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와서 무르익는 시간들

- 건설 시행사 행정 고문으로 일한 1년 7개월

by 강효진

책장 가장 아래 구석진 자리에는 손때가 묻어 꼬질꼬질한 다이어리가 스무 권 넘게 쌓여있다.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가리지 않고 논술이며 국어 수업을 하는 동안 해마다 빠뜨리지 않고 적어온 다이어리들이다. 그 중에 가장 너덜너덜하고 속지가 울퉁불퉁 부풀어오른 다이어리는 내가 가장 바빴던 시절에 쓰던 것이다. 논술 강사로 함께 일하던 친구와 함께 논술 전문 프렌차이즈를 맡은 이후로 정신 없이 일을 하던 2007년이었다.

그때 나는 초등학생이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오후 2시부터 수업을 시작해서 밤 10시까지,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수업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튼튼한 몸과 시간 뿐이라서 내가 쓸 수 있는 체력과 시간을 몽땅 일하는 데에 썼다. 일하는 만큼 돈을 벌 수 있었으니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했다. 조금 더 요령이 있었다면 강사를 더 채용해서 학생을 더 많이 받았으면 좋았을 테지만, 나를 찾는 학부모들을 다른 강사에게 맡길 배짱이 내게는 없었다. 사실 돈을 버는 것보다 나를 찾고 인정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내가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에 더 큰 기쁨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내가 언제 가장 보람을 느끼고, 언제 가장 행복한 사람인지를 나 스스로도 잘 모른 채 일을 했다는 것이었다.

몸을 혹사시키면서 일을 한 덕분에 그 시절 돈도 가장 많이 벌었다. 그렇게 돈을 벌면서도 나는 늘 불안했다. 쉴 수 있는 시간이 생기면 공부하고 수업 준비를 해 가면서 열심히 일했는데도 가르치는 학생이 한 명이라도 줄어들면 모든 학생들이 전부 그만 둘 것처럼 불안했고, 학생이 한 명이라도 늘어나면 잠시나마 덜 불안했다. 돈을 많이 벌면 학생들이 들고 나는 일에 덜 초조해지고 학부모들의 반응에 의젓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 때 나는 너무 예민해서 망가진 저울 같았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오르내리며 달라지는 초조와 불안의 무게에 몸과 마음이 반응하느라 지쳐버렸다. 게다가 그렇게 온몸을 다해 벌어들인 돈이 쓰는 건 순식간이었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부질없다고 느껴질 때마다 (그 이후로 16년은 더 일할 운명이라는 것도 모르고) 혼자 중얼거렸다.

"이 일을 언제쯤 관둘 수 있을까."


*


"이 일을 관두면 뭘 하고 사나."

다가오는 퇴직 시기를 가늠하며 아빠는 화두처럼 이 말을 품고 지냈다. 평생 공무원으로 일만 하느라 기술도 없고, 달리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던 아빠. 오직 일하는 게 기쁨이었던 아빠에게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한 회사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은 것이었다.

2007년 1월 8일, 퇴임식을 한지 열이틀만에 아빠는 새로운 회사로 출근했다. 주로 아파트를 짓는 건설회사의 시행사였는데, 아빠는 아파트를 짓기 위한 인허가 과정에서 필요한 지자체와의 협의나 행정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행정 고문을 맡았다. 누구보다 잘 아는 일이었기에 아빠는 자신감을 가지고 일을 시작했다. 대관(對官) 업무를 위해 가는 곳이 아빠가 일하던 시청과 도청이었고, 만나는 담당 공무원들도 함께 일했던 후배들이었다. 입장이 조금 달라졌을 뿐 비교적 익숙한 일을 하는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입장이 달라진다는 것은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지는 일인지도 몰랐다. 회사로부터 협의를 제안받고 허가를 받기 위해 일을 부탁받던 입장에서, 이제는 협의를 제안하고 기관을 상대로 회사의 계획과 사업의 필요성을 설득해야하는 입장이 되었으니까.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처지를 모두 경험하면서 아빠는 오히려 담당 공무원에게 요구사항을 더 강하게 밀어부치기 어려웠다고 했다.

나라도 회사의 입장을 무조건 들어주지 않았을 테니까, 아빠는 담담하게 말했다.


아빠가 맡았던 여러가지 일들 중에 가장 마음을 썼던 사업에 대한 이야기는 꽤 여러 번 반복되었다. 시청과 도청을 드나들며 아빠 나름 애를 많이 썼지만, 결국 회사에서 개발하고자 하는 지역에 대한 허가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여러가지 문제가 얽혀 그랬던 것이지만,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회사에 미안하다고 했다. 최근에도 그 지역에 대한 소식을 지인을 통해 전해들었다고 말하는 아빠의 목소리는, 마치 어제 꼭 하려고 마음 먹었던 일을 끝내 하지 못해 서운한 사람처럼 들렸다.

도대체 그게 몇 년 전이야. 혼자서 손가락으로 꼽아보다가 16년 전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아빠가 말했다. 회사에서 믿어준 만큼 일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그 말을 듣고나니 아빠의 마음을 아주 아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아빠 역시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역할을 다 하며 일하는 것을 좋아했던 거라고 말이다. 바로 나처럼.


나처럼 2007년은 아빠에게도 인생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벌던 시절이었다. 아빠는 공무원으로 일할 때 마지막으로 받았던 연봉을 그대로 받고, 대외 활동비까지 적지 않은 액수를 지원받으며 일했다. 이미 퇴직 연금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수입은 지금 생각해도 꽤 큰 금액이었다. 아빠는 다시, 내가 예상치 못한 말을 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돈을 많이 벌었던 것이 네 엄마나 나에게 나쁜 영향을 남겼다고 봐야지."

어째서 그렇냐고 묻는 내게, 아빠는 엄마와 처음 살던 신혼집 이야기를 꺼냈다. 지붕만 대강 얹어놓은 부엌이 달린 문간방 하나를 얻어 단 둘이 살던 집을. 그 작디 작은 방이 아기자기하고 좋았지만, 2년만에 방이 두 개 있는 조그만 연립주택으로 이사를 갔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를. 집 주인 눈치 보지 않고, 내가 태어나 이제 막 세 식구가 된 우리 가족끼리만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어 행복했단다. 그 이후 조금씩 살림을 키우며 이사를 할 때마다 집은 조금씩 넓어졌지만, 더 넓어진 집에 살면서 적응 같은 건 필요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넓은 집에 살다가 조금만 좁은 집으로 옮겨도 불편해지는 게 사람 마음이라고 아빠는 말했다.

실제로 엄마와 아빠가 퇴직 이후로 더 좁은 집에 살게 되었던 건 아니다. 가만히 있는 건 성격에 안 맞고, 무슨 일이든 몸소 해보는 것을 좋아하는 아빠가 나이가 들어갈수록 할 수 있는 일들이 줄어들고, 흐르는 시간과 함께 벌이도 점차 아기자기하다 못해 비좁아졌던 거라고 나 혼자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아빠에게 나쁜 영향을 미쳤다고 단언할 수 없었다. 아니, 2007년 이후 점점 적게 돈을 벌고 몸을 더 많이 움직였던 시간들이, 돌이켜 생각해 보면 오히려 꽤 괜찮은 시간으로 남을지도 몰랐다. 그 때의 의미는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순간까지 내내 익어갈 테니까. 아빠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고장난 저울 같았던 내 2007년도 무르익을지 모르니까.


건설 시행사에 다닌지 1년 7개월만에 아빠는 행정 고문 일을 그만 두었다. 회사에 미안했던 아빠가 내린 결정이었다. 그날부터 아빠는 틈틈이 해 오던 봉사활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역시 가만 있을 아빠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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