔과 장크트모리츠 호수의 겨울. ⓒ KULM HOTEL ST. MORITZ



새하얗게 얼어붙은 장크트모리츠(St. Moritz) 호수 기슭의 기차역 앞에서 호텔까지 가는 차편을 기다리는 동안, 일행은 이 휴양지의 화창한 날이 연평균 325일이라는 말이 사실인지 논쟁을 벌인다. 오늘이 그 300여 일 중 하루인 듯, 찌를 듯한 햇살 아래 눈을 찡그린 채로. 구체적으로 어떤 기준으로 계산한 것이냐 하는 의혹부터 시작해 단지 홍보 문구일 뿐이라는 비판, 전 세계 기후변화로 화창한 날이 갈수록 점점 줄어든다는 주장이 제기된 끝에 쿨름 호텔 장크트모리츠(Kulm Hotel St. Moritz)의 세일즈 마케팅 디렉터 카티야 슈나이더(Katja Schneider)가 이렇게 잠정 결론을 내린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평균’이잖아요? 325일보다 더 적은 해도 있는 거죠. 아무튼 홍보를 위해 만든 숫자긴 하겠네요.”

호수도, 호수를 둘러싼 산등성이도, 호수를 굽어보는 작은 마을도 온통 하얗게 덮인 장크트모리츠의 겨울. 그 모든 것 위로 자비롭게 내리는 햇살은 알프스 남쪽 기슭 오버엥가딘(Oberengadin)의 작은 산악 휴양지가 자랑하는 자원이다. 150여 년 전의 어느 여름날, 장크트모리츠의 호텔리어 요하네스 바트루트(Johannes Badrutt)가 영국인 손님에게 내기를 건 일화는 다음과 같다. 한겨울에 다시 와도 지금과 똑같은, 어쩌면 더 화창한 햇살을 쬐게 해주겠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여행 경비 일체를 대주겠다는 것. 그리하여 1864년 겨울, 이 영국인은 잘 그을린 얼굴로 ‘알프스 최초의 겨울 산악 관광’을 즐겼다. 그 무렵 장크트모리츠에서는 스위스 최초로 전기등을 밝혔고(1878년 크리스마스 시즌), 알프스 최초로 전기 트램이 달리기 시작했다. 목가적 풍경과 첨단 기술의 조합은 지금도 꽤 신선하다. 나는 장크트모리츠에 머무는 동안 기차역과 시내를 잇는 스위스에서 가장 긴 엘리베이터를 몇 번이나 탑승했다. 에스컬레이터 옆에 죽 붙어 있는 앤티크 관광 포스터를 구경하면서 말이다. 유명한 장크트모리츠 사탑을 안고 춤을 추는 여자, 스키를 고쳐 신는 남자가 그 안에 있었다.




(좌) 디아볼레차 정상의 레스토랑 베르크하우스 디아볼레차 야외 테라스에서 일광욕하는 사람들. (우) 지역 전통 음식인 메밀 면 파스타와 치즈 리소토. ⓒ 이기선



일화의 배경인 쿨름 호텔 장크트모리츠는 장크트모리츠 사탑 앞에 자리한다. 1856년 방 12개짜리 숙소로 시작한, 장크트모리츠에서 가장 오래된 이 호텔은 여행객이 몰려들기 시작하던 19세기의 향수와 21세기의 편리함을 두루 지녔다. 궁궐 같은 응접실, 흑백사진과 트로피가 진열된 미로 같은 통로를 지나면 객실에 도착한다. 최근 개조한 객실은 지역산 소나무 패널을 덧대 특유의 향이 풍기고(숙면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엥가딘 산맥을 그린 유화 아래 베드보드엔 독서등과 USB 포트를 구비했다. 오늘 호텔의 저녁 식사는 식자재를 과감하게 조합한 현대식 페루 요리다.

5.5도 기울어진 사탑처럼 장크트모리츠에서의 시간은 기묘한 아름다움 속에 흘러간다. 명품 부티크가 즐비한 비아 세를라(Via Serlas)부터 이곳의 빛에 사로잡힌 후기인상주의 화가 조 반니 세간티니(Giovanni Segantini)의 미술관 그리고 악마가 산다는 봉우리 디아볼레차(Diavolezza)까지. 기차로 30여 분 이동한 후, 쿵쾅거리는 스키어 무리와 함께 케이블카를 탄다. 해발 2,978미터의 정상에 오르는 동안 발아래로 햇살을 반사하는 순백의 등성이마다 점처럼 보이는 스키어가 궤적을 남기며 미끄러져간다. 아찔한 활강 대신, 정상의 베르크하우스 디아볼레차(Berghaus Diavolezza) 레스토랑에서 근대를 곁들인 전통 피초케리(pizzoccheri, 메밀 면) 파스타와 시아트(sciatt, 치즈 튀김)를 먹는 정도로 마무리한다. 4,049미터의 피츠 베르니나(Piz Bernina)를 비롯한 눈부신 산등성이를 눈에 담으며.





장크트모리츠에서 스키 외에 즐길 거리 


세간티니 뮤지엄

세간티니 뮤지엄. ⓒ 이기선

19세기 화가 조반니 세간티니는 생애 마지막 5년을 엥가딘에서 보내며 빛을 표현하는 자신만의 기법을 발전시켰다. 시내에서 살짝 떨어진 세간티니 뮤지엄(Segantini Museum)은 세간티니가 그린 파빌리온 스케치를 본떠 지었다. 엥가딘 풍경 속 삶과 죽음을 그린 걸작 <삶, 자연, 죽음(La Vita, La Natura, La Morte)>은 별도의 돔형 전시실에 걸려 있는데, 이곳의 하이라이트다.

ⓘ 10스위스프랑, 영문 오디오 가이드 3스위스프랑, segantini-museum.ch


콘디토라이 한젤만

콘디토라이 한젤만의 카푸치노와 엥가딘 타르트. ⓒ 이기선

1894년 문을 연 과자점, 베이커리 겸 카페 콘디토라이 한젤만(Conditorei Hanselmann)은 메인 거리 비아 세를라(Via Serlas)의 명물이다. 진열대에서 원하는 빵이나 케이크를 고른 뒤 안쪽 카페에 자리를 잡자. 엥가딘 견과류 타르트, 알코올이 든 트뤼플 초콜릿을 추천한다. 카페에서는 커피와 브런치 메뉴도 선보인다. 장크트모리츠에서 골프를 치는 오드리 헵번을 찍은 사진, 지역 풍경을 그린 유화, 목조 벽면 등 예스러운 분위기가 매력이다.

ⓘ 커피 4.9스위스프랑부터, hanselmann.ch


체사 푸투라

영국의 건축가 노먼 포스터가 설계한 체사 푸투라. ⓒ 이기선

엥가딘 전통 가옥을 비롯해 오래된 건축물이 모여 있는 장크트모리츠에서 체사 푸투라(Chesa Futura)는 잘못 착륙한 우주선 같다. ‘미래의 집’이라는 이름의 이 아파트는 건축가 노먼 포스터(Norman Foster)가 설계했으며, 25만 장의 낙엽송 널판으로 된 유려한 외관이 땅콩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언덕배기에 있는 주택가를 가볍게 산책하며 감상해보자.

ⓘ Via Tinus 25.





우아한 휴가를 위한 방


(좌) 쿨름 호텔 장크트모리츠의 로비 라운지. © KULM HOTEL ST. MORITZ (우) 쿨름 호텔 내 서니 바에서 선보이는 모던한 페루 요리. © 이기선

최고의 전망을 갖춘 방 장크트모리츠 호수와 산맥이 보이는 객실.

배가 고프면? 고민에 빠질 지 모른다. 미슐랭 1스타를 받은 더 K 바이 팀 라우에(the K by Tim Raue), 페루 출신 셰프가 독창적인 페루 요리를 선보이는 서니 바 바이 클라우디아 카네사(Sunny Bar by Claudia Canessa), 신선한 식자재로 지역 요리를 내는 쿨름 컨트리 클럽(Kulm Country Club), 아니면 올림픽 봅슬레이 트랙 출입문에 위치한 보브 레스토랑(Bob Restaurant)도 있다.

비장의 무기 환상적인 전망을 갖춘 스파에는 수중 음악이 흘러나오는 수영장이 딸려 있다. 또한 키즈 클럽과 아동 스키 그룹 레슨을 무료로 제공한다.

ⓘ 쿨름 호텔 장크트모리츠 640스위스프랑부터, kulm.com




▶ 취재 뒷이야기

세간티니 미술관의 돔 전시실. ⓒ SWITZERLAND TOURISM

묘지처럼 생긴 으슥한 건물에서 입구를 찾아 헤맬 때는 살짝 무서웠지만, 장크트모리츠의 세간티니 뮤지엄은 찾아갈 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특히 풍부한 목소리의 구식 오디오 가이드는 꽤나 유익했다. 돔형 전시실에 걸린 ‘삶, 자연, 죽음’은 각각 엥가딘에서의 삶과 자연 그리고 죽음을 그린 유화 3점으로 이뤄져 있다. 가이드는 여기에 얽힌 흥미로운 뒷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세간티니는 처음에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해 엥가딘 파노라마를 담은 가로 17미터의 거대한 작품을 구상했으나, 예산 문제로 후원자에게 거절당한 끝에 비용이 덜 드는 3장의 연작 스케치로 대신했다. 이것이 박람회에서 열광적 반응을 얻어 세간티니는 이후 수년에 걸쳐 이 작품을 그렸고, 이는 현재 세간티니 뮤지엄 최고의 작품으로 남아 있다. 심지어 박물관 측에서는 세 그림을 따로따로 구입하는 노력 끝에 비로소 온전한 작품 전체를 제자리에 걸게 됐다고. 내가 갔을 땐 돔 전시실에 아무도 없어서 작품의 서늘하고 묘한 매력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글/사진. 이기선


이기선은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의 에디터다. 이번 고산병 테스트(마터호른 글레이셔 익스프레스 방문) 결과 다행히 쓰러지지 않을 정도의 두통과 소화불량만 있었다.


취재 협조 스위스정부관광청(Myswitzerland.com)




'스위스 만년설 너머로의 휴가'에 이어진 이야기

▶ 스위스 만년설 너머로의 휴가 pt.2 -글레이셔 익스프레스

▶ 스위스 만년설 너머로의 휴가 pt.3 -체어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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