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기

- 냉동.냉장 창고 야간 경비

by 강효진

이사를 준비하고 있다. 새로운 세입자를 구하기 위해 집주인은 집을 내놓았고, 우리집은 비상사태다. 두 사람만으로도 복작대던 집을 생판 모르는 사람들에게 내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전 하나 부쳐도 기름이 튀기 마련이라 언젠가부터 무신경하게 넘기던 가스렌지 주변 타일에 묻은 기름때를 박박 문질러 광을 내고, 평소엔 들여다본 적도 없었던 창틀, 가구와 가구 사이의 비좁은 틈까지 쓸고 닦느라 바쁘다. 요즘 우리집은 그 어느 때보다 청결하다. 맨발로 집안을 돌아다녀도 발바닥에 아무것도 들러붙지 않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이었다니. 진작부터 바지런히 청소하고 집을 돌보며 살았더라면 우리 부부의 몸과 마음도 더 건강했을 텐데. 미련한 게으름뱅이는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나서야 부지런을 떠는 법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청소에 쏟아붓고는 거실 바닥에 널부러져 있으려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전등 스위치 주변으로만 유난히 꼬질꼬질해진 벽지. 이 집에서 살았던 세월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줄로만 알았는데, 남편과 나의 8년치 손자국이 거기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모처럼 깨끗이 닦아 반들거리는 하얀 플라스틱 스위치는, 세월의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거뭇거뭇한 손때를 더욱 강조하고 있었다. 간신히 감춰두었다고 믿었던 살림의 누추함이, 구저분한 땟자국 하나로 여지없이 드러난 듯해 부끄러웠다. 젊은 부부들이 어색한 표정으로 우리집 구석 구석을 살피다가 욕실을 향해 목을 빼고서 스위치를 켤 때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보지 않으면, 그들에게도 손때가 눈에 띄지 않을 것처럼. 내가 외면하는 순간만은 꼬질꼬질해진 벽지가 깨끗해지는 마법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아빠는 안 그랬다. 아빠는 가장 구질구질하고 초라한 시절을 가리켰다. 이걸 봐, 이게 내가 살아온 모습이야. 아빠의 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그 시절을 향해 곧게 뻗어 있었다.


*


아빠가 유기 동물 보호소를 그만두었던 때는 시장 경선 출마에서 탈락한 때로부터 만 4년이 되어가던 무렵이었다. 지척에 살면서도 먹고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선거운동을 발벗고 돕지 못했다는 죄책감 속에서 나는, 4년이면 엄마와 아빠가 선거 실패의 후유증을 털어냈으리라 여겼다. 아니, 제발 그랬기를 바랐다. 그러면 아무리 온몸을 세차게 흔들어도 좀처럼 떨어질 줄 모르던 가슴 속 죄책감을 떨쳐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서 홀가분해지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4년과 엄마, 아빠가 보낸 4년의 무게는 달랐다. 어려움을 함께 겪었으면서도 그로 인해 얻은 상처는 달랐기에 엄마와 아빠는 더 외로워졌다. 서로가 아프다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 얼마나 아픈지 헤아리지 못해 서로의 상처를 오히려 더 깊이 들쑤시곤 했다. 원망은 더욱 커졌다. 게다가 선거 자금에 도움을 줬던 이들에게 돈을 갚고 나니,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는 노년에 대한 걱정은 엄마 아빠에게 점점 더 큰 두려움이 되었다. 당장 큰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마음의 여유는 세월과 함께 작아져만 갔다.


그 즈음, 몸과 마음이 지친 엄마는 고향 생각이 간절했다. 경주에 가면, 요양 병원에 계시기는 했지만 외할머니가 있었고, 큰이모와 작은 외삼촌이 고향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웠던 고향에서 작은 집을 얻어 노년을 마음 편히 보내고 싶었다. 외할머니와 한시라도 더 얼굴을 맞대며 모녀간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고, 형제들과 가까이 살면서 추억도 만들고 싶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자 엄마는 마음이 급했다.


엄마와 달리 아빠는 일이 절실했다. 조금이라도 시간이 나면 어김없이 이주민센터로 달려가 이주 여성들에게는 한국어를, 이주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는 한국 문화를 가르치는 일을 했지만, 아빠는 더 많은 일을 원했다. 일을 하는 동안에는 막막한 노년도, 외로움도 견딜 만하게 느껴졌다. 적더라도 돈을 벌고 싶었다. 아빠는 살아가는 데에 많은 돈이 필요치 않았고, 가진 게 적다면 더 적게 쓰며 살면 될 일이었다. 노동은 아빠가 살아있음을 깨우치는 친구이자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의지처였다.

아빠는 막역했던 공무원 후배에게 무엇이든 좋으니 일자리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해 새로운 일을 찾을 수 있었다. 유기 동물 보호소를 그만둔지 다섯 달이 지난 초겨울, 아빠는 다시 출근을 했다.


*


아빠가 일하는 곳은 고속도로에 인접한 냉장 · 냉동 회사였다. 회사 건물은 지하 1층부터 지상 5층까지 여섯 개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3층에서 5층까지 세 개 층이 식재료를 보관하는 냉장 창고와 냉동 창고였다. 2층에는 지게차 계류장과 중장기 보관 물품 창고, 그리고 직원 사무실이, 1층은 화물 입출고 공간과 화물 출입 관리 사무실이 있었다. 지하 1층에는 건물에서 가장 큰 냉동 창고와 공조실이 있었다. 공조실은 창고에서 보관하는 식재료의 신선도를 좌우하는 중요한 설비 공간으로, 창고 내부의 온도, 습도, 공기 순환 등을 제어하는 곳이었다. 공조실에서는 회사의 필요에 따라 각 공간을 냉동 혹은 냉장 공간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24시간 설비를 가동하고 온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직원 또한 24시간 상주하는 곳이기도 했다.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화물차와 탑차가 쉬임없이 드나드느라 건물 안팍은 늘 분주했다. 새벽 여섯 시만 되어도 10톤 이상의 화물차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실어온 육류, 신선 식품, 가공 식품, 곡류 등의 식료품들을 내리면 지게차로 옮겨 창고에 보관했다. 오후부터는 택배차량이 밀려들어와 주문받은 물품들을 창고에서 꺼내어 가장 나중에 배달할 물건부터 맨 처음 배달할 물건 순으로 화물칸에 차곡차곡 싣고서 빠져나갔다. 대개 수도권이나 충청도 지역의 대형 식당에 납품하는 식재료들이었다. 자정이 넘어 마지막 택배 차량까지 빠져나가고 나면, 중장기 보관 물품이 있는 몇 개의 공간을 제외한 나머지 창고는 빈 냉장고가 되곤 했다.


아빠는 그곳에서 오후 6시부터 다음 날 오전 6시까지 야간 경비로 일을 시작했다.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을 하는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만, 아빠에겐 대수롭지 않았다. 이제까지 해 왔던 일을 그저 시간대를 바꾸어 하는 것일 뿐이었다. 아빠는 여유있게 오후 5시쯤 회사로 나갔다. 우선 구내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한 뒤 2층 사무실로 올라가면, 직원들이 하나 둘 퇴근을 했다. 1층에서는 여전히 화물차가 쉴 새 없이 드나들고 있었고, 여러 대의 3톤 지게차들은 화물을 옮기느라 분주했다. 아빠는 책상이 하나 있고, 뜨끈한 온돌이 깔린 숙직실에 대기하면서 두 시간에 한 번씩 건물 전체를 순찰했다. 점검 시간이 되어 숙직실을 나설 때면, 손전등을 챙기고 두툼한 겨울 점퍼를 걸쳤다. 추운 계절이기도 했지만, 저온을 유지해야 하는 창고의 특성상 사무실과 숙직실, 공조실을 제외한 건물 전체가 싸늘했기 때문이었다.


우선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갔다. 컴컴한 5층 창고 복도에 처음 들어설 때면 냉장 창고 내부의 건조한 냉기와 뒤엉켜 미세하게 촉촉한 공기가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냄새 같은 건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낌새였다. 복도 조명을 켜고 창고 하나하나를 살피고 나서 조명을 끈 후 한 층 걸어내려가 4층을, 그 다음엔 3층과 2층을 지나 1층에 도착하고 나면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창문이 있었다. 보통 자정 무렵까지는 화물의 입출고가 이루어지는 1층은 수백 개의 조명이 대낮처럼 환하게 켜져 있었다. 그보다 늦은 시간에도 언제 화물 차량이 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에 최소한의 조명을 켜두어서 1층 광장은 어둡지 않았다. 이어서 지하 1층 냉동 창고까지 확인하고 나면, 처음에는 낯설게 코끝으로 스며들던 차가운 낌새에 익숙해지고, 20여 분의 순찰이 끝났다.


건물을 다 살펴본 후, 가장 마지막에 들르는 곳이 바로 공조실이었다. 야간 당직자 한 사람이 있을 뿐이지만, 공조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빼곡한 공기가 아빠의 썰렁하게 식은 몸은 감쌌다. 기계실의 문을 닫아 놓았는데도, 천장부터 진동하듯 "우웽" 하고 들려오는 컴프레서 돌아가는 소리가 아빠 귀에는 몇십 톤짜리 트럭이 바로 옆을 달리며 내는 엔진 소음처럼 들려왔다. 기계로부터 흘러나오는 후끈후끈한 열기 또한 소음과 함께 공조실을 꽉 채웠다. 빈 창고 주변을 걷는 혼자만의 발소리만 듣다가 야간 당직자와 소소한 대화를 나눌 때면 그렇게나 즐거울 수가 없었다. 가끔은 공조실 직원이 그 엄청난 소음 속에서도 눈을 붙인 채 졸고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시끄러운 속에서도 잠이 들 수 있는지 신기했는데, 이내 공조실의 환경에 익숙해진 아빠는 그 옆에 나란히 앉아 다리를 뻗고 소파에 기대어 눈을 붙이기도 했다. 함께 긴 밤을 지키는 사이라서였을까. 아빠가 그곳을 그만둔 후에도, 공조실 직원이었던 조대리와는 꽤 오래 안부 전화를 주고받으며 지냈다.


주기적으로 건물 내부를 살펴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있어도 숙직실에서 마음 놓고 잠이 들기는 어려웠다. 밤새 숙직실을 지키는 사람은 아빠 혼자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새벽 1시 넘어서까지 지게차 업무를 하던 지게차 기사가 집에 돌아가지 못해 숙직식에서 잠을 청하는 날도 있었다. 새벽 네 시쯤 순찰을 돌다가 1층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면, 이전 순찰 때는 보이지 않던 화물차 한두 대가 회사 한 구석에 주차되어 있는 것을 볼 때도 있었다. 일이 너무 늦게 끝났거나, 제때 시간을 맞추지 못하고 일찌감치 물건을 싣고 온 기사의 차였다. 그들은 이른 아침부터 해야 할 일 때문에 집에 들르지도 못한 채, 화물차에서 쪽잠을 자고 있을 터였다. 그들에 비하면 아빠는 일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너무도 편한 업무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모두가 잠든 시간에도 부지런히 일하며 세상을 돌보는 사람들이 있어 나머지 사람들이 편안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아빠는 냉동 창고 야간 경비로 일하는 동안 비로소 체감했다.


숙직실에서 신문을 보거나 책을 읽고, 알람을 맞춰두고서 한두 시간 눈을 붙이다 보면 아침 6시가 다가왔다. 그 시간이면 이미 화물 입고가 시작되었고, 이른 업무로 하나, 둘 직원들이 출근했다. 마지막 순찰을 마친 아빠가 구내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나면 하루 업무가 마무리 되었다.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아빠는 커튼을 치고서 무거워진 사지를 침대에 누이고 알람도 끈 채 잠을 청했다. 몇 시간이 됐든 푹 자야지, 마음 먹어도 너댓 시간을 넘기지 못해 눈이 떠지곤 했다. 야간 업무에 익숙해지듯, 아침에 드는 잠자리에도 익숙해져야만 하는 일이었다.


야간 경비로 일한지 석 달이 되었갈 무렵, 아빠는 주간 업무를 맡게 되었다. 그리고 엄마는 원하던 대로 경주에 집을 얻어 이사를 했다. 아빠는 그대로 엄마와 함께 경주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이곳에서 맡은 일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보고 싶었다. 서로 물리적 거리를 두고 각자의 생활을 해 보는 것이, 그간의 얽힌 갈등을 푸는 데에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엄마가 떠난 후 남은 짐을 정리한 아빠는 회사 근처의 낡고 오래된 원룸을 얻었다. 아빠가 버는 적은 돈으로 원룸 생활을 이어나가려면 월세가 저렴해야 했다. 덕분에 아빠가 묵는 원룸은 숙직실보다도 웃풍이 셌다. 아빠가 사용하던 책상과 책들을 원룸으로 옮기고, 어두침침한 방을 깨끗하게 청소했다. 아침 식사는 사 두었던 순댓국이나 해장국을 데워 해결했다.


2015년 새해를 엄마는 경주에서, 아빠는 원룸에서 맞이했다. 엄마와 아빠, 모두에게 유난히 추운 겨울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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