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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로드 Jun 01. 2020

에디터의 실패한 여행 - Part 4

난민과 함께한 유럽 기차 여행

에디터들이 실패한 여행의 순간을 소환했다.
유럽 여행 중 우연히 시리아 난민과 함께 기차를 탑승한 이야기.






2015년 8월 31일

헝가리를 관통하는 다뉴브강. 그 뒤로 부다페스트 도심이 언뜻 보인다. ©YULIYA KHOVBOSHA/SHUTTERSTOCK



오후 1시 30분쯤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켈레티(Keleti)역에서 출발한 기차가 5시간 만에 오스트리아 빈 중앙역에 들어섰다. 갑작스럽게 도착 시간이 2시간 넘게 지연된 상황. 지친 기색의 승객들이 열차에서 내리자 눈앞이 하얘질 만큼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진다. 그 혼란스러운 틈을 비집고 나오는 내 모습도 어느 신문 1면을 장식했을지 모르겠다.


이 사건의 발단은 사회 초년생 시절 회사를 그만두고 떠난 나의 첫 유럽 여행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퇴사 여행자의 흔한 레퍼토리처럼 최대한 멀리, 가능한 한 길게 떠나는 여행을 위해 나는 호기롭게 유럽행 비행기에 올랐다. 난생처음 홀로 길 위에 선 여행은 제법 순탄하게 흘러갔다. 유럽에서 흔히 경험하는 비행기 연착이나 소매치기로 피해를 본 적도 없었고, 가는 곳마다 좋은 동행을 만나 여행이 그리 외롭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여행 중반에 다다를 무렵, 부다페스트에서 빈으로 넘어가던 2015년 8월 31일 생각지 못한 사건이 터졌다.


하필 그날따라 컨디션이 영 좋지 않았다. 준비가 늦은 탓에 서둘러 기차에 탑승하느라 소란스럽던 기차역 상황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한데 곧바로 출발한 기차 안은 혼돈 그 자체였다. 이른바 ‘지옥철’이라 불리는 출근길 지하철처럼 복도며 화장실 할 것 없이 사람들로 꽉 들어찼고, 앉을 자리도 부족해 모두 서 있었다. 승객은 초라한 행색에 피부색이 짙은 이가 대부분. 불안감이 옅게 서린 유난히 크고 검은 눈동자를 마주치자 이들이 시리아 난민임을 직감했다. 이 중 몇몇이 종이 뭉치를 손에 꼭 쥐고 있는 걸 보아 매일 기차표를 사며 다른 유럽 국가로 이동할 수 있는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것 또한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시 내전을 피해 수많은 시리아 난민이 유럽으로 건너왔고, 부다페스트에도 상당수의 난민이 더블린 조약(Dublin Regulation, 난민이 처음 발을 디딘 나라에서 망명 신청을 받도록 규정한 유럽연합 조약)으로 발이 묶여 있었다. 그런데 헝가리 정부가 이를 무시하고 이날 난민 수백 명을 몰래 이동시킨 것이다.



부다페스트의 명물 세체니 다리(Széchenyi Chain Bridge) 위로 전차가 지나고 있다. ©LINGXIAO XIE/GETTY IMAGES



차창 밖을 스치는 목가적 풍경과 대조적으로 복작한 객차의 분위기는 비교적 차분했다. 한 손에 보따리를 들고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은 노인과 칭얼대는 아이를 달래는 히잡 쓴 여인의 얼굴에는 그간의 고생이 고스란히 묻어날 만큼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얼마 가지 않아 기차는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지 못하고 결국 멈춰 섰다. 그러곤 난민이 아닌 일반 승객은 모두 기차에서 내리라는 지시가 떨어졌는데, 나는 인산인해를 이루는 객차에서 몸집만 한 캐리어를 들고 빠져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발을 동동 구르던 그때, 한 난민이 내 캐리어를 들어 넘기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뻗는 하얀 손바닥 위로 캐리어가 옮겨졌고, 마침내 나는 기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며 씩 웃는 그들의 눈에는 더 이상 두려움이 없었다. 이웃의 친절함이 느껴질 뿐. 부디 그들이 목적지에 무사히 닿기를 간절히 빌며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이때부터 미디어를 통해 쏟아지는 난민 문제는 내게 더 이상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었다. 현실로 직면하자 비로소 터전을 잃은 그들의 절박한 상황과 난민 문제의 심각성이 가슴에 와 닿았다. 국경의 장벽이 낮아진 시대에 전쟁, 난민, 기아 등 어떠한 문제도 한 국가만의 것일 수 없을 터. 현재 코로나19 확산 사태가 그러하듯, 힘든 상황일수록 본질적으로는 이웃이 겪는 안타까운 비극에 공감하는 자세가 필요할 수 있다.


종종 여행은 우리를 역사의 중심에 던져놓는다. 그때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을 목격하게 되고, 자신 안의 고정관념과 마찰을 빚으며 혼란스러워질지 모른다. 하지만 여행에서만 얻을 수 있는 생생한 경험을 통해 시야가 단 1센티미터라도 확장되는 계기가 됐다면, 세상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포용하는 자세를 배우게 되었다면, 비록 일정이 꼬였더라도 진정 성공한 여행이 아닐까?



글. 문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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