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달간 다닌 요리 학원
"나는 여전히 배고프다."
히딩크 감독만 그랬던 아니다. 아빠는 자주 배가 고팠다. 밥 먹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 많은 음식들은 위장을 그저 스쳐지나가버린 건지, 밥때가 돌아오기도 전부터 배가 고파왔다. 누구보다 든든히 속을 채워도 한두 시간 가벼운 운동 후에는 여지없이 참을 수 없는 허기가 달려들었다. 양껏 식사를 마친 후 느긋하게 떡이나 빵을 먹을 때면 비로소 은근한 미소가 번졌다.
먹을 것이 늘 부족했던 어린 시절, 아빠는 음식의 맛은커녕 무엇이 됐든 일단 배불리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다. 적은 밥으로 여러 식구의 배를 채우기 위해 죽을 밥먹듯 먹었다. 찬밥 두어 덩이, 쫑쫑 썬 김치 한 대접, 거기에 물을 가득 부어 끓이면 밥은 요술처럼 불어나 김치죽이 되었다. 커다란 냄비에 온 식구가 매달려 나누어 먹고 돌아서면 어렸던 아빠의 조그만 뱃구레도 요술처럼 금세 꺼졌다. 어려웠던 그때에도 어린 아빠 몫으로 욕심껏 한그릇 가득 먹을 수 있는 음식이 하나 있었다. 김장을 하면서 떼어낸 배추 겉잎들을 모아다가 말린 우거지로 끓인 우거지 된장국이었다. 김장철이 다 지나서 빈밭에 나가도 배추를 따면서 도려낸 배추 꼬리나 겉껍질은 널려 있기 마련이라, 그것들을 가져다가 끓여 먹기도 했다. 먹을 수 있을 때 실컷 먹어두는 게 나았다. 어른이 되고, 돈을 벌고, 먹을 것이 넉넉해지고 난 후에도 지칠 줄 모르고 찾아드는 허기는 배를 곯는 것이 일상이었던 어린 시절이 위장에 새겨놓은 습관 같은 것인지도 몰랐다.
아빠의 허기가 유난히 기승을 부렸던 건 건설시행사를 그만 둔 후 이주민 센터에서 한국어 강사로 일하던 시절이었다. 일주일에 닷새, 하루 두어 시간. 이주 여성들에게 한국어 강의를 하는 것이 즐겁고 아빠에게 주어진 일이 있다는 건 감사했지만, 그것만으로는 허기를 채울 수 없었다. 아빠는 여전히 배가 고팠다. 무엇보다 일이 고팠다. 그저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구직 관련 정보를 얻기 위해 고용지원센터에 드나들다가 국비 지원을 받아 직업 훈련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배우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호기심부터 발동하는 아빠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요리 수업이었다. 몸이 약해서 늘 기운이 없고, 잠을 잘 못자서 입맛이 없는 엄마를 위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이번 기회에 잘 배워두면 두고두고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오래 전부터 품어온 아빠의 작은 소망, 어려운 어르신들을 위해 칼국수나 짜장면 같은 값싸고 배부른 음식을 직접 만들어서 한 끼 대접하는 봉사에 힘을 보태고 싶다는 바람을 이루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수업을 들을 때마다 아빠 손에서 요리가 하나씩 완성될 것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힘이 솟았다. 그러다가 운이 좋으면, 정말 식당 주방에 취직이라도 하게 될지 누가 알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몸과 마음이 부듯해지면서 내내 따라다니던 허기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
요리 강의가 시작되던 날, 커다란 강의실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아빠에게로 쏠렸다. 일곱 명의 수강생들 중에 아빠는 단 한 명의 남성 수강생이자 60대 최고령 학생이었다. 호텔 조리사를 거쳐 기능장으로 큰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는 요리 선생님이 남성이라는 게 아빠는 어쩐지 반가웠다. 한식, 양식, 제빵 등 다양한 조리사 자격증 수업들 가운데 아빠는 한식 육류 전문점 조리사 과정 강의를 선택했다. 아빠가 보기에 다른 요리에 비해 육류 요리가 비교적 쉬워보인다는 것이 그 이유였는데, 막상 강의가 시작되고 보니 아빠는 또한 그 수업 유일한 요리 초보였다. 30대에서 50대까지 골고루 모인 수강생들은 이미 식당을 운영하고 있거나 주방에서 실무를 쌓으며 식당 창업을 준비하는 이들이었고, 전문적인 실력을 더 쌓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아빠의 서툰 손길은 강의실에서 단연 돋보였다. 가장 자신있는 건 라면과 오뚜기 수프 끓이기이고, 엄마를 도와 김밥을 말거나 계란탕이나 달걀말이, 미역국 정도를 만들어 본 것이 요리 경력의 전부이다 보니 기본적인 재료나 조리 과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이 간장 한 숟가락 반을 넣으라고 하면 동료들은 이미 알아서 다른 재료들까지 척척 계량해서 양념을 만드는데, 아빠는 '반 숟가락'이 어느 만큼인지부터가 알쏭달쏭했다. 계량 스푼에 담긴 간장을 들여다 보면서 혹시 양념이 모자란 건 아닌지, 아니면 너무 많이 뜬 건 아닌지 한참을 고민하느라 뜸들이기가 일쑤였다.
매운 돼지 갈비찜에 들어갈 무를 손질할 때는 엄마가 만들어준 갈비찜을 떠올리며 아빠 나름대로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능숙한 동료들이 무 껍질을 단번에 돌려깎기하는 동안 아빠는 사과 깎듯 한 땀 한 땀 벗긴 후 고기 크기와 어울리는 정도로 무를 큼직하게 썰고 나서 고개를 들었는데, 이미 다른 재료 손질을 하고 있던 옆 조리대 동료가 아빠를 보며 눈짓을 했다. 썰어둔 무의 뾰족한 모서리를 둥글둥글 깎는 것까지 마쳐야 진짜 무 손질이 끝나는 것이었다. 아빠는 뒤늦게 허둥지둥 무와 당근의 모서리를 다듬었다. 이걸 뭐하러 굳이 깎아서 아깝게 버리나, 속으로 구시렁거리면서. 오래 끓여야 하는 찜 요리에는 무나 당근을 둥글게 다듬어 넣어야 끓이는 동안 부서지지 않고 국물이 탁해지는 것도 막을 수 있다는 것은 그날 수업이 다 끝나고 나서야 알았다. 역시나 그날도 매운 돼지 갈비찜을 꼴찌로 만든 사람은 아빠였다.
두 시간의 수업이 한바탕 태풍처럼 아빠를 휩쓸고 나면 조리대 위에는 갈비찜, 불고기, 안동 찜닭 같은 요리가 완성되어 있었다. 설마하는 마음으로 갈비찜 한 점을 입에 넣으면 갈비찜 맛이, 불고기에서는 정말 감칠맛 나는 불고기 맛이 났다. 안동 찜닭에서는 놀랍게도 제법 그럴듯한 안동 찜닭 맛이 나서 부드러워진 닭고기와 푹 익어 달큰한 양파를 몇 번이고 입에 넣어 확인했다. 아빠의 투박한 솜씨로도 이런 맛을 낼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못해 신비로웠다. 그 오묘한 결과물을 밀폐용기에 잘 담아가지고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맛을 보일 때면 더욱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음식맛에 까다로워서 외식을 하더라도 입맛에 안 맞으면 젓가락질이 영 느려지던 엄마가 아빠가 만든 음식을 먹느라 손이 바빠졌던 것이었다. 대수롭지 않은 듯 "맛이 괜찮네" 중얼거리면서도 엄마는 남은 국물에 밥까지 싹싹 비벼먹었다.
놀라운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우리 부부와 동생네 가족까지 부모님 집에서 모두 모이는 날이면 엄마는 아빠에게 갈비찜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달걀프라이라도 할라치면 사방으로 기름 다 튀긴다고 한사코 말리던 엄마가 아빠에게 부엌을 내주다니. 그날만큼은 식재료는 물론이고, 요리를 배우며 마련한 아빠 전용 식칼과 계량컵, 계량스푼, 주방 저울까지 몽땅 꺼내놓고서 당당히 싱크대를 어지럽히며 갈비찜을 만들었다. 식탁에 둘러 앉아 손수 만든 갈비찜을 온 가족이 맛있게 먹는 것만 봐도 평생 아빠를 따라다니던 허기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우리가 돌아간 후 어지러운 부엌을 치우는 동안 엄마의 잔소리는 좀 들어야 했지만 말이다.
아빠는 더 잘해보고 싶었다. 요리학원에서 배운 것을 집에서 복습해 보고, 아빠 방식으로 요리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러려면 더 많은 연습이 필요했다. 문제는 청소에 있어서만큼은 한치의 양보도 없는 엄마였다. 아빠가 부엌을 뻔질나게 들락거리며 요리하는 것을 순순히 허락할 리가 없었다. 아빠는 엄마와 부엌 사용권을 두고 협상에 들어갔다. 아빠는 엄마가 좋아하는 고기 요리를 정성껏 만들어 내놓겠다고 장담했다. 아빠가 요리를 한 날은 엄마가 식사 준비를 따로 할 필요가 없다고, 분명 후회없는 선택이 될 거라며 평소 음식 만들기를 힘들어하는 엄마의 감성에 호소했다. 좋아하는 고기 요리를 자주 먹을 수 있다는 말에 마음이 약해진 엄마는 역시나 꼭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고기 요리는 유난히 기름이 많이 튀고 지저분해지니 음식을 다 만든 후에는 반드시 부엌을 깔끔하게 청소할 것. 물론 아빠는 그 내용을 흔쾌히 받아들이면서 협상은 타결되었다
사소한 일로도 종종 부부싸움을 하며 매운맛 일상을 이어가던 엄마와 아빠는 모처럼 순조로운 날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연인끼리 다퉜을 때는 삼겹살이나 갈빗살처럼 쫄깃한 고기 요리를 먹으면 금세 마음이 풀린다더니, 달콤하고도 간간한 불고기나 구수하고 야들야들한 된장 수육 보쌈이 엄마와 아빠 사이를 쫄깃하게 만들어준 것 같았다. 엄마는 아빠가 만들어준 불고기를 먹으면서 얼핏 아빠가 이대로 계속 요리학원에 다니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하기도 했다. 아빠가 또 어떤 요리를 만들 수 있을지가 궁금했다. 부엌에서 요리를 만들 때면 아빠는 세상 근심을 다 잊을 수 있었다. 엄마가 눈을 반짝이며 아빠가 만든 음식을 먹을 때면 뿌듯함만으로도 배가 불렀다.
그때 엄마와 아빠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를 놓치고 있었다. 엄마 기준의 '깔끔'과 아빠 기준의 '깔끔'이 너무 다르다는 사실 말이다. 함께 식사를 다 마친 후 약속한 대로 아빠는 조리대와 가스렌지 주변을 닦고, 싱크대까지 싹 청소를 한 뒤 설거지를 했다. 아빠 나름대로 깔끔한 마무리였다. 잠들기 전 물을 마시러 부엌에 들어간 엄마는 무심코 가스렌지로 고개를 돌리다가 결국 보고야 말았다. 가스렌지 옆 하얀 타일에 점점이 튄 갈색 양념 자국을. 그 옆에 사용하지도 않은 냄비 뚜껑 위에는 기름 방울이 허옇게 붙어 있었다. 물컵을 내려 놓다가 싱크대 안쪽 배수구 주변으로 아직도 번들거리는 기름때를 본 순간, 엄마는 고무장갑을 끼었다. 이대로는 그냥 잘 수가 없었다. 몇 번 모른 척 넘기기도 하고 엄마가 남은 청소를 하기도 했지만, 이제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부엌을 청결하게 닦지도 않으면서 요리를 하겠다는 아빠가 엄마는 못마땅했다. 맛있는 음식보다 깨끗한 부엌이 엄마에겐 더 중요했다. 아닌 밤중에 굳은 표정으로 청소를 하는 엄마를 본 아빠는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싶었다.
평소에도 유난히 깔끔한 엄마를 맞추는 것이 아빠는 쉽지 않았다. 아빠 딴에는 깨끗하게 청소를 한다고 했는데도, 엄마는 아빠가 청소를 아예 하지도 않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아 억울했다. 30년 넘게 함께 살아왔으면서 '깔끔'에 있어서는 결정적인 합의에 도달하지 못한 엄마와 아빠의 부엌 협상 시대는 그렇게 끝났다. 아빠는 더 이상 요리 연습을 할 수 없게 되었고, 두 달간의 요리 수업을 마친 이후로 더 이상의 수업을 받지 않았다.
"그때 조금만 더 연습을 했더라면, 백종원만큼 대단하진 않아도 레시피 노트를 만들어서 너희들에게 물려줄 수 있었을 텐데..."
요리 배우던 일을 신나게 이야기하던 아빠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에겐 아빠에게서 물려받은 레시피가 있다는 것을.
*
크리스마스를 앞둔 겨울이었다. 엄마 아빠는 연말 모임이 있어 저녁 외출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빠는 우리에게 저녁 메뉴로 무얼 먹고 싶냐고 물었다. 먹고 싶은 것을 사다 먹으라고 용돈을 주려는 것이었다. 평소라면 신나서 이 기회에 용돈을 왕창 받아 먹고 싶은 것을 실컷 사다 먹으려고 했을 텐데. 그날따라 아빠가 가끔 만들어주던 떡볶이가 먹고 싶었다. 보통 먹고 싶은 게 아니었다. 집 근처에는 떡볶이를 사 먹을만한 분식집 하나 없었는데, 아니 그 흔한 분식집 하나가 없어서 떡볶이 생각은 더더욱 간절해졌다. 엄마 아빠는 멋지게 차려입고 외출을 하는데, 동생과 둘이 집에 남아 쫀득하고 매콤달콤한 떡볶이라도 먹지 못한다면 어쩐지 억울할 것 같았다. 아빠는 다른 걸 먹으면 어떻겠느냐고, 평소 내가 좋아하던 치킨이나 자주 사 주지 않던 햄버거 따위를 들먹일수록 떡볶이에 대한 열망은 커져만 갔다.
"그럼 네가 떡볶이를 만들어 봐!"
아빠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왔다. 내가 떡볶이를 만든다고? 라면을 끓여본 적은 있어도 직접 간을 보면서 고추장이나 간장 등의 양념을 넣고 끓이다가 이만하면 먹어도 되겠다고 내 스스로 결정하고 가스불을 끄는 진짜 요리의 경험은 단 한번도 없었다. 요리는 능숙한 어른만 들어갈 수 있는 세계였다. 그 의젓한 세계에 드디어 첫 발을 디디는 것이었다.
아빠는 수첩에 번호를 매겨가며 떡볶이 만드는 방법을 대여섯 줄 정도 적어주고, 냉동실에 들어있던 떡국떡과 필요한 재료들을 식탁 위에 올려놓은 후 집을 나섰다. 나와 내 동생은 머리를 맞대고 아빠의 글씨를 꼼꼼히 읽어내려갔다. 떡볶이 만드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해 보였다. 그 밤 나는 셰프가 되어 주방 전체를 진두지휘했다. 위험할 수 있는 가스불을 켜고 조절하는 일부터 끓고 있는 고추장 국물에 떡국떡을 넣어야 할 때를 결정하고, 떡볶이의 맛을 좌우하는 설탕을 얼마나 넣을 것인지를 판단해야 했다. 하나뿐인 조수(동생)에게는 파 써는 일을 맡겼다. 손수 파를 썬다는 사실에 신난 조수의 안전을 위해 커다란 식칼 대신 반드시 과도만을 사용하도록 지시해야 했다.
말랑말랑해진 떡국떡에 고추장 양념이 스며들면서 제법 떡볶이 냄새가 났다. 뿌연 김이 한가득 오르는 냄비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동생과 마주앉아 포크로 떡볶이를 찍어 먹었다. 놀랍게도, 맛있었다. 아빠의 요리 비법이라는 다시다 두 꼬집의 위력은 대단했다. 떡볶이가 이렇게 쉬운 거였다니! 그간 떡볶이를 만들어 먹지 않고 살아온 12년 인생이 분할 지경이었다. 냄비에 남아있는 국물까지 숟가락으로 박박 떠먹고 있으니 연말 파티가 따로 필요없었다. 좋아하는 음식을 내 손으로 만들어 먹는 작은 기쁨을 처음 맛본 것이었다.
아빠가 떡볶이 레시피를 적어준 수첩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내 입맛대로 좋아하는 떡볶이를 만들어 먹는다. 멸치와 다시마로 육수를 내고, 고추장과 간장, 설탕을 적당히 넣어 양념을 끓이다가 냉이나 표고버섯, 양파 같은 것을 넣은 후 마지막으로 말랑해진 떡을 넣어서 잘 끓이면 맥주와도 잘 어울리는 나만의 떡볶이가 만들어진다. 다만 한 가지, 지금도 나는 기름한 떡볶이떡 대신 납작한 떡국떡으로 떡볶이를 만든다. 떡이 얇아서 양념이 잘 배고 휘리릭 빨리 만들 수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제 보니 오래 전 아빠의 레시피가 내 마음 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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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이제 대식가가 아니다. 지독했던 추위가 누그러지던 지난 3월, 갑자기 많이 아프고 난 이후로는 예전처럼 자주 배가 고프지도 않고 그 좋아하던 떡 생각도 별로 안난다고 한다. 하루에 한 시간 무리하지 않으며 걷고, 하루 세 끼 욕심내지 않으며 먹고. 소식이 몸에 좋은 거라고 말하는 아빠의 커다란 목소리에 왜 내 속이 허전한 걸까.
몰두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욕심을 부리던, 도통 채워질 줄 몰랐던 아빠 허기의 궤적들을 더 열심히 쫓아가 보고 싶다. 운이 좋으면, 내 글을 읽은 아빠에게 잃어버린 허기가 다시 돌아올지 누가 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