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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미 Jul 20. 2020

품위의 기원

 버릇이 생겼다. 지하철에 오르면 가장 먼저 사람들의 신발에 시선이 멎는다. 길을 걸으면서도 스치는 행인들의 신발부터 보게 된다. 전에도 무심코 다른 이의 신을 본 적은 있지만 요즘 들어 특히 더하다. 슬리퍼나 샌들이 자주 눈에 띈다. 계절 탓이다. 본의 아니게 신발 주인의 속살을 본다. 알록달록 색칠한 발톱이 가지런한 발이 보이는가 하면, 굳은살 때문에 뒤꿈치가 갈라진 발도 있다. 하는 일이 고단해 발뒤꿈치까지 신경이 미치지 못하는 건가 넘겨짚으며 발 주인에게 시선이 옮겨 간다. 신발에서 삶의 흔적이 보인다. 얼마나 많은 길을 걸었는지, 어떤 사람을 만났는지, 주인의 컨디션은 어땠는지 모두 담겨 있다.     


 연애 중인 커플을 제외하고는 한 자리에서 같은 신을 신은 사람을 만난 적이(아직까지는) 없다. 제각기 다른 인생임이 신발에서도 드러나는 듯하다. 디자인도, 크기도, 색깔도. 좋은 신은 신발 주인의 발을 괴롭히지 않는다. 발 모양에 따라 신의 모양도 변한다. 새 신발의 경우 간혹 처음 얼마간 뒤꿈치가 살짝 벗겨지거나 새끼발가락에 물집이 잡히기도 한다. 길들지 않은 신발과 신는 이의 발이 낯설어 생긴 서로의 저항이다. 보기와는 다른 신발도 있다. 가만히 두었을 때는 멋진데 막상 신고 걸음을 떼는 순간 아차 싶다. 발등이 접히는 부분이 뻣뻣해서 걷는 내내 아프거나, 굽이 좀 높기라도 하면 하중을 제대로 받치지 못하고 발전체가 앞으로 쏠려 발가락은 조이고 뒤축은 헐거워지는 것이다. 힐을 좋아하지 않아 거의 신지 않지만 옷차림을 이유로 신었다가 테이블 밑에서 구두 밖으로 발가락을 내놓고 꼼지락거린 경험이 있다. 그때 이후 하나뿐인 내 하이힐(이라고 해봐야 5센티 정도인) 구두는 신발장 붙박이 신세다.     


 작은 발이 콤플렉스다. 성인 여성의 발 크기가 23센티에서 25센티 정도라고 하는데, 나는 22센티 정도다. 정확히 재면 21.5센티. 이러다 보니 발에 맞는 성인용 신발을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마음에 드는 신발은 맞는 치수가 없기 십상이고, 어쩌다 맞는 치수가 있는 신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신발 안에 밑창을 깐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치수를 억지로 맞춰 신어 봤다. 발이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지금 신발장에 있는 신발들은 이런 지난한 과정을 겪으며 선택받았다. 신발에 욕심이 있는 내 발이 평균 치수였다면 현관 신발장이 차고 넘쳤을 거다. 발이 작아 신발 사재기에 제동이 걸린 덕에 다른 식구들이 신발장 자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처음 구두를 신었다. 다행히 발에 맞는 신이 있었다. 유명 브랜드의 학생용 검정 구두였다. 삼 년 동안 매일 같이 집에 오자마자 솔로 먼지를 털어내고 구두약을 칠했다. 사진이 없으니 머릿속에서만 선명하다. 구두는 항상 반짝거렸다. 비가 오는 날이면 등교해서 실내화를 갈아 신자마자 교실 뒤 폐휴지함에 쌓여 있던 신문을 가져다 물기를 닦고 구두 속에 채워 두었다. 야간 자율학습이 끝날 때까지 비가 멈추지 않으면 실내화를 신은 채 버스를 타고 집에 왔다. 유난스러웠다. 도시락에 계란 프라이 반찬은 없어도 내겐 가죽 구두가 있었다. 자존심은 강하지만 자존감은 낮았던 열일곱 살 여자 아이를 버티게 해 준 품위의 징표였다. 파리가 낙상할 만큼 반짝이던 구두는 이후 몇 번의 이사를 거치면서 없어졌다. 졸업할 무렵까지 새 신처럼 긁힌 데 하나 없이 반짝이던 구두였는데.     

 

 대학에서 신은 신발은 운동화였다. 학생 대부분이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인 데다, 화려한 입성엔 오히려 눈살을 찌푸리는 분위기도 한몫했다. 결정적으로, 운동화를 신어야 스크럼(scrum) 대열에서 뒤처지지 않았다. 본관 앞에서 만들어진 대열이 교문 앞까지 달려 나오는 일은 속도가 관건이었다. 어물정대다간 일(?)을 그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강남 아파트 단지 안 슬레이트 부스에서 옷 수선을 하며 혼자 몸으로 자식을 부양하던 엄마를 떠올리며 시위대 앞줄에 선 내게, 하이힐이나 미니스커트는 척결해야 하는 자본주의적 사치일 뿐이었다. ‘독재타도’ 구호와 사회과학 스터디 안에 나의 품위를 지켜주는 무언가가 있다고 믿었다.     


 이 학년 때였나. 동아리 엠티를 위한 사전답사를 간 적이 있다. 소풍 같은 기분에 들떴는지 낡은 내 운동화 대신 동생의 비싼 운동화를 몰래 신고 나섰다. 아뿔싸! 기차에서 내려서도 한참을 걸어 도착한 목적지는 폭우로 온통 물바다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텐트를 치기로 했던 곳을 찾지 못하고 길을 잃었다. 일행 모두 허리춤까지 물이 차오른 수풀인지 밭인지도 구분할 수 없는 데를 헤쳐 가며 걸어야 했다. 동생 몰래 신고 나온 비싼 운동화가 흙탕물에 엉망진창이 돼버렸다. 솔기 사이사이 배어 든 진흙은 칫솔로 닦아내도 소용없었다. 동생이랑 남남될 뻔했다. 새삼 궁금하다. 동생은 그 비싼 신발이 어떻게 생긴 걸까. 엄마는 ‘먹고 죽으려도 없는 돈’이란 푸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다른 이의 품위는 내 것이 될 수 없었다.     


 



 명품(?) 신발이 하나 있다. 눈먼 돈이 생겨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산 구두였다. 디자인이며 재질이 모두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작정하고 신고 나가기만 하면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구두 바닥이 매끈했기 때문이다. 사기 전엔 미처 신경 쓰지 못했지만 바닥이 매끈한 이유를 알 것 같다. 명품 신발을 신는 사람들은 대개가 맨 땅을 걸을 일이 별로 없을 테니 밑창에 요철이 필요 없다. 고급 승용차 아니면, 굳이 많은 걸음이 필요 없는 사무실, 바닥이 폭신한 카펫으로 덮인 레스토랑, 엘리베이터가 고작이다. 재벌이 등장하는 드라마를 보면 그랬다(내 삶의 반경에서 그들을 만날 일은 없으니). 그런 신을 신고 길거리를 걸으니 걸핏하면 미끄러지는 거다. 은근히 뽐내려던 속내가 드러난 듯해서 창피함이 더했다. 누군가 조언했다. 

“밑창을 덧대.”

신발을 샀던 매장에 가서 그렇게 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못해준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유를 물으니 ‘원래의 디자인에 변형을 주기 때문’이란다. 욕할 뻔했다. 직원이 미소를 지으며 건넨 팁은,

“구두 수선 집에선 해줘요.”였다.

완벽한 서비스를 해준다더니 아니었다. ‘명품’은 품질과 서비스에 덕분에 얻은 이름이 아님이 분명하다. 명품 구두는 내 품위를 지켜주지 못했다.     




 여전히 신발을 중요하게 여긴다. 옷은 구멍만 나지 않았으면 입는다. 꿰매 입기도 한다. 신발은 그러지 못한다. 유명 브랜드를 고집하는 건 아니다. 제대로 만든 것이라야 한다. 디자인은 단순할 것, 여러 색이 섞여 있지 않을 것, 재질이 좋을 것, 시간이 지나면서 발 모양에 자연스럽게 맞춰져야 할 것. 까다로운가. 돈이 많이 들겠다고? 만 원짜리 열 켤레 살 돈을 모아 십 년 신어도 한 결 같은, 좋은 신 하나를 산다. 이렇게 선택한 신발은 모두 내 발과 취향에 맞는 편안한 신이다. 외출하며 신발을 고르느라 주저할 필요가 없다. 내키는 대로 발만 스윽 집어넣으면 된다.     


 나의 삶도 발에 익숙해진 신발처럼 나와 잘 맞아야 편안하다. 습관적인 익숙함에 길들여진다는 뜻이 아니다. 편안하지 않는 신을 신고는 오래 걷기 힘들다. 발에 신경이 쓰이지 않아야 좋은 신발이다. 의도하지 않게 일이 틀어질 때마다 슬리퍼를 신고 달리기 시합에 나선 기분이었다. 엎어질 때마다 신발 탓만 해댔다. 제대로 된 신을 신던지, 시합에 나서지 말던지 해야 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도무지 나아지는 것 같지 않을 때면 하이힐을 신은 채 사막을 건너면 그렇겠지 했다. 사막이란 으레 그러려니 여기며 방향을 잃지 않도록 정신 차리고 수분 섭취나 하면서 목적지를 향해 뚜벅뚜벅 걸으면 될 일이었다. 내가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 어떤 신을 신고 그 길을 걷는지 알아야 한다. 오늘, 캔버스화를 신고 나섰다. 가벼워서 좋았다. 예기치 못하게 한 시간 반 정도를 걸었더니 발바닥이 후끈거린다. 워킹화를 신었더라면 다리 근육을 키우는 시간이었을 텐데. 발바닥에게 ‘I'm so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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