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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지 Dec 23. 2018

한 발, 두 발. 시작이다.

“여기서 타는 거 맞나?" 

“정류장이 이 근처라고 네가 그랬잖아.” 

“내가 찾아봤을 땐 그랬는데…. 그런데 왜 베시사하르로 간다는 버스가 없지?” 

“여기가 아닐 리 없잖아? 사람들이 포카라에서 버스 타고 가장 많이 가는 데가 어디겠어?” 

더스틴이 물었다. 베시사하르? 내가 말했다. 그렇지, 그러니까 버스도 이 근처에 있겠지. 


포카라 숙소에서 3km 남짓을 걸어온 참이다. 버스터미널은 쉽게 찾았다만, 안나푸르나 트레킹의 시작점인 베시사하르로 간다는 버스는 찾을 수가 없다. 


“사람들한테 물어보자.” 

“뻔한데 뭘 물어봐. 내가 저쪽 가서 찾아볼게. 여기서 5분 후에 만나자.” 

더스틴이 ‘저쪽’으로 맹렬히 달려갔다. 포카라 한국 식당에서 빌린, 해지고 구멍 난 등산화가 유난히도 후져 보이는 뒷모습이다. 좀 후회되네. 공짜로 빌려주는 신발이 마침 더스틴 발 사이즈에 맞길래 빌려온 건데. 그래도 새 걸로 하나 살 걸 그랬나. 아무래도 안나푸르나씩이나 등반하는데 말이야…. 내 것도 짝퉁이긴 하다만…. 따위의 생각을 하며 더스틴이 간 반대 방향으로 가봤다. 배낭이 무겁다. 숙소에 웬만한 짐은 다 덜고 와서 무게가 반은 가벼워졌는데, 이쪽저쪽을 왔다 갔다 해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 무겁다. 


그냥 내일 갈까. 


또 이 생각. 포카라에 와서 이 생각만 다섯 번째다. ‘그래, 그냥 내일 가자’라는 생각에 닷새를 질질 끌려다녔다. 닷새를 지낼 만큼 포카라가 좋았냐고? 아니. 슬쩍 가짜 냄새가 나는 도시. 현지 주민을 위한 마을이라기보단, 돈 많은 여행자를 위해 만들어진 숙소와 식당이 즐비한 마을. 그래서 포카라가 싫었냐고? 그건 또 아니다. 포카라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게 다 있었다. 히말라야 등반에 필요한 이것저것을 파는 등산용품점이 수십 개나 있었다. 에어컨과 와이파이 시설이 완비된 숙소에 편히 앉아 히말라야 등반에 필요한 정보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부지런히 쇼핑하고 정보를 찾았냐 하면…. 그건 또 아니지. 


마음만 먹으면 언제고 필요한 것을 살 수 있고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기에, 우리는 마음을 먹지 않았다. 아무런 장비도 사지 않고 아무런 정보도 찾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한 달 가까이 산 위에서 보낸다는 게 조금 두려워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두려움을 직면하는 대신 회피했다. 에어컨 바람을 쐬며 숙소에 끈덕지게 누워 있다가 지루해지면 밖으로 나가 페와 호수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페와 호숫가에는 서양 식당, 일본 식당, 한국 식당과 카페가 수두룩했다. 우리는 마음에 드는 식당과 카페를 들락거리며 주제넘는 가격을 내고 시간을 보냈다. 좋았다. 편했다. 그렇게 닷새가 흘렀다. 


포카라 페와 호수


“베시사하르? 여기서 타는 거 아니에요. 길 건너면 계단이 있는데, 그거 따라 내려가면 버스 몇 대가 모여 있는 게 보일 거예요. 거기서 타면 돼요.”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으니 바로 답이 나온다. 진작에 물어볼걸. 더스틴과 헤어졌던 곳으로 돌아가 그를 기다렸다. 그래. 오늘은 안나푸르나로 가야겠지. 다시 포카라로 돌아갔다간 닷새, 아니 열흘은 더 뭉개고 있게 될지도 몰라. 포카라에 더 오래 머문다고 해서 히말라야 등반을 철저히 준비할 우리도 아니고. 그래도 이건 좀 어설픈가. 아무래도 재정비를 해야 할까. 포카라에서 닷새간 준비한 거라곤 바람막이 잠바와 정수제, 등산용 긴 바지, 털모자, 등산화 정도다. 안나푸르나 라운딩 코스의 고지는 혹독한 겨울 날씨라던데. 아무래도 겨울용 침낭 정도는 샀어야 했어. 


멀리서 더스틴이 걸어왔다. 복슬복슬한 수염. 햇볕에 잔뜩 그은 피부. 외모만큼은 히말라야에 세 번 정도 올라갔다 내려온 사람처럼 완벽히 준비된 그. 해진 신발 끈에서 빠져나온 실밥 뭉치를 땅에 질질 끌며 내게로 오고 있다. 




안나푸르나 베시사하르로 향하는 버스는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아슬아슬하게 달렸다. 젊은 네팔 남자들은 버스 대신 버스 지붕 위에 올라앉아 환호인지 야유인지 모를 소리를 내질렀다. 버스가 달리는 길은 ‘낭떠러지’라고 표현하는 게 가장 적절했다. 낭떠러지 아래로 버스 한 대가 먹다 버린 맥주캔처럼 찌그러져 있다. 지금 우리가 타고 있는 이 버스도 곧 저 찌그러진 버스 곁으로 날아갈 것만 같다. 그렇게 된다면 나와 더스틴을 포함한 사람들은 김빠진 맥주처럼 쏟아져버리겠지. 침을 꿀꺽 삼켰다. 마른침에 목구멍이 아프다. 


버스가 베시사하르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버스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갔다. 물과 기름이 갈라지듯 네팔 현지인들은 마을로 걸어가고, 트레커들은 대기 중인 다른 버스 안으로 들어갔다. 


“버스 타?” 

더스틴이 물었다. 

“음…. 일단 밥을 먹을까? 산 위로 올라가면 밥값이 비싸진다잖아.” 


대충 아무 식당이나 골라 들어갔다. 네팔 아저씨들 사이에 끼어 앉아 쵸우민(볶음국수) 한 접시를 시켰다. 버스 타지 말고 그냥 걸어가자, 걸으려고 온 건데. 내가 말했다. 불불레까지 도로가 나서 차가 많이 다닐 거라던데. 먼지도 많이 나고. 더스틴이 말했다. 괜찮아. 걷기 연습해야지. 너 연습 좋아하잖아. 


“자 여기야. 우리 시작한 거야. 여기가 안나푸르나 트레킹의 시작이다!” 

내가 말했다. 식당을 나와 몇 발자국 걸은 참이다. 그런데 이렇게 한 발자국씩 걸어서 언제 다 걷냐. 빨리 걸어도 2주가 걸린다는 이 거대한 산을.... 별수 있어? 한발 한발 걷는 수밖에. 더스틴이 대꾸했다. 


한 발, 두 발. 시작이다. 

우리는 걷고 있다. 안나푸르나를. 


한 발, 두 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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