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옆 얼굴을 훔쳐보다가

아빠의 노동 이력서 번외편- 엄마를 경유하기

by 강효진

사실, 나는 나에 대해 쓰는 게 가장 편하다. 내가 특별하고 대단한 것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언제고 기분만 내키면 얼마든지 관찰하고 파고들 수 있는 대상이 나뿐이라서 그렇다. 내가 아무리 오해하고 내 멋대로 재단해 버려도, 그래봤자 나인 걸. 얼마든 수정이 가능했다. 그럴 때마다 발견하는 내가 놀랍도록 새로웠다. 아니, 세상 무엇보다 매일, 매 순간, 새롭게 태어나는 게 바로 나인 것만 같았다. 이렇게 재밌는 걸 어떻게 멈출 수가 있죠?

내 이야기를 듣던 친구가 그랬다. 너, 보기보다 왕따 시절이 길었구나? 그 말에 무릎을 쳤다. 맞네, 어릴 때부터 나는 친구가 없었잖아. 나는 나랑만 지내다가 변덕스런 나에게만 익숙해져버린 모양이었다.


나랑만 놀던 시절에 적은 글들을 어찌어찌 출간하고 나니, 뭔가 답답해졌다. 결국 내 이야기를 하더라도 경유지가 있는 방식을 찾아보고 싶었다. 그 희생양이 바로 우리 아빠였다. 쉼보르스카는 한 집안에서 “시인이 나왔다면 혼자만의 문제로 끝나는 법”이 없이 “무시무시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가족을 넘어 세대를 관통한다고 했는데. 고작 책 한 권 낸 딸내미는 이제 아빠를 소용돌이 속으로 끌어들일 모양이었다. 아니, 나는 쉼보르스카의 눈곱보다도 잔잔하니, 소용돌이가 아니라 잔잔한 연못으로 끝나겠지. 안전하게!


덕분에 나는 요즘 아빠와 인생에서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있다. 1년에 서너 번 만나면 할 이야기가 많고, 평소엔 절대 할 일 없던 영상 통화도 하는 사이가 되었다.

우리 둘만의 통화에 한 사람이 더 끼어 있다는 걸 얼마 전 알게 됐다. 바로 아빠의 동거인인 엄마였다. 아빠와 통화가 끝나고 나중에 엄마랑 얘기하다 보면, 엄마 또한 나처럼 아빠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난 네 아빠가 그 정도로 힘든 줄 몰랐어.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몰랐어. 듣고 있으면 네 아빠가 안쓰러.”

평생 이혼 이슈를 내려놓은 적 없던 엄마 아빠 사이가 요즘 부쩍 좋아진 건, 다 내 덕분인가.

문제는 내 이야기를 쓰는 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어떻게든 쓰게 되는데, 아빠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돌아와 내 이야기를 쓰는 것이 참 쉽지가 않다는 거다. 아빠에게 같은 문제를 여러 번 물어봐도, 녹음해 둔 아빠 목소리를 반복해서 들어도, 글로 쓰려고만 하면 언제나 미진하고 허전해서 글이 산으로 갔다. (괜한 짓을 시작한 건가…)


얼마 전에는 아빠가 이주민 센터에서 한국어 강사로 일했던 때의 이야기를 듣고는 뭔가 아쉬운 기분이 들어서, 엄마는 그때를 어떻게 기억하는지 물어봤다. 아빠가 그 시절 어때 보였는지, 곁에 있던 엄마는 힘들지 않았는지.

엄마는 천연덕스런 목소리로 특별히 기억나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아니, 이야기 해 줄 게 하나도 없으면서 뭐 그리 당당하냐고, 딸한테 아무 도움도 안된다고, 뭐라도 떠올려 보라고 오히려 큰소리쳤더니, 엄마가 그런다. 그때 누가 뭐래도 아빠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고. 돈과 상관없이 센터에 오는 학생들 도와주려고 몸 사리지 않고 뛰어다녔다고.

그러더니 은근슬쩍, 엄마가 했던 봉사 활동 이야기를 꺼냈다.



*



내가 열 살되던 즈음부터 엄마는 친구 따라 적십자 활동을 시작했다. 병원이 없는 시골로 의료 봉사를 다니는 의사들을 도와 할머니, 할아버지를 안내하고 돌봐드렸던 일, 노숙인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어 식사를 대접한 일, 노인복지관에 정기적으로 찾아가 직접 만든 음식을 대접하며 어르신들과 함께 이야기도 나누고 노래도 불렀던 일.

기억한다. 내가 열 살 때면, 엄마가 한창 불면증으로 잠도 못자고, 아빠와도 날마다 싸우느라 한창 우울하고 힘들던 시절이었다는 걸. 스스로를 돌보는 것도 엄마는 버거워했다는 걸. 엄마도 괴롭던 그 시절에 남을 돕는 게 힘들지 않았느냐는 내 물음에 엄마는, 힘들지 않아 신기했다고 했다. 만날 집에서만 지내면서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는데, 엄마 손으로 보탬 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다행스러웠고, 그래서 즐거웠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20년이 흘렀다고 했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부터 엄마는 정기적으로 만나던 친구들과 홀로 지내는 할머니들을 모시고 대중목욕탕에서 때를 밀어 드리는 봉사도 했다. 할머니들마다 요구사항이달라서 그에 맞게 엉덩이만, 등만, 혹은 상반신은 빼고 하반신만 때를 밀어드렸다. 몸이 아파 스스로 씻을 수 없는 할머니들은 서너 명이 함께 온몸을 씻어드리기도 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나 어릴 때 일 주일에 한번씩 대중목욕탕에 가는 일이 아주 곤욕이었던 게 떠올랐다. 엄마는 때를 꼼꼼하다 못해 집요하게 밀어서 목욕하러 가는 게 두려울 지경이었다. 내가 친구들과만 목욕탕에 다녀오면, 엄마는 물만 묻히고 왔을 게 뻔하다면서 나를 데리고 다시 목욕탕에 간 적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는 어르신들 몸에서 때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밀어야 직성이 풀렸다고 했다. 처음 봉사 활동 시작할 때는 엄마를 보고 “너처럼 비실거리는 애가 이런 봉사 할 수 있겠어?” 했던 친구들이, 이제 그만 하라고 말릴 정도였다는 거다.


힘들게 뭐하러 그렇게 열심히 했냐고, 몸살이 나진 않았느냐고 묻는 내게 엄마가 대답했다. 그 동안 잘못한 게 너무 많은데, 나이든 어르신들 몸이라도 씻어드리면 그간 지은 죄가 조금이라도 씻겨나가지 않을까 싶었다고. 그게 그렇게 절실했다고. 아침 일찍부터 뜨거운 수증기가 가득한 곳에서 물인지 땀인지 모를 것을 잔뜩 흘리고 나오면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었단다. 친구들과 조금 늦은 점심을 먹으면, 평소엔 없던 입맛도 귀신 같이 돌아와 있었단다. 그게 다 엄마의 죄가 씻겨나갔다는 의미인 것 같아 좋았단다.

평소 엄마답지 않게 달아오른 목소리로 쉬지 않고 말을 이어가던 엄마가 갑자기 심드렁해져서는 한 마디 툭 던졌다.

“아이구, 솔직히 때 그거 좀 밀었다고, 그 많은 죄가 다 씻기겠니? 나도 참 의미부여가 거창했지.”

엄마의 그 말이 이렇게 들려왔다.


내 모든 시간들이 고통이었다. 살아오는 동안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었다. 아직도 내 마음 속에는 지우지 못한 미움이 남아있다.


도대체 엄마가 무슨 죄를 그리 많이 지었느냐고 묻지 않았다. 아빠를 경유하다가 우연히 들어선 모퉁이에서 오랫동안 혼자였던 엄마의 옆 얼굴을 훔쳐본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얼굴이 내가 나를 본 듯 새롭고 외로워보여서, 오랫동안 잘근잘근 곱씹으며 원망해왔던 엄마의 사납던 모습 하나를 가만히 문질러 씻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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