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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장 Jan 08. 2024

내비 없이도 길이 보이는 나라

덜컹이는 푸르공과 초능력자 기사님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


 어른이 되어도 삶의 갈피를 잡는 일은 쉽지가 않다. 나만 빼고 모두들 제 갈 길을 잘 아는 듯한 기분. 불안한 마음에 남들 따라 걷고는 있지만, 이게 맞는 길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런 답 없는 고민에 빠졌을 땐 두 가지 해결책이 있다. g.o.d의 <길>을 들으며 청승을 떨거나, 몽골에서 본 대초원을 떠올리는 것.

 몽골, 그곳에선 쫓아갈 사람은 커녕 제대로 된 길도 없는 허허벌판뿐이었지만, 덜컹이는 푸르공만 있다면 우리가 가는 곳이 곧 길이었다.


 없는 것 빼곤 다 있는 차, 푸르공


 몽골 여행엔 꼭 필요한 동반자가 네 종류 있다. 여행메이트, 가이드, 운전기사, 그리고 푸르공. 그중에서도 푸르공은 여행 내내 우리의 발이자, 그늘이자, 짐꾼이 되어 주는 가장 중요한 친구였다. 대체로 몽골 여행을 가게 되면 이 푸르공과 함께 하게 되는데, 나는 여행 가기 전부터 이 녀석의 악명 높은 소문을 들었더랬다.


여행 내내 함께해 준 우리의 푸르공

  

 에어컨? 없어요. 안전벨트? 없어요. 내비게이션? 당연히 없습니다. 평범한 보통의 차들과 비교는 금물이다. 험난한 비포장 도로를 달릴 자동차라면 당연히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들, 그 모든 게 푸르공에는 없었다.


푸르공 뒷자리 뷰

 모포 같은 재질의 좌석은 착석감이 어찌나 형편없던지, 비포장 도로가 대부분인 여행 내내 멀미약과 목쿠션이 필수였다. 아 참, 다 마신 콜라 페트병도 한 두 개쯤 남겨놔야 했다. 창문 고정 장치도 없어서 늘 창틀에 페트병을 끼운 채 달려야 했으니까. 가끔 알 수 없는 몽골 가요가 흘러나오던 낡은 라디오가 이 자동차의 유일한 신문물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탄 푸르공이 유독 고물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야말로 굴러가는 게 신기할 지경인 자동차였다.


 이쯤 되면 도대체 이 차를 왜 타느냐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수많은 단점에도 불구, 나는 푸르공 없는 몽골 여행은 팥 없는 찐빵과 같다고 확신한다. 나의 몽골 추억 중 8할은 푸르공이 만들어줬대도 과언이 아니니까.


페트병 꽂힌 창문 너머로 보던 몽골의 풍경

 손으로 밀면 문처럼 열리는 창문이 좋았다. 조금 수고롭긴했지만, 창밖의 몽골이 더 색다르게 눈에 들어왔다. 500ml 페트병 너비만큼 들어오던 바람은 너무 차지도 덥지도 않고 적당했다. 착석감은 좀 후졌지만, 덕분에 우린 흔들리는 차 안에서도 편하게 딥슬립하는 법을 터득했다. 여행 초반 엉덩이가 들썩일 때마다 놀이기구 타듯 즐거워 했던 기억은 덤이다.


내 이름은 푸르공, 낭만이죠.

  

 푸르공은 몽골 땅 어디에 세워두어도 그 자체로 그림이 됐다. 허허벌판 한가운데에 찍힌 그야말로 화룡점정이랄까. 단점이 곧 장점이 되는 이토록 매력적인 자동차. 쉽게 말해서 푸르공엔, 다른 자동차에는 없는 '낭만'이 있었다.



초능력자 운전기사님을 소개합니다


 나와 여행메이트들은 참 운이 좋았다. 투어회사는 우리에게 회사에서 가장 베테랑인 기사님을 배정해 주셨다고 했다. 처음엔 그냥 하는 말이라 생각했는데, 정말 우리 기사님인 또야씨는 안전벨트가 없어도 안심이 되는 프로 중의 프로였다.


 

 끝이 있을까 의심될 정도로 사방팔방 뻗은 지평선, 어떤 날은 몇 시간을 달리고 또 달려도 똑같은 풍경만 반복됐다. 흙길이라도 나있으면 다행이다. 대부분은 사실상 풀 혹은 모래뿐인 평야 위를 무작정 달리는 코스였다. 핸들 방향을 조금만 잘못 틀어도 목적지와 영영 멀어져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체 어떻게 길을 찾으시는 거지?”


기사님이 그저 신기했다. 나침반도, 지도도 한 번 보지 않고 허허벌판을 거침없이 나아가는 모습이 초능력자 같았다. 우리는 가이드에게 기사님의 노하우를 물었다. (기사님은 몽골어밖에 못하셨음.)


“그냥 안대요. 길이 없어도 길이 보인대요.”

우리는 ‘오오!’하고 탄성을 내뱉었고 기사님은 그저 허허 웃으셨다.


 만약 생활의 달인 몽골 편이 있다면 우리 기사님이 출연해야 하지 않을까? <인간 뇌비게이션! 운전의 달인 편>. 운전 실력도 실력이지만 대답이 완전 명언이잖아.


 기사님의 말은 수많은 세월을 다녔기에 눈 감고도 갈 수 있다는 뜻이었으리라. 하지만 그때 나는 보이지 않는 길을 달리는 푸르공 속에서, 세상엔 우리가 모르는 다양한 길이 있음을 배웠다.




게르 앞에 세워 둔 푸르공


 어느 날은 갑자기 차에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어쩌면 이 고물 푸르공 때문에 여행을 멈추게 될 수 있겠다는 최악의 상상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사막 한가운데에서가 아니라 마을에서 장을 보고 돌아온 직후에 일어난 일이라는 거였다.

 

 평소의 나였다면 분명 불안했겠지만, 몽골에선 달랐다. 여차하면 그냥 그 마을에서 묵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꼭 여행이 정해진 코스대로 흘러간다는 보장이 있나? 몽골은 그런 마음가짐이 절로 들게 하는 나라였다.


 다행히 우리 기사님의 손재주로 푸르공은 다시 굴러갔다. 이후에도 한두 번 문제가 생겼지만 그때마다 기사님이 뚝딱 고치셨다. 뚝딱이라 썼다고 금방 고친 건 이니고, 시간은 좀 걸렸다. 그래도 싫지는 않았다. 고치는 동안 나와 여행메이트들은 밖에서 스트레칭을 하거나 주변을 구경하거나 했으니까. 차가 고장 나지 않았다면 지나쳤을 곳들을 덕분에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저 기사님만을 믿고, 그 순간을 즐기면 될 뿐이었다.


 지금도 그때의 풍경은 물론, 기사님이 차를 고칠 때마다 나던 기름 냄새가 떠오른다. 몽골 여행 중 생긴 변수는 늘 예상치 못한 추억이라는 결괏값을 주었다.


 

불안할 땐 몽골을 떠올린다


 현실은 편안하지만 때때로 불안하다. 그럴 때 몽골을 떠올리면 왠지 기운이 난다. 에어컨도 없는 낡은 자동차, 엉덩이가 들썩이는 비포장 도로, 기사님의 뇌비게이션만 믿고 떠나야 하는 제법 불편한 여행. 하지만 조금 불편은 했어도 불안하진 않았던 여행.

 여행지를 도피처로 생각하지는 않지만, 여행의 추억은 잠깐의 도피처로 삼아도 괜찮은 것 같다. 우리가 가는 곳이 곧 길이고, 잠깐 쉬어가더라도 괜찮았던 몽골에서의 추억을 떠올리면, 현실 속 근심과 걱정 틈에서도 조금은 숨 쉴 구멍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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